일반상식

마누라와 영감의 어원(아까돈보)

오토산 2015. 9. 3. 20:49

 

 

마누라, 영감의 어원 및 뜻을 아십니까?

글 :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 최병문

대개 부부간의 호칭에 있어서 늙은 남편을 "영감", 늙은 아내를 “마누라”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마누라'는 원래 남녀 구분을 떠나서 '왕'이나 '왕후'. 세자. 세자빈를 일컫는 극존칭이며, '영감'이란 호칭은 '정삼품 이상 종이품 이하의 관원'을 말하는 직명이다.

'마누라'는 '마노라'로 쓰였는데, '대비 마노라' '선왕 마노라' 처럼 '임금이나 왕후. 세자. 세자빈에 대한 가장 높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주로 궁중에서 최상층의 상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것으로 보아 '아주 높은 사람'의 뜻이다. 무속에서는 '신(神)'을 가리키는 말이다. '산신 마노라 (산신령)', '터주 마노라 (터주신)' 등등의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극존칭으로서, 높일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그리고 부르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 후기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가정집의 부인을 지칭하거나 남에게 아내를 부르는 말로 변했다.

지금은 남편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내를 지칭할 때나 또는 아내를 “여보! 마누라” 하고 부를 때나, 다른 사람의 아내를 지칭할 때 쓰이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아내의 호칭으로 변화하였는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다는데, 남편을 “영감”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영감'이란 호칭은 "정삼품 이상 종이품 이하의 관원”을 말하는 직명이었다. 오늘날 판사나 검사를 특히 "영감님”으로 부르는 것은 그 직급이 옛날 그 관원의 등급과 유사해서 그렇게 부른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남편보다도 아내를 더 높여서 불렀던 모양이다. 남자는 기껏해야 “정삼품”의 호칭으로 지칭 했는데, 아내는 "왕이나 왕비”의 호칭을 사용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 "마누라”와 "영감”은 서로 대립된 호칭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우리 배달민족(倍達民族) 보다 여자를 잘 존중해 온 민족은 이 세상 그 어느 구석에도 없다. 단지, 중국 대륙 문화의 왜곡된 유교 문화가 들어 와서 여자들이 힘들었던 조선 후기와 말기의 어두운 역사의 질곡을 제외하곤 말이다. 환국. 배달국.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국(발해). 통일신라. 고려. 조선 초기까지의 우리 민족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보면,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는 항상 여자를 잘 받들어 왔고 존중하여 왔다. 적어도 조선 후기와 말기 역사의 부끄러운 과거를 빼놓고는 말이다.

중국의 가족 문화는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차별적 가족문화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材)를 잘 받들고 사람을 존중하는 기질이 강해서, 한국의 전통 문화는 아들. 딸. 친가. 외가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가족문화로서,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로 이어져 왔다.

조선시대 율곡 이이 선생. 퇴계 이황 선생. 이순신 장군 등등 모두 ‘처가(妻家)살이’를 했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결혼문화는 일단 모계 사회였다. 결혼을 하게 되면 먼저 처가살이를 하고 애를 낳고 애가 성장하면 따로 분가하는 것이 전통적인 문화였다. 물론 조선 초기에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친영론’에 따라 여자가 결혼하면 먼저 남자 집에서 살게 하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그다지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중종도 이런 시책을 추진했지만 그다지 빛을 바라지 못하였다.

그런데, ‘처가(妻家)살이’ 풍습이 왜 없어졌을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민심 회복 차원에서 유교 이념을 민중에까지 퍼트리고, 상류층 위주로 퍼져있던 중국 풍습의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하층 민중에 보급하면서 우리 전통 가족문화도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주자(朱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주자(朱子)의제자들이 주자의 이름을 빙자하여 중국식 풍습에 근거하여 가례(家禮)를 마구 적어 놓은 책이다. 주자(朱子)는 원래 흠 잡을데 없는 인물이었으나, 그 제자들이 그의 명예를 훼손한 대목이다.

중국의 문화는 매우 호전적이고 침략적 기질이 강해서, 중국의 가족 문화는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차별적 가족문화였다. 그러나,한국의 전통 문화는 일단 모계 사회의 전통이 이어져 왔었고,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는 일정기간 처가살이를 해야 했고, 애를 낳고 애가 성장하면 따로 분가 하는게 전통적인 결혼 문화였다. 한국인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材)를 잘 받들고 사람을 존중하는 기질이 강해서, 한국의 전통 문화는 아들. 딸. 친가. 외가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가족문화로서 특히여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지켜왔다. 그러한 전통은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로 이어져 왔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의 커다란 국란과 무수한 수탈을 겪으면서, 사회민심이 흐트러지자, 국가적으로 민심 회복 차원에서 유교적 성리학 이념을 민중에까지 퍼트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유교적 규범과 중국식 풍습이 일반 민초들까지 파고들면서 우리 전통 가족 문화도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여자를 박대하면, 그 집안은 부흥할 수가 없고 그 집안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정에서 여자의 권리를 존중해 주지 않으면, 그 가정은 제대로 경영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은 아주 자명(自明)한 이치이다. 사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 보다 여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나라가 없었다. 적어도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는 여권(女權)을 존중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유교(儒敎) 사상이 고착화되더니, 우리 고유의 문화를 다 잃어버린 것이다. 유교(儒敎)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우리의 고유 전통과 사상을 망(亡)쳐 놓았다. 남자를 존대(尊對)하고 여자를 비하(卑下)하는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은 원래 오랑케의 사상이었다.

★ 마누라에 관한 에피소드 한 토막 : 저녁을 든든히 먹은 변강쇠는 옹녀가 밥상을 채 나가기도 전에 옹녀의 손목을 부여 잡고 바지를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니, 마누라의 어원에 대해서 아나?" 모처럼 변강쇠에게 질문다운 질문을 받고 기쁜 나머지 골똘이 생각에 잠긴 옹녀. 그러나 그쪽으로 머리가 돌아갈 리 없는 그녀가 멍하니 있자 변강쇠는 옹녀의 옷을 벗기며 말했다. "그건 말이다, 부부가 잠자리에 들때 생긴기라..." 그래도 옹녀는 영문을 몰라 빤히 쳐다보자 변강쇠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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