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주촌파 이운후계열

오토산 2016. 2. 22. 12:22

 

 

  주촌파 이운후 계열

 

주촌파 - 이운후 계열|

 
 

6. 주촌파 - 이운후 계열

 이운후는 문음으로 벼슬을 받아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에 이르며, 증직으로 통훈대부 사복시 정正이 된다. 안동 권씨와의 사이에서 정禎을 낳는다. 운후와 관련된 일 중 주목해 볼 만한 것은 다음의 일절이다.

 

(이운후)는 안동부의 동쪽 가구산佳邱山에 모셨다. 증직으로 좌의정을 받은 안동권씨 희정希政의 여식을 취했으니, 안동부 북쪽 도답촌 수리동에 모셨다. 내외의 자손 중 가구에 사는 사람도 있고 주촌에 사는 사람도 있어서 편한 대로 제를 올렸다. 가구에 사는 자손은 가구의 묘소에 가서 제를 올리고, 주촌에 사는 자손은 수리동 묘소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후세의 자손들도 그 법도를 따라 행하여 결국 세대가 멀어지게 되자 향화香火가 끊어지기도 하였다. 가구의 묘소는 지금은 실전되었다. 작년에 조부 훈도공訓導公이 퇴도退陶선생의 명에 따라 가구에 거주하는 서얼 외손인 정민鄭泯을 데리고 직접 가구에 가서 살펴보았는데, 가구는 언덕과 구릉이 첩첩이 쌓여 있는 곳이라서 정확하게 찾아낼 수 없었다.

 

「세전유록」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상당한 이야깃거리를 던져 준다.

 이운후는 3세이고, 아황은 7세이다. 3세인 이운후의 묘소가 7세인 이황의 시대에 이르러 실전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가? 가구동에 이운후의 묘소가 있는데 두루의 종가쪽 사람들이 가구의 묘소를 찾지 않고 모친이 모셔진 수리동의 묘소에만 제를 올렸다는 점, 그리하여 가구의 묘소 위치를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점은 이황 이전 시대 조선의 묘지문화를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운후의 아들 정禎은 문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간다. 벼슬이 증직대부 선산善山부사에 이르렀다. 이정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세종 시대에 영변진을 설치하고 약산성을 쌓았는데, 이정은 판관으로 참여해 일을 완성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우양遇陽, 흥양興陽, 계양繼陽 등 세 아들을 두었다.

 

 공이 선산에 있을 때 소나무 분재를 조석으로 가꾸었다. 사위 박근손朴謹孫이 부(선산) 안에 살았는데 공이 체임되어 귀향할 때 그 소나무를 주시며 “줄 것이 없으니 애지중지하던 소나무 분재라도 주고 싶다”하였다. 그 후 박공이 그 소나무를 땅에 옮겨 심어 키우니 가지가 무성하고 넓어 그 그늘 속에 50여인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선생이 본도(평안도)에 사명이 있어 가실 때면 가서 보고 매양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세전유록」의 선산부사 이정 관계 기록이다.

 이정은 나무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지금 두루 종가 앞에는 6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향송이 버티고 서 있는데, 이것 역시 이정이 심은 것이라 한다.

 

 이 나무의 유래를 기록한 「노송기」에는 선산공께서 세종조 판관으로 재직시 북쪽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한 평북도 영변진 설치와 약산성 증축의 대역사를 감독하여 공적을 남기시고 귀향길에 약산 향송 3주를 옮겨와 한 그루는 본가에 심고 또 한 그루는 공의 셋째 아드님이 온혜 기지를 열 때 주어 심게 하였으며, 나머지 한 그루는 박근손 가에 주어 심으셨다고....

 

 두루 종가의 종손 이세준 씨의 기록이다.

 박근손 가에 심은 향송은 위의 분재 소나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양은 선산부사 이정의 큰 아들이다. 우양 계열은 두루의 종가를 이어 내려온다.

 

공은 뜻이 컷고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했으며 문행文行이 높았다. 천순天順 경진庚辰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인동현감에 이르렀다.

 

 천순은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천순 경진년은 1460년에 해당 된다.

 우양은 공인恭人 청주이씨와의 사이에서 철손哲孫을 낳는다. 철손은 정통正統 신유년(1441년)에 출생하여 홍치洪治 무오년(1498년)에 타계한다. 진성이씨 운후 계열에서 처음 보이는 생졸년 기록이다. 이후에도 생졸년이 모든 경우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철손은 문음으로 충순위忠順衛가 된다. 함창 이씨와의 사이에서 훈壎, 감堪 등을 낳았다.

 훈은 자字가 자화子和이다. 무재가 있어서 군적에 이름을 올렸다. 초시에 여러 번 응시 하였으나 등과하지는 못하였다. 만년에 산업에 힘써 가산을 크게 늘리고 50여 칸의 종가를 지었다. 흉년에 집 앞에 솥을 걸어 놓고 무수한 사람들을 구휼하였다고 한다. 훈의 아우 감도 무예가 출중하였으나 일찍 죽는다. 훈은 조카들도 거두어 기르고 충분히 전토를 마련하여 주었다. 훈은 예안 김씨와의 사이에 연演을 낳는다.

 연은 자가 호연浩然이고 훈도를 지냈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고, 사람을 접대하는 것을 즐겼으며, 가산을 돌보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만년에 정자를 지었는데 퇴도 선생이 경류慶流 라고 편액을 쓰고 시를 지어 학문에 힘쓸 것을 독려하였다.

 

「세전유록」의 기록이다. 경류정은 나중에 처음 있던 곳에서 종가 옆으로 옮겨져 오늘에 전하여진다.


 


진성이씨 세계표(世系表)  2 주촌종파

3세

운후주촌종 파조 

 

 

 

 

 

 

 

 

 

 

 

 

 

 

 

 

 

 

 

 

 

 

 

 

 

 

 

 

 

 

 

 

 

 

 

4세

 

 

 

 

 

 

 

 

 

 

 

 

 

 

 

 

 

 

 

 

 

 

 

 

 

 

 

 

 

 

 

 

 

 

 

5세

우양

 

 

 

 

 

 

 

 

 

 

 

 

 

 

 

 

 

 

 

 

 

 

 

 

 

 

 

 

 

 

 

 

 

 

 

6세

철손

 

 

 

 

 

 

 

 

 

 

 

 

 

 

 

 

 

 

 

 

 

 

 

 

 

 

 

 

 

 

 

 

 

 

 

7세

 

 

 

 

 

 

 

 

 

 

 

 

 

이계파

 

 

호동파

 

 

 

 

 

 

 

 

 

 

 

 

 

 

 

 

 

 

8세

 

 

 

 

 

 

 

일직파

 

 

 

 

 

 

 

 

 

 

 

 

 

 

 

 

 

 

 

 

 

 

 

 

 

 

 

9세

희안

 

 

윤황

번곡파

희옹

주촌파

낙금헌계

희윤

정로위공파

 

희열이동파

희성

 

 

 

희맹정자동파

희정사곡파

윤남

형남구로동파

호남

귀천파

 

 

 

 

 

 

 

 

 

 

 

 

 

 

 

 

10세

정회주촌종파

정수연곡파

 

 

정백낙금헌

광후

 

 

봉춘

 

득춘모계파

아춘송곡파

 

 

 

 

 

 

 

 

 

 

 

 

 

 

 

 

 

 

 

 

 

 

 

11세

광세

 

 

 

 

 

경준

 

 

 

 

 

 

 

 

 

 

 

 

 

 

 

 

 

 

 

 

 

 

 

 

 

12세

증효

일숙

 

 

 

 

조성아호파

 

이장

 

 

 

 

 

 

 

 

 

 

 

 

 

 

 

 

 

 

 

 

 

 

 

 

 

 

 

 

13세

방익

만희

만신영산파

 

 

 

 

 

대곡파

 

 

 

 

 

 

 

 

 

 

 

 

 

 

 

 

 

 

 

 

 

 

 

 

 

 

 

 

 

 

 

 

 

 

 

 

17세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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