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진성이씨 사곡파 주손가

오토산 2016. 2. 22. 12:25

 

 

 
  진성이씨 사곡파 (동강서당(桐岡書堂)

 

진성이씨 사곡파 주손가

 

 

 
문중명(종택명) 진성이씨 사곡파 주손가
대표자(주손) 이재영  
주 소 : 경북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 165번지
종택
 및
주요건물
건물명 동강서당(桐岡書堂)
소재지 경북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 435번지
건립연도 년도 미상
기타사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5
문중 홈페이지  
주요인물 이희정李希程(1532∼1612)
자는 이보伊甫, 호는 동강桐岡이다. 벼슬은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역임하였다. 진성 사람 송안군松安君 휘諱 자수子脩의 후예며 3종조이신 종사 퇴계선생의 훈도를 받으므로 천부가 강직총명하고 효도와 우애가 출중하였고 문예가 일찍 진취하였다.
선조 7년(1574) 경에 현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서간西澗)에서 문소(의성) 동쪽 사곡 오동으로 이거 진성이씨 사곡파 파조派祖이시다.

이의태李宜泰(1701∼1779)
자는 대래大來, 호는 근인당近仁堂이다. 인의공引儀公 희정希程의 6세손이다. 공은 천성이 영담하고 마음가짐이 단아하여 만년에 성리학에 뜻을 두어서 언제나 간이겸허簡易謙虛하여 구차스레 남다른 면을 보이지 않았으나 옳다고 인정되는 것에는 자기 소신대로 끝까지 지켜나갔다.
영조 20년(1744)에 향교 훈도에 취임하여 선현들의 학규를 널리 채취하여 제생諸生을 가르치고 후기後記한 근과절목勤課節目을 새로 만들어 군내에 시행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의 행장行狀은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묘갈명墓碣銘은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묘지墓誌는 시남市南 신면주申冕周, 당기堂記는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가 기술하였고 근인당문집近仁堂文集이 전한다.

이필곤李苾坤(1846∼1907)
자는 형원馨遠, 호는 죽포竹浦이며 동강 휘諱 희정希程의 후예이다. 한말 丙申년에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나타나자 향리 각처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춘산, 사미, 옥산, 황산 등에서 일병과 교전하여 수많은 왜병을 무찔렀다. 왕명으로 의병해산령이 내려 부득이 자숙하고 시기만을 엿보고 있던 중 丁未년 7월 30일일본 수비대가 엄습하여 회유하였으나 태연한 자세로 호통을 치다가 결국 안동 수비대에 인치되어 끝내 굴복하지 않고 총살당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고 그가 살던 향리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문중소개 입향조 휘諱 희정希程의 자는 이보伊甫요, 호는 동강桐岡이고 벼슬은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역임하였다.

시조 휘諱 석碩의 8대손이며, 송안군 휘諱 자수子修의 7대손이고 퇴계선생의 3종손으로 도산의 농운정사에서 공부할 때 선생의 총애를 입으셨다. 선조 7년(서기 1574년) 경에 현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서간)에서 문소聞韶 동쪽 사곡 오동으로 이거, 만년에 동강서당을 세워 원근의 선비를 모아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따르도록 강하였다. 그후 오동에서 자손이 번성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니 간와澗窩 이발춘李發春(교수), 이두춘李逗春(무과 주부主簿), 이아춘李迓春(성재惺齋 통정通政 증좌승지贈左承旨), 이문준李文遵(호군護軍), 이만엽李萬葉(무신戊申 창의倡義), 이세번李世蕃(증통훈贈通訓 장락사정掌樂寺正), 이의태李宜泰(근인당近仁堂), 이발李潑(증이참贈吏參), 이증로李曾魯(동와桐窩), 이종극李宗極(누와陋窩), 이종원李宗源(증가선贈嘉善 동추同樞), 이종익李宗翼(동추同樞), 이후민李厚民(동추同樞), 이덕강李德綱(농포農圃), 李斗綱(오사梧史), 이우강李友綱(토은土隱), 이민곤李敏坤(귀암龜菴 호군護軍), 이필곤李苾坤(죽포竹浦 참봉參奉 병신의병장丙申義兵將 건국훈장), 이재락李在洛(효행孝行) 등은 모두 문중과 고장을 빛낸 선비들이다. 또한 후손들이 오동을 비롯 근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경향각지에 산거하여 그 수가 8백여호에 이르며, 후손 가운데 법조계, 학계, 사업계에서 명성을 떨치는 자손이 많다.

동강서당桐岡書堂
17세기 초 퇴계선생의 3종손이자 문인인 이희정李希程,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가 세운 서당이다. 동재同齋(사경思敬) 서재西齋(문변問辨)를 겸한 6간 겹집이 웅대한 규모로 창연한 고색을 지니고 있으며, 1994년 4월 1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5로 지정받았다. 조선 광해군 12년(1620)년 세운 것으로 전하는데 건물에 새긴 기록으로는 인조 27년(1649)년경에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많은 유학도를 배출하였고 개화기 이후에는 사설학원으로, 한일합병 이후에는 당시 보통학교 2년 과정을 교육하였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고 앞면은 대청마루를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