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의성군 오동.귀천.토현.송곡.병방의 유래

오토산 2016. 2. 22. 12:37

 

 

  <義城郡> 舍谷面 梧上洞:梧洞 梧桐 龜川. 土峴洞/安溪面 陽谷二洞:松谷/丹村面 竝方洞:葛方

 

<義城郡> 舍谷面 梧上洞:梧洞 梧桐 龜川. 土峴洞/安溪面 陽谷二洞:松谷/丹村面 竝方洞:葛方室/多仁面 松湖洞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오동 귀천. 토현리/안계면 양곡리:송곡/단촌면 병방리:갈방실/다인면 송호리 

글쓴이: 周村宗 二十四世 門裔孫 李載賢

□ 의성군(義城郡) 사곡면(舍谷面) 오상리(梧上里).토현리(土峴里) 

▷ 사곡면 연혁 
임진왜란 발발시 피난민에 의해 생성된 부락으로서,1914년 행정 구역개편으로 오상(梧上) 동이 되었으며 1988.5.1동이 리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 명칭유래 
오상(梧上)1리 : 16C말엽 퇴계 이황의 문인(門人)이자 삼종손(三從孫)으로 호(號)는 동강(桐岡)이며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지낸 이희정(李希程)이라는 선비가 임진왜란을 피해 오토산(五吐山) 기슭에 피신 하다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지명은 봉황이 오동나무에 앉은 형국이라 하여 오동(梧洞)이라(梧上) 불렀다. 

오상(梧上) 2리 : 약 400년전에 진성인 교수(敎授) 이호남(李好男)이 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앞에 덤이 거북이 등과 같은 데 그 옆에 내가 흐르니 귀천(龜川)이라 불렀다. 
일설은 마을 입구에 거북이등 같은 바위가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없는데 거북이등 안 마을이라 하여 귀내(龜內)라고도 한다. 

▷ 자연 부락 
오동(梧洞) 귀천(龜川) 

오사정(梧史亭) : 진성인 오사(梧史) 이두강(李斗綱) 헌종때의 통덕랑(通德郞) 생원이 지은 정자로서 많은 유학도를 배출 했으며 건축년대는 확실치 않으나 1958년 후손들이 중건했다. 

동강서당(桐岡書堂) : 17C초 퇴계 이황의 삼종손(三從孫)이자 문인인 이희정(李希程)이 세운 서당이다.그는 이곳에서 많은 후진을 길러냈으며 현재 오동(梧洞)은 진성이씨 문회(門會)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구천강당(龜川講) : 선조(宣祖)때의 사헌감(司憲監) 주부(主簿) 이경문(李慶門) 후진을 기르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후손들이 중건했다. 

거북등 : 마을 앞 등성이가 지형이 기어가는 거북이 형상이라 하여 거북등 이라고 불렀으며 옛날에는 움직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등뒤에는 가옥은 건립하지 않고 새마을 사업으로 회관을 짓고 난 뒤부터 주택이 들어섰다. 

□ 오상(梧上) 1리 
약 400년전 이 마을이 개척되어 사곡면(舍谷面) 오동(梧桐)이라 칭하여 왔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곡면(舍谷面)에 속하게 오상(梧上)동으로 개칭되었다. 

▷ 자연부락별 유래 
오동(梧桐) : 이 마을의 개척 유래는 알수 없으나 약 300년 전으로 학(鶴)이 날아가다가 마을의 지형이 오동나무같이 생겨서 마을 뒷산에 앉았다가 갔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명을 오동(梧桐)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함. 

▷ 마을 주요 유래 
학산(鶴山) : 마을 개척 당시 학이 날아가다가 앉았다는 유래가 있어 학산 이라고 호칭되었다 함. 

□ 오상(梧上) 2리 
▷ 마을 연혁 
약 400년전 진성이씨(眞城李氏) 선조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귀내(龜川)라 하였음.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사곡면(舍谷面)에 귀속되어 오상(梧上)동으로 개칭됨. 

▷ 자연 부락별 유래 
귀천(龜川)은 약 400년전 진성이씨 선대의 의하여 개척 되었고 마을 앞 덤이 거북등과 같이 생겨서 지명을 거북등(登)이라 부르고 그 앞에 냇물이 흐르고 있어 동명을 귀내(龜川)라 칭하였다고 함.또 일설은 거북등 안쪽으로 마을이 있다고 하여 귀내(龜內)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마을 주요 유래 
거북등 : 마을 앞점의 지형이 기어가는 거북이 형상이라 하여 거북등이라고 호칭되었고 옛날에는 움직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등위에는 가호를 건립하지 않았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회관을 세우고 부터는 주택도 몇 집 들어섰다. 

□ 토현리(土峴里) 

▷ 토현리 유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삼종손이자 그 문인인 이희정(李希程)이 마을 개척했다. 
1914년 행정 구역개편시 토현(土峴)동이 되었음. 
군조례 제1225호(1988.5.1)에 의거 동이 리로 되어 현재에 이른다. 

▷ 명칭 유래 
금성면 만천동과 접경한 고개에 흙이 많이 쌓여 있어 토현(土峴)이라 불렀다. 

▷ 자연 부락 
토현(土峴) 

토현지(土峴池) : 사곡면(舍谷面)에 제일 규모가 큰 저수지 낚시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임. 

오토제(五吐齊) : 오토산(五吐山)에 경순왕의 넷째아들 김석(金錫)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묘를 관리하는 사당이 있음.1988년 신축하여 후인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자연 부락별 유래 
토현(土峴)은 약400년전 이희정(李希程)이란 옛날 조문국(召文國)에서 흙 고개라는 재를 넘어 왔다고 하여 동명을 토현(土峴)이라 개칭하였음. 


□ 의성군(義城郡) 안계면(安溪面) 양곡리(陽谷里) 

▷ 안계면 연혁 
-의성군의 서부 중심지역에 위치하는데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초기(朝鮮初期)까지는 안정현(安定縣)의 땅이었는데 세종대왕 때 부터 비안(比安) 고을이 되었다. 

-안동(安東)면과 안서(安西)면 등 2개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일(韓日) 후 1914년에 현동면(縣東 面)의 운곡동(雲谷洞)을 합하여 안계면으로 개칭하고 용기(龍基) 교촌(校村) 안정(安定) 도덕(道德) 봉양(鳳陽) 위양(渭陽) 시안(枾安) 토매(土每) 양곡(陽谷)등 9개 동으로 확정하였다. 

▷ 양곡리 연혁 
약 200년전 고려 공민왕 때(1359) 강릉김씨 김사민(金俟民)이 태양(太陽)으로 칭함. 
조선광해 6년(1614년) 이불남(李佛男)이 개척하여 송곡(松谷)이라 칭함. 
조선 고종 때 비안군 안서면에 속하여 양곡이라 칭함.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곡1,2,3동으로 개칭. 
1988년 5월1일 의성군 조례 제1225호에 의하여 양곡1,2,3리로 개칭. 

▷ 명칭유래 
4개의 자연부락이 동서남북으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위치하여 태양동의 양자와 송곡의 곡자를 따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양곡이라 하였다. 

▷ 자연부락 
송곡(松谷) 

약 200년 전에 진성이씨(眞城李氏)가 정착하기 전에는 일선김씨(一善金氏)가 살았고 그 전 에는 배씨(裵氏)들이 살던 마을이라 한다. 
혹은 조선광해 6년 이불남(李佛男)이 정착하여 주위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청정하며 솔숲이 울창하고 웅장하여 송곡(松谷)이라 칭하였다 함. 

효우당(孝友堂) :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추원보본당(追遠報本堂)다. 의성 오동(梧桐)에서 부호군(副護軍) 이이태(李爾태)의 아들 이천찬이 영조 때에 이곳 송곡으로 옮겨와 세거(世居)한지 10대에 이른다. 효우당을 지은 것은 8.15이후이나 후송(後松) 이정대(李正大)는 포부와 덕업으로 후학을 길러내고 향당(鄕黨)의 규율을 지도하여 크게 사표(師表)가 되었다. 

□ 양곡(陽谷) 2리 

▷ 연혁 
1614년 조선 광해군 6년 이불남(李佛男)이 개척하여 송곡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곡 2동이라 칭함. 
1988년 5월1일 의성군 조례 제1225호에 의거 양곡 2리로 개칭. 

▷ 자연부락 유래 
1614년 조선 광해군 때 선비 이불남(李佛男)이 정착하여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수려하며 뒷산의 숲이 울창하고 깊어 송곡이라 칭하였다 함. 

▷ 마을 주요유래 
한솔 : 큰 노송이 한 포기 있어 이 곳을 지나는 행인객들이 쉬어가며 풍류하던 곳으로서 옛날에는 1년에 한번씩 큰 잔치가 있었다 함. 

▷ 특기사항 
미작(米作)이 주농이고 부농(副農)으로 잠업(蠶業)이 있고 특용작물(特用作物)로서 고추 깨 등을 약간 생산하고 있음. 


□ 의성군(義城郡) 단촌면(丹村面) 병방리(竝方里) 

▷ 단촌면 연혁 
붉은 돌이 많이 곳이라 단촌(丹村)이라 명명하여 왔으며 1914.4.15 행정구역 개편시 원 단촌면 5개동 구산면 4개동을 통합하여 단촌면(丹村面) 일원으로 현구역은 9개리 15개 부락으로 관할(管轄)함. 

□ 병방리 유래 
-1380년 파평윤씨(坡平尹氏)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당시 뒷산의 지형이 갈엽(葛葉)과 생겼다 하여 갈방실(葛方室)이라 칭하였음.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시 피난으로 진성이씨(眞城李氏)가 이곳에 정착 현재까지 대를 이루고 살고 있으며 구산면(龜山面) 병방동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단촌면(丹村面) 병방동으로 개편하였다가 조례1225호(1988. 5. )에 의거 병방리로 되었음. 

▷ 명칭유래 
안정(安定) : 1952년 전주이씨(全州李氏)가 피난으로 정착하였으며 편안하고 고요한 곳이라 하여 안정(安定)이라 칭함. 

성(城)재 :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란(倭亂)을 물리치기 위해 의성김씨 김치중(金致重) 장군이 성을 쌓아 왜군을 물리친 성으로 전하고 있음. 

방계정(芳溪亭) : 방계(芳溪) 이세필(李世弼) 유업을 추모하여 1937년 후손들이 세웠다. 
이세필(李世弼)은 진성인(眞城人)으로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에게 후학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앞장선 후덕한 선비였으며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제수된 바 있다. 

수초정(遂初亭) : 이승길(李承吉)의 유업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그는 전주인으로 생원시에 합격한 바 있다. 

▷ 자연 부락별 유래 
갈방실(葛方室)은 약 600년 전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뒷산의 지형이 갈엽(葛葉) 같이 생겼다 하여 갈방실(葛方室) 이라 칭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에 의해 진성이씨가 이곳에 피난을 와서 현재까지 마을을 이루고 있음. 

안정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피난으로 전주이씨가 정착 편안하고 고요하여 피난지로 좋은 곳이라 하여 안정이라 하였음. 

새못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못이라 칭함. 

▷ 유적 및 유물 
방계정(芳溪亭) : 1945년 이훈석에 의하여 건립된 진성이씨 정자임 본체3칸과 정문으로 되었으며 주위에는 토담으로 아담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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