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 소수서웜

오토산 2017. 5. 20. 22:30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500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5월20일 제9기 국학아카데미에서 영주의 소수서원, 금성단, 금선정, 금양정사,

육우당을 탐방하게 되어 있으며  첫번째 찾은곳이 소수서원이었다.

오늘은 박석홍(前 소수박물관장)이 현장강사로 동행을 한다고 한다.

 

紹修書院은 1541년(중종36) 풍기군수 周世鵬이 이곳출신 유학자 安珦을 배향

하기 위해 祠廟를 설립하고 1543년 유생교육을 겸비한 白雲洞書院을 설립하였고

1544년 安軸과 安輔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548년 풍기군수에 부임한 퇴계선생은

서원을 賜額과 국가지원을 요청하여 1550년 소수서원이라 사액되었고

명종은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 서적도 하사하였다.   

서원입구에 學者樹라는 적송군락을 들어서니 宿水寺止 幢竿支柱가 통일신라때

불교의식이 있을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던 사찰터 였음을 알려주고

중국의 白鹿洞書院을 본따  白雲洞書院을 지었음을 알수 있었고

백운동 자바위는 백운동은 퇴계선생의 글씨이고 敬자는 주세붕선생의

글씨로 1457(세조3) 단종복위거사 실패로 영주. 순흥 사람들은 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십여리를 흘러 멎은곳이

'피끝마을'이라 부르고  시신이 죽걔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선생이 敬자를 각자한후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전한댜고 한다.

 

翠寒臺는 퇴계선생이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松翠寒溪에서 비취취(翠)자를

찰한(寒)자를 취하여 지었다고 하고

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 회헌 안향선생을 모신곳으로

대부분의 서원들이 前學後廟로 배치되어 있으나 이곳은 강학공간은 동향,

배향공간인 사당은 남향으로 東學西廟로 배치하였으며 서원의 공간에

영정각을 모신것도 특이 하다고 하며 이곳의 影幀閣에는 회암 주자, 회헌 안향,

신재 주세붕, 한음 이덕형, 오리 이원익, 미수 허목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강당인 명륜당이 동향으로 배치되고 북쪽에 동서재인 直方齋日新齋

서원의 원장과 교수의 집무실로 직방은 경건함으로 내면의 마음을 곧게

유지하고 의리로 외면의 행상을 방정하게 한다는 것으로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직방으로 속(人格)과 겉(品行)이 익어야 참선비(先達)이고 겉만 익다가 말면

乾方이 들어 건달(乾達)이라 하였으며 1804년 원장이 중수한뒤 新房이라

부르던 방에 日자를 붙여 일신재라 한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學求齋는 유학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 學求聖賢에서 취한것으로

추정되고 세칸으로 중앙부분 마루를 두어 자연과 함께 하며 방높이도

스승의 집무실보다 낮게하고 위치도 스승의 공간보다 뒤로 물려서

지어졌다고 한다.

 

박석홍 강사님의 해박한 지식으로 서원의 각 곳을 다니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시어서 많은 지식을 얻을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서원안에 소나무는 겨울을 이기는 나무라서 심어졌으며 500년이 넘으면

껍질이 거북등 처럼 6각형으로 되므로 껍질로 수령을 확인할수 있으며

은행나무는 다른 유실수와 달리 해거리를 하지 않기때문에 해마다 인재를

배출하라는 의미로 향교나 서원에 심어졌다는 이야기도 들을수 있었다.

시간에 쫒기어 더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한것이 아쉬웠지만

우리는 소수서원의 탐방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금성단을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승자는 집중해서 일하고 패자는 허겁지겁 일을 하며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패자는 시간에 끌려다니며 살며

승자는 실수를 과감히 인정하고 패자는 실수를 남의 탓으로 돌리며

승자는 구름위의 태양을 보고 패자는 구름속의 태양을 본다

승자는 넘어지면서  앞을 보고 패자는 넘어지면서 뒤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