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봉화 바래미마을 팔오헌종택을 찾아서

오토산 2017. 6. 24. 11:05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594

 

봉화 팔오헌종택을 찾아서

 

 

남호구택 답사를 마치고 찾은곳은 입구에 '팔오헌종가'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팔오헌종택이었다.

 

바래미마을 의성김씨는 개암파 파조인 開巖 金宇宏(1524~1590)의 후손들로

신라 경순왕의 4남 金錫이 시조이고 중시조 9대 金龍庇의 3자 金英의 계열로

김영-金之銳-金修德(2남)-金用超(3남 조선개국공신)-金和-金宗師-金季孫(4남)

-金從革-金致精-金希參(1508~1560)-김우굉으로 이어지고  1670년경 숙종때

관찰사를 지낸 팔오헌 김성구선생이 용담이란 곳에 살면서 자손을 위해 世居할

땅을 물색하던중 당시 이름난 풍수 선거사라는 사람에 의해 이 곳에 자리잡고

정착한 이래 2백여년간 대과 38명, 진사 80여명을 배출한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八吾軒宗宅은 조선중기 문신 팔오헌 金聲久(1641~1707)선생의 종택으로

'ㅁ'자형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된 17세기 양반가의 건축양식을 볼수 있으며

종택 우측에 담장으로 구획된 사당이 자리하고 대문채와 사랑이 연결되어

있다.

 

八吾軒 金聲久(1641~1707)선생은 호는 팔오헌이며 개암의 현손이 되고

개암의 아들은 金得可, 김득가의 아들은 임진왜란때 모친을 등에 업고 피난하다

봉화 호평(범들이 : 해저의 물길너머 너른들))마을로 들어와 자리 잡은 金이고

김율의 2남은 金秋吉(우복 정경세 문인), 김추길의 2남이 팔오헌 김성구이며

 

1669년 式年文科 갑과로 급제 한후 수원부사, 여주목사를 지내고 1603년(숙종19)

강원도관찰사,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통정대부 품계에 올랐고 숙종조에 청백리로

녹선되었고 위민복리에 근본한 공의 사상과 철학은 진정한 목민관의 귀감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낙향후 향리에서 學麓書堂을 창설하여 후학양성에

평생을 바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팔오헌에서 축대앞으로 심어진 맥문동을 보면서 종손으로 부터 집안내력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한때에는 급제자들의 솟대가 많아 그늘이 져서 가을철에

나락을 말릴수 없었다이야기도 전하고 근대에는 독립유공자가 14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이여기를 들으며 바래미마을의 담사를 마쳤다.

 

세상사 한마디

八吾軒은 '내 밭을 일구어 먹고(耕吾田), 내 샘물 마시고(飮吾泉),

 내 산에 나물 뜯고(菜吾), 내 시내에서 고기를 낚고(釣吾川),

내 책을 펼쳐보며 공부를 하고(披吾篇), 내 거문고를 뜯으며 즐기고(撫吾絃),

내 그윽한 마음의 평정을 지키고(守吾玄), 내 수명을 다하리라(終吾年)' 는

의미로 안분자족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낸것이라 한다.

 

 

 

 

 

 

 

 

 

사랑방에 설치된 음향기기가 주인님의 음악성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