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실

구미의 지주중류비 (낙여)

오토산 2017. 9. 28. 14:50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이 비석은 조선 선조(宣祖) 20년(1587)에 양청천(楊晴川)의 글씨를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탁본하여 길재의 묘소가 있는 

구미의 오태동에 인동현감(仁同縣監) 류운룡(柳雲龍)이 1587년 ( 冶隱)야은 

길재(吉再, 1353∼1419)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 앞면에는 중국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인 '지주중류(砥柱中流)'란 4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뒤편에는 예조판서 류성룡(柳成龍)이 '지주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야은선생 지주비 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다.

'지주중류'라 함은 중국 황하 중류의 석산이 마치 돌기둥처럼 생겨서 혼탁한 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기둥모양의 돌. 숫돌 같아서 숫돌 지(砥) 기중 주(柱). 이 숫돌모양의 돌 기둥이

황하의 물살 속에서도 솟아 있는 것에서 절의(節義)를 잃지 않은 사람 또는 행동을

비유하게 되었다)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길재를 은유한 것이다. 원래의 비석은 홍수로 매몰되고

지금의 비석은 정조(正祖) 4년(1789)에 다시 세운 것이다.


(옛 사람들은 절의를 늘 생각하면서도 조선초기 궁왕에게 충성 하기 위한 로울

모델을 필요로 했었다.

그 모델이 길재 선생이었고 이 분을 기릴 수 있는 행동으로 이런 비석과 서원이 세워졌다. 

조선의 왕들은 절의를 지키는 사람이 자신의 신하가 되길 바랐던 모양이다. 

이런 비를 세워 기념하는데도 세세한 제약 따위는 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숫돌모양의 돌에서 냉철한 판단력을 얻을 수 있었고 

지주중류(砥柱中流)란 글자를 통해 국경과 시대를 뛰어 넘는 필력도 느낄 수 있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형인 겸암 류운룡이 인동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야은 선생의 유택을 찾아 보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부임 3년째에 류운룡은 야은의 무덤을 크게 정비한 후 낙동강을 굽어보는

아늑한 곳에 방위를 잡고 묘역에 오산서원(吳山書院)과 사당을 지었다.

.게다가 류운룡은 야은의 지주비를 세워 후세에 남기기로 작심하고

한강 정구(鄭逑) 선생으로부터 백이와 숙제 지주비의 묵본(墨本)을 얻어온 

류운룡은 '砥柱中流' 네글자를 탁본을 떠 비석에 새겼다.


당시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자리에 있던 그의 아우 류성룡에게 쓰게 한다.

류운룡은 아우 성룡에게 야은 선생을 황하의 지주산에 빗대 이렇게 일러준다.

."강 중에 황하가 가장 크나니 천하를 횡유하고 범람할 땐 곤륜산(崑崙山)을 휩쓸고

 여양(呂梁)을 박차고 이락(伊洛)을 삼키고 양송(梁宋)의 들판을 내치고 만물이 모두

휩쓸리나 오직 하나 우뚝섰다. 사석(沙石)으로 짓이겨도 홍파(洪波)로 부어도 만고에

하루같으니 충렬의 선비가 유속(流速)에 시립(侍立)하여 변치 않음을 볼 때

이와 같지 않은가. 또 시조(市朝)가 변천해 맑은물 구정물이 함께 흐르고 앞에는

작록(爵祿)의 유혹이 있고 뒤에는 도거(刀鉅)의 위협이 뒤따르나 꿋꿋이 도를

닦아 운림(雲林)에 고도(高稻)하는 선비가 지주(砥柱)에 견줄만 하지 않겠는가

 음기의 전문(全文)을 형 운룡이 일러주는 대로 끝을 맺은 성룡은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절하며 형에게 "극진합니다. 

저도 이를 벗어난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성룡은 명(銘)을 붙이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읊조렸다.

.

'오산이여 무엇이 있는고 / 터가 있음이여 집이 있도다 / 

낙동강 물이여 출렁출렁 / 그 흐름 무척도 길도다 / 

묵정 벌의 한 주먹 흙이여 / 바로 선생의 무덤이로다 /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이여 / 만년을 드리워 빛이 나도다 / 

충성은 과(課)하고 효도를 책(責)함이여 / 우리에게 은혜함이 한 없도다 / 

난효(蘭肴)를 올리고 계서(桂壻)를 부음이여 / 영흠이 이르신 듯 하도다 / 

고산을 우러르고 청류를 굽어 봄이여 / 선생을 그리며 잊지 못하도다'.

 

야은 길재 -선산 고아 봉한리 출생.본관 해평(海平). 자 재부(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 시호 충절(忠節)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1390년 계림부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조선이 건국된 뒤 정종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16세기 중반 이후

확립된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이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

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연결된다.

놀라운 사실은 위의 8대 연원 가운데 길재로부터 김굉필(金宏弼,한훤당)에 이르는

 무려 4대의 학자들이 모두 선산과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던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조선인재 반은 영남에 있고(朝鮮人才半在嶺南),영남인재 반은 선산에 있다(嶺南人才半在一善)라고 했다. 진정 선산에 심어 둔 야은의 혼을 지켜보는 것 세상 모든 사람이

부(富)와 귀(貴)를 노리고 있는 때에 홀로 의리를 내세웠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복(福)과 녹(祿)을 추구하고 있을 때에 홀로 도덕을 내세웠던 것이다. 선생은 모여드는

 제자들에게 두가지만 가슴속에 심어주려 하였다.

 

야은으로 부터 출발한 선산 지역의 학문은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붕-박영-노수함-

장현광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꽃 피웠다.

조선 성리학의 계통이 퇴계로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루지만 여헌(旅軒)의 학문은

퇴계로부터 다소 비켜 선 듯하다.

하지만 인동(仁同)이라는 그의 혈연적 배경에 더해 학문적, 정치적 위상을 확충시키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떨친 여헌(旅軒)의 학문이 선산을 지켜온 건 아닐까.

 

지주중류(砥柱中流

中(가운데 중) 流(흐를 류,유) 砥(숫돌 지) 柱(기둥 주) 

[意義] 황하 가운데의 지주산이라는 뜻으로, 역경(逆境)에 

        굴하지 않는 튼튼한 힘이나 인물(人物)을 비유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