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국학아카데미 연수생들이 원주 강원감영을 찾아서

오토산 2017. 10. 29. 18:51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0896

 

국학아카데미 연수생들이 원주 강원감영을 찾아서

 

 

.10.29. 국학아카데미 연수생들이 금년도 마지막 현지답사로 원지지역을 찾았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 안동을 출발하여 단양휴세소에서 휴식한후

첫번째로 강원감영에 도착하니 '애들아! 해질때까지 감영에서 놀자!!'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선화당에는 학생들이 문화탐방을 하고 있었고

 선화당앞 마당에는 '8'모양의 술래잡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江原監營은 1395년(태조4)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여 강원도하고 首府를

원주로 정하면서 1895년(고종32)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바뀔때까지 500년동안

유지하다가 1896년부터 원주진위대 본부로 사용, 1907년 진위대 해산후 부터

원주군청으로 사용하여 왔고 1995년부터 강원감영으로 복원중 있다고 하며

청백리 황희 정승이 1432년(세종 5) 관찰사로 선화당에 머물렀고

 1580년(선조13) 관찰사 정철은 임지를 둘러보고 <관동별곡>을 지었다 한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수차례 건설되어 宣化堂, 布政樓, 補繕庫, 中三門,

內三門, 內衙등 1795년(영조35) 與地圖書에 27동, 1830년 (순조30) 關東誌에 41동중

원주관아 건물인 본관, 별창, 사창, 추월대등을 제외하고 37동이었으며

1874년~1875년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당시 건물은 43동 495칸이었다고 하며

한국전쟁때 대부분이 무너져  선화당,포정루, 청운당만 남아 있었던 것을 

복원중에 있다고 한다.

 

布政樓는 중국 명나라의 지방관청인 布政司에서 연유한 명칭으로 강원감영의

출입문으로 강원감영과 原州牧의 관아를 함게 사용하였고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선화루와 함게 복원하여 1895년(고종32) 원주진위대 본부로 사용하면서 宣威樓

1950년 한국전쟁후 江原監營門樓 편액했던것을 1995년 포정루 하였다고 한다.

 

포정루를 지나니 중삼문 옆에 개운동등에 남아있던 관찰사와 목사의 선정비 14기

강원감영을 복원하면서 옮겨져 있었고

 

中三문은 선화당으로 출입하는 진입공간에 포정문, 중삼문, 내삼문이 있었으며

중삼문에는 關東關察使營門이라는 고유명칭이 달려 있었고

內三門은 관찰사를 만나기정 마지막 문으로 방문객 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한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에게 淸廉潔白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澄淸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宣化堂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한다 의미의 관찰사의 정청으로

1395년부터 1896년 춘천으로 옮길때 까지 사용하였고 한국전정때 잠시 도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원주군청으로 사용하여 오다가 1996년 보수공사로 원형을

찾았다고 한다, 

 

行閣(사료관)은 강원감영의 좌우에 배치된 보조건물중 왼편에 배치된 건물로

현재 사료관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며 內衙上梁記, 나막신, 쌍륙말, 기와들과

자기류 역대 관찰사 명단을 적은 병풍도 볼수 있었고

조선시대 과거시험(司馬試, 監試)합격자중 서울 14,338, 안동783, 충주 624,

원주 570, 개성 569, 평양 529명으로 기록된 현황 볼수 있었다.

 

우리는 감영을 돌아보며 감영을 찾아 역사를 익히는 어린이들도 볼수 있었고

포정루 지붕에 새들로 부터 보호하기위해 그물로 덮여진 모습을 볼수있었으며

해설사로 부터 선화당 현판은 최규하대통령이 썼으며 포정루 맞은편 아파트가

 배말아파트로 옛날 배가 도착하던 마지막 마을이라는 명칭이라는 설명과 

지학순주교가 머물던 원동성당이야기와 내년이면 중앙선 복선화로 원주역이

이전된다는 설명을 들으며 해설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역사박물관으로 갔다.

 

세상사 한마디

집안이 편하려면 소 다섯마리를 키우소!!

내가 졌소!! 당신이 옳소!! 당신 마음대로 하소!!

나를 용서 하소!! 제발 밥만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