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란 무엇인가?
동암 류장원 선생의 상변통고 중 제례 총론에서
무릇 제사는 사랑과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을 위주로 할 따름이다.
가난하면 집 안의 형편에 알맞게 하고, 병이 있으면 힘을 헤아려서 행한다.
재물과 힘이 미치는 자는 각자 의식대로 함이 마땅하다.
〈제통(祭統)〉: 제사란 못 다한 봉양을 행하고 못 다한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다.
소 : 봉양이란 살아계실 때 어버이를 봉양함이요,
효도란 살아계실 때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다.
어버이가 이미 돌아가셨지만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냄으로써
살아계실 때 못 다한 봉양을 행하고, 살아계실 때 못 다한 효도를 계속함이다.
응씨(應氏)가 말했다.
“다하지 못한 봉양을 뒤미처 행하고, 다하지 못한 효도를 계속함이다.”
○ 〈제의(祭義)〉: 제사는 자주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경건하지 않다.
제사는 성글게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성글면 게으르게 되고, 게으르면 잊게 된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君子)가 그것을 밟고서 반드시 서글픈〔悽愴〕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춥기 때문이 아니다.
봄에 비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그것을 밟고서 반드시 멈칫거리는〔怵惕〕
마음이 드는 것은 장차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주 : 처창(悽愴)과 출척(怵愓)은 모두 계절에 대한 느낌으로 어버이를 생각함이다.
‘서리와 이슬이 내렸다’는 말에 가을 ‘추(秋)’자가 없는 것은 아마 탈락되었음이다.
오직 성인(聖人)이라야 상제(上帝)를 제사 지낼〔饗〕 수 있고,
효자라야 어버이를 제사 지낼 수 있다.
제사 지낸다〔饗〕는 것은 향함〔鄕〕이다. 향한 뒤에 제사 지낼 수 있다.
주 : 제사 지내는 것은 흠향하게 함이다.
속마음이 향해야 그 제사를 흠향하게 할 수 있다.
소 : 이는 효자의 제사가 그 어버이를 흠향하게 하려는 뜻임을 밝힘이다.
상제의 흠향을 어버이의 흠향에 견준 것은 어버이를 흠향하게 함이 어려움을 말함이다.
신(神)이 흠향하게 되는 것은 효자의 귀향(歸鄕 마음을 모아서 향함)함으로 말미암는다.
귀향한 뒤에 신령으로 하여금 흠향하게 할 수 있다.
중니(仲尼)가 상(嘗) 제사를 지내면서 음식을 받들고 나가는데,
그 친히〔親〕 행하는 것이 정성스럽고, 그 걸음걸이는 바쁘게〔趨趨〕
주 : 촉(趨)은 촉(促)으로 읽는다.
자주 떼어놓았다.
주 : 상(嘗)은 가을 제사이다.
친(親)은 자신이 직접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정성스러움과 바쁜 걸음걸이는 위의(威儀)가 적음을 말함이요,
빨리함을 말함이다.
소 : 중니가 음식을 받들고 시(尸)에게 드릴 때에 그가 직접 일을 하면서
모습이 정성스럽고 질박하면서 위의가 적고,
그 걸음이 촉급하고 빨라 위의가 적고 발을 드는 것이 빈번하였다.
제사를 마치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의 말씀에 제사는 장엄〔濟濟〕하고 정숙〔漆漆〕하게 하라고 하셨는데,
지금 선생님이 제사 지내는 것을 보니 장엄하고 정숙함이 없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장엄함이란 용모를 차리느라 소원함이요,
정숙함이란 용모를 차리느라 스스로를 돌이켜봄이다.
용모를 차려 소원하게 하고 용모를 차려 스스로를 돌이켜본다면,
어찌 신명과 교접할〔及交〕 수 있겠느냐?
어찌 장엄하고 정숙함이 있어야 하겠느냐?
주 : 절절(漆漆)은 ‘붕우절절(朋友切切)’의 ‘절절’로 읽는다.
스스로 돌이켜봄〔自反〕이란 스스로 몸가짐을 바르게 함이다.
용모를 차리느라 소원함〔容以遠〕은 친한 이를 친하게 접대함이 아니요,
용모를 차리느라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것은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방법이 아님을 말한다.
급(及)은 여(與)의 뜻이다.
소 : 장엄함〔濟濟〕이 용모를 차리느라 소원함이라 함은,
용모를 차리느라 스스로 소원하게 함을 말한다.
정숙함〔漆漆〕은 용모를 차리느라 스스로를 돌이켜봄이라 함은
용모를 차리느라 스스로 반복하여 다듬어 단정히 함을 말한다.
용모를 차리느라 소원하게 함과 용모를 차리느라 스스로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위 문장을 다시 매듭지은 것으로, 효자가 용모를 차리느라 소원하게 하고
용모를 차리느라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것,
이것은 빈객의 일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 빈객의 용모를 한다면 어찌 신명과 사귈 수 있겠는가?
신명과 사귈 수 없음을 말함이다.
다듬어 단정히 함〔修整〕에는 반드시 스스로를 돌이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돌이켜봄은 스스로 다듬어 단정히 함’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무릇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는 데는 용모를 일삼지 않고 또 서로 가까이 붙어야 하는데,
이제 이미 용모를 일삼고 또 서로 소원하게 대하므로
‘친한 이를 친하게 대접하려 함이 아니다’고 했다.
반궤(反饋)로 이룸을 즐거워하고, 그 천조(薦俎)를 올리고, 그 예악을 차례로 하고,
그 백관(百官)을 갖추어 군자가 그 장엄함과 정숙함을 다한다면
어찌 황홀(慌惚)함이 있겠느냐?
주 : 반궤(反饋)는 익힌 음식을 드림이다.
천조(薦俎)는 두(豆)와 조(俎)다. 황홀(慌惚)은 사모하는 생각이 더욱 깊음이다.
소 : 이는 천자와 제후의 제사이니,
혈성(血腥)으로 시작하여 익힌 음식을 드리는 때에 이르러
궤식(饋食)의 두(豆)와 생체(牲體)의 조(俎)를 아울러 올린다.
궤식을 올리기 전에 신명과 교접하는 데 정성과 공경을 귀하게 여기고,
궤식을 올린 뒤에는 인사(人事)를 성대하게 한다.
그러므로 예악을 차례 있게 연주하고, 백관을 갖춘다.
이런 때에 군자로서 제사를 돕는 사람은 장엄하고 정숙하게 빈객의 일을 한다.
만약 효자가 스스로 장엄하고 정숙하게 하면 어찌 황홀한 마음이 있겠는가?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이 없음을 말함이다.
무릇 말이 어찌 한 단서뿐이겠느냐?
각각 합당한 곳이 있는 것이다.”
주 : ‘어찌 한 단서〔豈一端〕’는 하나의 잣대로 할 수 없음을 말함이다.
예는 각각 합당한 바가 있다.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빈객은 장엄하고 정숙하게 하며,
주인은 정성껏 바쁘게 한다.
○ 증자가 말했다.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으면 반드시 어진 사람의 곡식을 구해서
제사 지내는 바, 이를 예의 마침이라 한다.”
주 : 빈곤하더라도 나쁜 사람의 물건을 취하여
돌아가신 어버이를 섬겨서는 안 됨을 깨우침이다.
○ 《공양전(公羊傳)》: 봄 제사를 ‘사(祠)’라 하고,
여름 제사를 ‘약(礿)’이라 하고,
가을 제사를 ‘상(嘗)’이라 하고,
겨울 제사를 ‘증(烝)’이라 한다.
사(士)가 이 네 가지를 지내지 못하면
겨울에 갖옷〔裘〕을 입지 않고, 여름에 갈옷〔葛〕을 입지 않는다.
주 : 네 가지란 네 계절의 제사이다.
사(士)로서 공적인 일이 있어서 이 네 계절의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감히 그 의복을 아름답게 할 수가 없으니, 어버이를 생각함이 지극함이다.
○ 《통전》: 선왕이 예를 만듦에 네 계절로 제사 지내게 한 것은 계절이 옮겨 가고
절기가 바뀌면 효자는 감격하여 어버이를 생각하므로 맛있는 것을 받들어 올려
효경의 마음을 편다.
○ 정자가 말했다. “동물 중에 어미는 아는데 아비를 모르는 것은 달리는 짐승이고,
아비는 아는데 조상을 모르는 것은 날아다니는 새가 그렇다.
오직 사람이라면 조상을 안다.
만약 제사를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아마 새나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 관혼상제는 예의 큰 것인데, 지금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승냥이와 수달도 모두 근본에 보답할 줄을 안다.
지금 사대부 집 안에서는 이를 소홀히 함이 많아서 봉양은 두텁게 하면서,
선조에게는 박하게 하니 매우 불가하다.
내가 일찍이 육례(六禮)를 다듬었는데,
집에는 반드시 사당이 있으며, 사당에는 반드시 신주가 있다.
매달 초하루에 반드시 천신(薦新)하고,
시제(時祭)는 중월(仲月)에 지내고,
동지에는 시조(始祖)를 제사 지내고,
입춘에는 선조를 제사 지내고,
늦가을에는 녜(禰)를 제사 지내며,
기일(忌日)에는 신주를 옮겨 정침(正寢)에서 제사 지낸다.
진씨(陳氏)가 말했다.
“매달 초하루〔月朔〕는 한 달의 시작이다.
네 계절은 천도(天道)가 변하는 것이고,
동지(冬至)는 양(陽)이 생기는 시작이고,
입춘은 사물이 생기는 시작이며,
늦가을은 사물이 완성되는 시작이고,
기일은 어버이가 돌아가신 날이다.
군자는 이때가 되면 반드시 슬프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까닭에
추원(追遠)의 예를 행한다.”
○ 물었다. “제사는 성인이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에서 시작된 것인가?” 말했다.
“아니다. 선조에게 제사하는 것은 천성에 근본을 둔 것이다.
승냥이도 제사 행위를 하고, 수달도 제사 행위를 하며,
매도 제사 행위를 하니, 이는 모두 천성이다.
어찌 사람이면서 새보다 못하겠는가?
성인이 이로 인하여 예법을 만들어 사람을 가르쳤을 따름이다.”
○ 주자가 말했다.
“천지로 말하자면 다만 하나의 기운이지만,
한 몸으로 말하자면 나의 기운이 곧 조선의 기운이고,
또한 하나의 기운인지라, 느끼면 반드시 감응한다.”
○ 옛사람들은 성실하여 진실로 유(幽)와 명(明)을 하나로 보아
그 위아래와 좌우에 계신 듯이 여긴 것이지,
마음속으로 그렇지 않은 줄 알면서 짐짓 이런 말을 하여 가르친 것은 아니다.
○ 물었다. “조선(祖先)이 사인(士人)이 아닌데 자손이 그 가풍을 바꾸어
사인의 예로써 제사 지내려고 하면, 조선이 알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는가?” 말했다.
“공께서 알면 조선도 곧 알아챈다.”
○ 물었다. “조종(祖宗)은 천지 사이에 있는 한 계통의 기(氣)로서
자손의 제향으로 말미암아 모이고 흩어지는가?” 말했다.
“그것은 곧 상채(上蔡)가 말한바 ‘만약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는 말로, 모두 사람에게 말미암는다.
귀신은 본래 있는 사물이다.
조종 또한 이와 동일한 한 기운이지만,
다만 어떤 총괄되는 곳이 있다.
자손의 몸이 여기에 있으면 조종의 기운도 곧 여기에 있으니,
거기에는 어떤 혈맥이 관통한다.
그러므로 ‘신은 동류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고,
백성은 종족이 아니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했으니,
단지 기운이 서로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자가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제후가 산천에 제사 지내며,
대부가 오사(五祀)에 제사 지내는 것’은 비록 나의 조종(祖宗)이 아니지만
천자는 천지의 주관자이고,
제후는 산천의 주관자며,
대부는 오사의 주관자이니,
내가 주관하면 그 기운도 내 몸에 총괄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로 관계되는 곳이 있다.”
○ 물었다. “조고(祖考)의 정신은 곧 나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면 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내와 외친(外親)에게 이르러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말했다.
“다만 제사를 지내야 합당한 곳에는 그 정신과 혼백이 감통하지 않음이 없다.
대개 본디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흘러 나왔으니 처음부터 간격이 없다.
비록 천지와 산천의 귀신이라도 그렇다.”
○ 물었다. “조고의 정신이 이미 흩어졌으니 반드시 사흘을 재(齊)하고
이레를 계(戒)하여 양(陽)에서 구하고 음(陰)에서 구해야 그것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이는 것이 홀연 도달하였다가,
빌고 제사하는 것을 마치고 나서 정성과 공경이 이미 흩어지면
또 곧장 흩어지는가?”
“그렇다.”
○ 물었다. “제례는 고금의 일의 형편이 같지 않아서 행하는 데 걸림이 많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말했다. “행하기 어려운 일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정성과 공경을 위주로 하면 되고,
기타 의식은 집 안에 맞게 풍성하게 하든지 간략하게 하든지 한다.
국 한 그릇 밥 한 그릇이라도 모두 스스로 정성을 다하면 된다.”
○ 혼(魂)을 불러 백(魄)으로 돌아오게 하고,
중(重)을 세우고 신주를 설치하는 것은
잠시라도 정신이 항상 그 속에서 접속되게 하려는 것이다.
성인이 사람들에게 제사를 가르친 것은 그것을 모으게 하려 함이다.
[주]천신(薦新) : 새로 난 과실이나 음식물을 신에게 올리는 일이다.
凡祭,主於盡愛敬之誠而已。貧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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