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를 찾아서

선몽대에서 선현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본다(송하)

오토산 2017. 12. 20. 14:51

 

 

몽대에서 선현들의 발자취를 되새겨 본다李 翰 邦(백송파 22세)

 

경북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행소리)는 퇴계의 둘째 형님인

예천훈도醴泉訓導 이하(李河)公(1482-1544)이 처가 함양박씨 세거지인

 용문 금당실에 우거寓居하다가 둘째 아들인 찰방공 이굉(李宏 1515-1573)이

온혜 노송정종택에서 백송리로 입향하게 된다.

 

 난산(卵山)에는 입향조인 이굉과 이열도의 묘가 있고 사두혈이라고 한다.

 백송마을은 연소(燕巢;제비집) 형국(形局)이라고 한다.

白松里(백송리)는 건지산에 흰 소나무가 있어

 힌소리가 변하여 행소리 또는 백송(白松)이라고 한다.

 

 진성이씨 백송파 입향조인 찰방공은 퇴계 문인으로

퇴계선생으로 부터 편지 2통을 받았고,

1530년대에 금곡리로 부터 처가인 백금리(행소리)로 이거移居하였다.

 묘는 백송 난산卵山에 있고 구봉령공이 갈碣하고, 配는 안동김씨 部將인 遂良 따님이다. 9세 이열도(李閱道, 1538-1591)字 靜可 號 遇巖, 13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殯所골에서 侍墓하여 아직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從祖父 퇴계 門下에서 2편의 퇴계서찰을 받았다.

조상의 추증을 알리고, 학문을 열심히 할 것과 ‘항상 충(忠直),신(信義),겸(謙讓),

근(勤愼)으로 조신(操身)하라’고 가르쳤다.

 

퇴계가 손자대에서는(道자 항렬) 가장 훌륭한 인재로 촉망했다.

선몽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액과 제시를 써 주었다.(권오봉,1988, 예던길,160쪽) 퇴계가 손자들 중에 가장 촉망을 두터이 한사람이며,忠信 謙謹의 상조훈常操訓을 끼쳤다

 선몽대를 쌓아 퇴계의 시를 얻었다.(권오봉,1996, 이퇴계의 실행유학,185쪽)

우암공은 송재, 온계,퇴계, 학천공에 이어 다섯 번째로 1576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백송리 내성천변에 선몽대(仙夢臺)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1538~1591)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 대호 세 글자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퇴계선생이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후 지은 퇴계 친필 현판과 퇴계선생의 시에

금계 황준량,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 등의 차운(次韻) 친필시가 게액되어 있다.

 

 선몽대 현판(퇴계 친필,1563년) 퇴계 친필 시 松老高臺揷翠虛 白沙靑壁畵難如

 吾今夜夜凭仙夢 莫恨前時趁賞疎 (가정嘉靖 계해癸亥 도산陶山)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 그리기보다 어렵구나.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노라.

(藥圃,西涯,鶴峯,금계,漢陰,愚伏,淸陰,茶山의 次韻詩,1563년 건립/ 마을숲 163p)

엎드려 종조부 퇴계선생 시를 차운하다 선인의 끼친 법이 오래도록 빈데 돌아갔으나,

끼친 뜻이 아직 있으니 이어받는 뜻도 그러하도다.

 

두어칸 집과 기둥을 이제야 얻었으니 숨어 산 삶이 세정에만 소홀함이 아니었네.

작은 정자와 높은 시릉이 물 가운데 맑고 빈 것 같은데,

 먼 개와 긴 내를 바라보면 뜻이 넓어지는 것 같다.

외로운 곡새와 떨어지는 나오리는 일만 형태를 드리니

늦은 바람 나는 비 또 뜸뜸이 나리네.

산에 비기고 물에 다다르니 층층한 봉우리가 공중에 솟았는데,

 안개 끼인 문과 소나무 창문이 비단과 같도다.

 

오래 한가한 중을 짝하니 신선의 자리가 고요한 듯 가까이 오므로

특별히 세상 인연 먼 것을 깨닫겠네. (주인 이열도, 자 정가, 호遇巖우암, 퇴계선생 종손從孫) 退溪先生韻 약포 서애 학봉 次韻詩 정조4년(1780년)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다산 정약용이 형 약전과 함께 와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하였는데 예천 관아 서편에 있었다고 한다.

 뒷날 정약용은 젊은 시절 예천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예천을 공자와 맹자의 고향처럼 유학이 성행한 곳이란 의미에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였다.

 

정재원은 정약용과 함께 고평에 있는 정탁의 영정을 배알한 후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에 올라 조상인 정사우의 낡은 현편을 다시 새겨 걸어 놓고

 ‘선몽대기’를 남겼다.

조동윤, 《길 따라 사람 따라 예천기행》, 역사만들기, 2003, pp.128~129.

다산이 19살에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찾아 와 책방도령으로 공부하며

고평의 정탁 영정을 배알한 후 선몽대에 올라 기문을 작성하였다.

뒷날 다산은 예천을 추로지향이라 지칭하였다.

200년 전의 선조가 시를 써 놓은 곳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올라 기문을 쓰는 감회는

남달랐으리라! 문화역사 인물사적 측면에서 퇴계학맥을 한말까지 이어간

 수제자인 서애와 학봉,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큰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서애 수제자이며 임란의병장이었던 우복 정경세, 실학을 완성했던

 다산 정약용과 퇴계가 행장을 직접 써 준 금계 황준량, 좌의정 청음 김상헌

전국 어느 누각에도 뒤지지 않는다.

 

매헌 금보,백담 구봉령, 송암 권호문, 가규 조익, 매창 정사신, 이재 조우인,

금역당 배용길,운천 김용, 청풍자 정윤목, 학사 김응조, 병곡 권구, 청대 권상일,

제산 김성탁, 절강성 주대승, 상계종손 이동은 등 제현들의

 次韻詩가 ‘선몽대지 仙夢臺誌’로 전한다.

첨부파일 선몽대에서 선현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본다.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