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문화재이해반에서 소산마을을 다녀와서

오토산 2019. 6. 1. 10:45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http://blog.daum.net/uh512/12105



문화재이해반에서 소산마을을 다녀와서



5월의 마지막날 안동문화원 문화재이해반에서 풍산의 소산마을과

풍천의 부용대와 병산서원을 답사하는 현장학습을 떠나 소산마을에 도착하였다.


소산마을은 고려개국공신 삼태사(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구 안동김씨와

경순왕의 넷째아들 김은열(金殷說)을 시조로 하는 선 안동김씨,

본관을 같이 쓰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성씨의 집성촌으로

원래 금산촌(金山村)이었으나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음 김상헌 선생이 낙향하여

거주하면서 김씨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너무 화려하게 보인다고 하여

검소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소산(素山)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청룡의 끝자락에 위치한 삼구정(三龜亭)은 엎어놓은 가마솥 또는 거북의 등처럼

생긴 돌혈에 지어진 정자로 오가며 땀을 식히고 답답한 마음을 풀기 좋은 장소이며

삼구정에 올라 확트인 풍산들을 바라보며 김성규 교수로 부터 쪽마루, 툇마루,

루마루, 들마루에 대한 설명과 보의 숫자에 따른 건물의 구분,

우물천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마을안으로 들어 가는데

까맣게 익은 뽕나무 오디가 손길을 머물게 하였다.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병자호란때

척화론(斥和論)의 거두 김상헌이 중건하여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로

이름지어진 청원루(淸遠樓)와 동양고택을 지나서 양소당을 찾았다.


양소당(養素堂)은 안동김씨 종택으로 소산 입향조인 비안공 삼근의

손자 김영수(金永銖 호 양소당 1446~1502)가 지었다고 하며

김해일 종손은 조선 후기 금관자 서말이 나온 근본지로 풍수가들이 많이 찾으며

마을입구 공원을 조성하며 급제하여 귀향하면 환영행사를 하던 자리에

솟대거리를 복원하고 청음시비를 세우며 지역유림들의 화합의 기회가 되었다며

삼구정은 효의 근본이고 청원루는 충과 교육의 공간이라고 하였다.


삼소재(三素齋)는 1675년 지어진 선안동김씨 18대손 김용추(金用秋 1651~1711)의

종택으로 김용추의 5세손 김종락(金宗洛 1796~1875)의 호를 따서 삼소재라 부르며

삼소는 소산에 살며 깨끗한 행실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종손분으로 부터 집안의 내력과 건물의 구조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소박하게 지어진 종택을 돌아보고 마을을 내려왔다.


소산마을에서 상세한 설명을 하여주신 두분의 종손분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는 하회마을 부용대를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가진 재물을 최소화 해야 죽음이 편해진다는 멸재(滅財)

남에게 쌓인 원한을  풀어버려야 편해진다는 멸원(滅怨)

 물질. 정신적 부채를  청산해야 편해진다는 멸채(滅債)

정든사람과 물건에  정을 땔수록 편해진다는 멸정(滅情)

죽어서도 사는 제사문화의 바탕이 되는 멸망(滅亡) 등이

조선 선비들이 죽음을 위한 오멸론(五滅論)이라 하네요

비우며 정리해가는 선비정신이 느껴지내~~~











삼구정에서 바라본 풍산들~~






뽕나무 오디가 발길을 멈추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