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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선비아카데미(집례반)에서 진주성답사를
7월 29일 안동문화원 2019 선비아카데미(집례반) 회원 23명이 진주성답사를 하였다.
안내를 맡은 김필숙선생이 외로울까봐 이수민선생이 옵서버로 함께 하여 더욱 좋았고
한 노인네는 답사를 잊었다고 하고 한 노인네는 늦었다며 협찬만하고 돌아가셨다.
진주(晉州)는 부유하고 멋스러운 고장으로 알려져 왔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또는
거타(居陀)였다가 문무왕 때 신라에 복속되어 강주, 청주로 불리다가 고려 성종 때
진주라 불렀으며 조선 태조 때 진양대도호부로 지방행정중심도시로 역할하여 오다가
1995년 진주시를 가락지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던 진양군을 통합시켰다.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 거열성, 통일신라시대 만흥산성, 고려시대 촉석성,
조선시대이래로 진주성 또는 진양성(晉陽城)으로 불렸고 1377년 토성으로,
1379년 석성으로 쌓았으며 1593년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성을 무너뜨려
흔적을 지웠으나 1618년 촉석루, 북장대, 서장대, 동장대 등을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3대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돌이켜 볼수있는 김시만장군 동상,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촉석루, 의기사, 의암, 창열사등 유적이 산재해 있고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서장대(西將臺)는 진주성 서문 지휘장대로 '여지도서'에 회룡루(回龍樓)로 적었고
규모는 작지만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는데 허물어진 것을
1943년 독지가 서상필(徐相弼)씨가 정면 3칸, 측면 2칸 목조기와팔작지붕으로
중건하였고 원래 현판은 없어지고 현재 현판은 은초 정명수의 글씨이다.
안동을 출발하여 영산휴게소에 잠시 휴식하였다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의 진주성 공북문(拱北門)에 도착하니
강석중 진주강씨회장님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셨고
장일영해설사와 함께 진주성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현재 복원된 진주성을 내성만 복원되었고 외성은 현재 발굴복원중이고
진주시의 인구는 35만명,이며 경남에서 유일하게 의과대학이 있은 곳이라 소개하고
충무공으로 시호를 받으신 분은 12명이나 되며 임진왜란으로는 육지에서는
김시민 장군,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충무공 시호를 받았다고 하였으며
2000년 세워진 높이 7m의 김시민 장군 동상은 목천 출신, 안동김씨 김방경 장군의
12세손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3,800명의 병력으로 6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전투를 지휘하다 적의 총탄으로 순국한 장군을 기리고 있다.
1987년 세워진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위치는 일제시대 신사가 있었던 자리였으며
진주를 지키지 못하면 호남평야를 유지할수 없다고 무진주무호남이란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공조덕종의 원칙에 따라 선조는 선종이라하여 실록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후대에 선조로 변경하였다는 설명들을 들으며 촉석루와 의기사, 의암을 찾아갔다.
세상사 한마디
비가 오지 않은 곳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고 하고
눈물이 없는 눈엔 결코 무지개가 드지 않는 다고도 하며
무지개를 얻기 위해는 비를 맞고 견디는 혹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의 시련을 슬기롭게 견디어 내면 아름다운 무지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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