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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해반에서 춘양 한수정과 만산고택을 다녀와서
봉화 바래미마을을 떠나 춘양으로 오면서 닭실마을과 사고지가 있었던 각화사에
김기덕 감독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춘양에서 한수정을 찾았더니 문이 잠겨있었다.
봉화 한수정(奉化 寒水亭)은 1608년(선조41) 충재 권벌(忠齋 1478~1540)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손자 석천 권래(石泉 權來 1562~1617)가 세운정자로
원래 이 자리에는 충재선생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 있었으나 화재로 없어지자
정자로 세우고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라는 뜻으로 한수정이라 하였고
건물은 丁자형 홑처마팔작지붕과 맛배지붕으로 1991년 화재소실후복구하였으며
주변에 와룡연(臥龍淵)이라 불리는 연못과 초연대(超然臺)라는 넓은바위와
400여년된 회나무가 있었다.
우리는 한수정앞 정원에서 담장안의 한수정을 돌아보며 준비하여 간 간식을 먹고
만산고택을 찾았더니 강백기 종손이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만산고택은 (晩山古宅)은 1878년(고종15) 만산 姜鎔(1846~1934)선생이 지은
궁궐이나 관청자재로 사용하던 춘양에서 생산되는 소나무 금강송(춘양목)으로
지어졌고 만산의 선대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만산이
태어났을때 흥선대원군이 직접 호(晩山 대기만성의 큰 인물이 되라)를 지어 주어
당호를 삼고 있으며 편안한 집이란 뜻의 강벽원선생의 글씨 정와(靖窩) 현판과
독립운동동가 오세창선생이 맹자 존심양생(存心養生)인용하여 쓴 존양재(存養齋) 등
현판이 걸려 있는 본채와 본채옆애 우전각지붕으로 지어진 서실에는
영친왕이 8세에 쓴 한묵청연(韓墨淸緣 글을 통한 좋은 인연)이 걸려 있었다.
강백기 종손은 행랑채가 11칸으로 규모가 크고 행랑채에도 마루를 두어
아랫사람들이 쉴 수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배려를 하였다고 하며
만산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마을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그 곳에 올라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별당인 칠류헌(七柳軒)은 월화수목금토일의 천지를 순환하듯 국운의 조속한
회복을 바라는 뜻에서 일곱그루의 버드나무를 의미하며
현판은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글씨이며 해강 김규진의 백석산방(百石山防),
옥량 한일동이 논어를 인용한 사물재(四勿齋) 등 여러현판들이 붙어 있었고
사물재안에는 한말혼란기 중국의 직례총통을 지낸 원세개(袁世凱 위안스키
1859~1916)와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쓴 글씨도 있었다.
야생화와 이색도자기로 꾸며진 만산고택을 돌아보며 칠류헌에 올라서
칠류헌의 방과 마루 사이를 통하는 큰 나무로 되어 있다고 하시며
집안의 내력을 설명하신 종손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는 안동으로 출발하였다.
상세한 설명을 하여주시신 김성규선생님, 간식을 준비하신 회장님과 총무님,
운행을 하신 사장님, 함께하신 모든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사 한마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느낄수 없으며
사랑을 느낄수 없는 사람은 행복도 느낄수 없다고 한다
오늘도 주변과 소통하고 배려하는 즐거운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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