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三問(성삼문)
1) 人間的(인간적)인 너무나 人間的9인간적)인
丙子(병자),1456年)年 6月 8日 수레에 실려 刑場(형장)으로 끌려 갈 때 대여섯 살 밖에 안된 그의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그는 뒤돌아 보며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하고는 목에 매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 있으며, 아비 사랑하지 않는 딸이 어디 있을까마는, 아버지가 목에 칼을 쓰고 오랏줄에 묶여 음산한 죽음의 怪氣(괴기)가 감도는 수레에 실려가는 모습을 보고 氣絶(기절)해버린 어머니를 뒤로하고 대여섯 살 어린 딸이 엄습하는 무서운 恐怖(공포)를 이겨내고 世上(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하고 목 메여 울부짖으며 수레 뒤를 따라오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절로 가슴이 울렁거리게 된다.
그의 허벅지는 쇠꼬챙이로 뚫린지 오래고 팔도 이미 끊어진 狀態(상태)였건마는 두 팔이 오랏줄에 묶이고 시뻘건 쇳조각이 배꼽 위에서 지글 지글 타는 狀態(상태)에서 成三問(성삼문)이 世祖(세조)의 極惡(극악)을 다한 모진 親鞫(친국)을 받으면서 오히려
“다시 달구어 오라 나으리의 刑罰(형벌)이 참 毒(독)하구나” 하고 刑卒(형졸)들 까지도 질리게 만들고 있던 그 무서운 氣慨(기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딸아이의 哀切(애절)한 울부짖음을 바라만 봐야 하는
悽切(처절)한 狀況(상황)앞에서 아버지 成三問(성삼문)의 悔恨(회한)은 얼마나 컸을까? 못난 애비 때문에 逆敵(역적)으로 烙印(낙인) 찍혀 겪어야 할 그 딸의 앞날을 미리 그려보며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수레가 잠시 머물렀을 때 그의 종이 울면서 술을 올리니 몸을 숙여 받아 마시고 그의 忠節(충절)을 다음과 같이 詩(시)로 나타냈다.
食人之食衣人衣(식인지식의인의)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素志平生莫有違(소지평생막유위)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一死固知忠義在(일사고지충의재)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顯陵松栢夢依依(현릉송백몽의의) 현릉(문종의 능) 푸른 송백꿈 속에서도 못잊져라
刑場(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읊은 이 絶命詩(절명시)에서 다시 한番(번) 人間(인간) 成三問(성삼문)의 다른 眞面目(진면목)을 만나게 되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제 홀로 가야 할 저 저승길, 그 멀고도 먼 길의 외롭고 쓸쓸하고 길고도 陰散(음산)하며 고단한 걸음을 生覺(생각)하며 그는 오늘 밤 잠자리를 念慮(염려)하고 있다.외롭고 쓸쓸한 저승 길,어쩌면 가도가도 적막한 어두움의 路中(노중)에 너무나 人間的(인간적)인 모습으로 함께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아버지 成勝(성승)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마땅한 잠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느 荒凉(황량)하기 그지없는 들녁 같은 곳에서 저승의 하룻밤을 쉬어야 하는 것 이라고 짐작하고 있다.어쩌면 아버지의 잠자리를 염려하는 不孝子(불효자)의 안타까운 심경을 이렇게 에둘러 表現(표현)한 것이였으으려나…하여튼 그도 普通(보통)사람과 별 반
다를 것 없는 한 사람의 平凡(평범)한 人間(인간)의 貌習(모습)을 지
니고 있음을 이 絶命詩(절명시)에서 赤裸裸(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檄鼓催人命 (격고최인명) 북은 어서 목을 베라고 조급히 울리고
西風日欲斜 (서풍일욕사) 저녁해는 하늬바람 속에 기울어 가는데 黃泉無客店 (황천무객점)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으리니 今夜宿誰家 (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뉘 집에 들러 자고 간단 말인가
黃泉無客店(황천무객점 ) 저승길엔 나그네 머물 집도 없다는데 오늘도 우
리의 심금을 울리는 絶命詩(절명시) 한 句節(구절)을 떠 올리노라면 절로 550年前(전)의 어느 場面(장면)이 아련히 펼쳐진다.
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刑場(형장)으로 끌려가는 成三問(성삼문)의 쓸쓸한 그림자여…
2) 成三問(성삼문)의 生涯(생애)
太宗(태종) 18年 1418 - 世祖(세조) 2年 1456年)
字(자)는 槿甫(근보) 訥翁(눌옹) 號(호)는 梅竹軒(매죽헌)이며 本貫(본관)은 昌寧(창녕)父(부)는 都摠管(도총관)勝(승)이고, 아버지와 함께 端宗復位(단종복위)를 꾀하다 世祖(세조)의 親鞫(친국)을 받고 죽은 死六臣(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높은 의기여! 선비의 굽힘 없는 忠節(충절)이여!
當時(당시)世祖(세조)를 죽이고 端宗復位(단종복위)를 圖謀(도모)하였다가 失敗(실패)하여 犧牲(희생)當(당)한 四六臣(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義氣(의기)와 忠節(충절)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世上(세상)에서 끝까지 義理(의리)와 忠節(충절)을 지키고자 죽음을 不辭(불사)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朴彭年(박팽년),申叔舟(신숙주),崔恒(최항),李塏(이개)等(등)과 함께 世宗(세종)이 晩年(만년)에 宿患(숙환)으로 溫泉(온천)에 갈 때 恒常(항상)陪
從(배종)했던 成三問(성삼문)은 世宗(세종)20年 式年文科(식년문과)에 河緯地(하위지)와 함께 世宗(세종)29年 文科中試(문과중시)에 壯元(장원)함으로써 벼슬길에 나가 世宗大王(세종대왕)의 사랑을 받았다.
端宗(단종)3年 世祖(세조)가 端宗(단종)을 내쫓고 王位(왕위)에 오자
禮房承旨(예방승지)였던 그는 國璽(국새)를 안고 痛哭(통곡) 했다.
다음해 左副承旨(좌부승지)로서 아버지 勝(승) 朴彭年(박팽년)等(등)과 같이 端宗(단종)의 復位(복위)를 協議(협의) 4月明(명)나라 使臣(사신) 送別宴會席上(송별연회석상)에서 雲劒(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와 兪應孚(유응부)가 世祖(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韓明澮(한명회) 權擥(권람)鄭麟趾(정인지)等(등) 一派(일파)를 없애기로 했으나 當日(당일) 雲劒(운검)을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後日(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이에 같은 謀議(모의)에 加擔(가담)했던 金瓆(김질)이 成事(성사)가 안될 것을 憂慮(우려)하여 密告(밀고)함으로써 李塏(이개),河緯地(하위지),兪應孚(유응부)等(등)과 함께 逮捕(체포) 되어 親鞫(친국)을 받고 軍器監(군기감) 앞에서 車裂(거열)의 極刑(극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한창 나라를 爲(위)해 펄펄 날며 일 할 수 있을 아까운 서른 여덟 壯年(장년) 이었다.
世祖(세조)의 親鞫場(친국장)에 함께 있던 申叔舟(신숙주)를 向(향)하여 그의 榮達(영달)을 쫓아 變絶(변절)하는 態度(태도)를 보고 成三問(성삼문)이 호통을 치자 한가닥 良心(양심)은 남아 있었든지 안절부절 하는 貌習(모습)을 본 世祖(세조)가 그 자리를 벗어날 것을 許諾(허락)
한다.
“ 前日(전일)에 너와 더불어 集賢殿(집현전)에서 같이 當直(당직)을 설 때에 世宗大王(세종대왕)께서 元孫(원손)을 안으시고,뜰을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 ‘寡人(과인)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保護(보호)하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느냐? ”
이에 父(부)인 勝(승)도 主謀者(주모자)로 極刑(극형)을 받았고 三聘(삼빙),三顧(삼고),三省(삼성)의 세 同生(동생)과 孟澹(맹담),孟年(맹년),孟終(맹종))과 갓난아기 等(등) 네 아들도 모두 殺害(살해) 되었다.
이 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허니
蓬萊山(봉래산)第一峰(제일봉)에 落落長松(낙낙장송)되야이셔
白雪(백설)이 滿乾坤(만건곤)할졔 獨也靑靑(독야청청) 하리라
3) 傳(전)해지는 逸話(일화)들
(1) 三問(?), 그 좀 별 난 이름
三問(삼문)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의 일이다. 그의 조부가 易(역)에 밝았든지 태어날 아이의 時(시)를 미리 보았다. 때가 아직 이른지라 産苦(산고)를 앓고 있는 며느리에게 좀 참았다 낳으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産母(산모)는 머리를 디밀고 밖으로 나오려는 아이를 발뒤꿈치로 괴고 앉아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었다. 한참을 그렇게 버티다 힘이 겨운 며느리가 “이제 때가 되었나이까?”
하고 묻는다. 그러면 “아직 더 참아라”
하고 시아비가 이른다 그렇게 묻기를 세 번씩이나 하고 드디어 때를 맞추어 出産(출산)을 시켰다고 해서 아이의 이름을 三問(삼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2)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成三問(성삼문)의 키
프랑스의 哲學者(철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이라는 말을 했다.
"나로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 그 하찮은 것이 모든 땅덩어리를, 皇后(황후)들을, 모든 軍隊(군대)를, 온 世界(세계)를 흔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地球(지구)의 모든 表面(표면)은 變(변)했을 것이다."
集賢殿(집현전) 學士(학사)로 있던 三問(삼문)이 世宗(세종)의 命(명)을 받아 訓民正音(훈민정음)을 만들면서 明(명)의 音韻學者(음운학자)黃瓚(황찬)의 諮問(자문)을 求(구)하러 遼東(요동)땅을 맨 처음 밟을 때의 일이다. 三問(삼문)은 五尺短軀(오척단구)여서 그것이 마음에 걸렸든지 버선 밑에 솜을 괴어 한 치쯤 높여 신고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東邱(동구)앞 亭子(정자)나무 밑에 이르렀는데 그늘 아래서 쉬고 있던 한 老翁(노옹)이 三問(삼문)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괴이히 여긴 三問(삼문)이 그 까닭을 물은즉"그대의 相(상)을 보니 참
아깝기도 하다.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天下文章(천하문장)이 되었을 터인데”하더라는 것이다.
(3) 成三問(성삼문)의 筆力(필력)
한番(번)은 使臣(사신)으로 燕京(연경)엘 간 적이 있는데,마침 宮中(궁)의 한 樓閣(누각)을 重修(중수)하고 나서 天頂(천정)의 上樑(상량)에 새로 上樑文(상량문)을 쓰고자 하는 참이었다. 임금이 使臣(사신)인 成三問(성삼문)을 불러 그에게 上樑文(상량문)을 써 주도록 請(청)했다. 키가 작은 三問(삼문)이 몇 個(개)의 卓子(탁자)를 괴어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큰 붓을 들어 上樑(상량)에 글씨를 심어 가는데 그 雄魂(웅혼)한 筆體(필체)에 感歎(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밑에서 卓子(탁자)를 붙들고 있던 한 臣下(신하)가 妬忌(투기)가 일어 그만 失手(실수)한 척하며 괸 卓子(탁자)를 무너뜨리고 만다. 헌데 三問(삼문)은 땅 바닥에 떨어지질 않고 붓이 上樑(상량)에 달라
붙어 그 붓대를 붙든 채 空中(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4) 監刑官(감형관)에게 남긴 遺言(유언)
“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輔佐(보좌)하여 太平盛大(태평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땅 밑에서 뵈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