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02- (119)
*<억>하고 죽은 이유, 油盡燈盞 無風自滅
"훈장이라는 자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아무 죄도 없는 내 형님을 잡아 먹으려고 그러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
선생 !
그 놈이 글재주로 내 형님을 옭아매려고 하는데, 무슨 대응책이 없겠소이까 ?"
김삿갓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쎄올시다.
훈장이라는 사람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죄를 뒤집어쓸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 "
"물론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도 무슨 수를 쓰든지, 죄가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해야 하겠는데,
도무지 신통한 방도가 없습니다.
억울한 내 형님이 살아날 수 있도록 선생께서 좋은 방도를 꼭 좀 강구해 주소서.
그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소이다."
김삿갓은 훈장이 썼다는 문제의 고소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고소장은 생사람을 잡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훈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양 노인과 아무리 원수간이기로 생사람을 이렇게 까지 모함할 수 있을까 ?")
김삿갓은 낯도 코도 모르는 훈장이 은근히 괘씸하게 여겨져 주인에게 이렇게 말을했다.
"이 고소장을 읽어 보면 형님이 틀림없이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어 있군요.
그러니 이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진정서를
사또 앞으로 빨리 제출하도록 하시오.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형님이 무슨 곤욕을 치르게 될지 모르는 일이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지며,
"매우 어려운 부탁이지만,
그 진정서를 선생께서 좀 써주실 수는 없겠소이까 ? " 하고 말했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중대한 일이니까, 진정서를 내가 써드리지요."
그리고 사또에게 올리는 진정서를 다음과 같이 쓰기 시작하였다.
우선 < 나이 든 노인은 지나치게 흥분하는 경우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지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실이다>는 내용을 누누히 강조해 놓고 나서,
끝으로 훈장의 고소장 내용과 같은 방식으로 아래와 같은
절묘한 글을 한 구절 적어 넣었다.
<油盡燈盞 無風自滅 >(유진등잔 무풍자멸)
기름이 마른 등잔불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절로 꺼지고
<晩秋黃栗 不霜自圻 >(만추황율 불상자기)
늦가을의 밤송이는 서리가 오지 않아도 절로 터지는 법이다.
훈장이 고소장에서
<썩은 새끼로 소를 매놓았어도 끌어당기지 않으면 새끼가 끊어지지 않는다>하였기에 ,
김삿갓은 <등잔불은 기름이 마르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불이 절로 꺼지는 법이다>라고
훈장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김삿갓 같은, 시문(詩文)에 능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얼른 생각해 낼 수 없는 절묘한 반론이었다.
주인은 그 진정서를 읽어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선생께서 이렇듯 절묘한 진정서를 써 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내 형님 집이 여기서 이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날이 밝거든 선생을 형님 댁에 모셔다 놓고,
나는 그 길로 읍내로 달려가 사또 앞으로 진정서를 제출하고 오겠습니다.
선생은 아무 데도 가시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꼭 좀 기다려 주시옵소서."
이리하여 김삿갓은 다음날 아침, 객줏집 주인장과 함께 양 노인 집에 가게되었다.
양 노인의 집은 백 석지기 농사를 하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살인죄로 옥에 갇혀 있는 관계로,
집안은 상갓집처럼 썰렁하기 이를데 없었다.
김삿갓은 가족들을 이렇게 위로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만사는 사필귀정이라,
주인 양반은 머지않아 무죄 방면으로 집으로 돌아오시게 될 것입니다."
사또가 만약 바보가 아니라면,
양 노인은 틀림없이 무죄 석방이 되리라고 김삿갓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들어맞아서,
양 노인은 진정서를 제출한 지 사흘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양 노인은 동생으로부터 자세한 애기를 들었는지라,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을 흘리며,
"죽은 목숨과 다름없던 저를 선생이 살려 주셨으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
하고 생명의 은인처럼 고맙게 여기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그날로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 노인은 한사코 붙잡고 늘어지며
<길을 떠나시더라도 겨울을 지내고 봄이나 되거든 떠나라>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이 기어코 길을 떠나려고 하자,
양 노인 형제는 어쩔 수가 없었던지 돈 꾸러미 하나를 내밀어 주며,
"기어이 떠나시려거든 ,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노자로 써 주옵소서."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일언지하에 사양하였다.
"나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진정서를 써드렸을 뿐이지,
사례를 받기 위해 진정서를 쓴 것은 아닙니다.
이 돈은 한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며칠 동안 잘 얻어 먹은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무슨 사례금입니까 ? "
그러나 양 노인 형제는 펄쩍 뛰면서,
"틀림 없이 죽게 된 사람을 살려 주셨는데,
저희가 어찌 은혜를 모른 척하겠습니까.
저희들의 성의로 아시고, 꼭 받아 주옵소서."
하며 한사코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 꾸러미에는 돈이 얼마나 들어 있습니까 ? " 김삿갓이 물으니,
"저희 집 형편이 좋지 못해 겨우 오백 냥만 마련했사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에엣? 오백 냥씩이나 ? "
김삿갓은 펄쩍 뛸듯이 놀랐다.
백석 지기 타작을 한다고 들었지만, 산골에서 오백 냥이라면
엄청난 거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돈 꾸러미를 손수 끌러 오백 냥중에서 오십 냥만 꺼내고,
나머지 사백오십 냥은 양 노인에게 돌려 주면서 말했다.
"노인장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오십 냥만 받아 가지고 떠나겠습니다."
그랬더니 양 노인은 받지 않으려 하면서,
김삿갓에게 돈 꾸러미를 억지로 안겨 주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돈 꾸러미를 길바닥에 내려 놓으며 도망치듯 달아나며,
"남을 도와 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다시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는 말을 하고, 바쁜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계속 120회로~~~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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