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만호재 훈장을 만난 김삿갓

오토산 2020. 3. 16. 07:53

■방랑시인 김삿갓 02-(121)

*만호재(萬戶齊) 훈장 .


김삿갓은 나룻배를 타고 독로강을 건너며, 얼마전 강계에 오기 전에 ,

선천으로 향하던 어느 장거리에서 만난 점쟁이가

 <강계에 가면 반드시 귀인을 만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 이라고

 일러 주던 말이 문득 생각나,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강계에서 미인을 만나면 결코 해롭지 않으리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읍내로 들어 온 김삿갓이 어두운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응 ..... ?

이 부근에 서당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밤은 서당에서 신세를 지기로 할까 ? )

김삿갓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 서당을 찾았다.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들린 초가집 처마에는

<만호재(萬戶齋)>라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어서, 서당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서당이름을 <만호재>라고 한 것은,

고려 공민왕 시절에 강계를 일시적으로 <만호부(萬戶府)>라고

불러 왔기 때문일 것이다.

 

김삿갓은 서당으로 찾아 들어와 훈장을 만났다.

훈장의 나이는 오십 가량 되었을까, 이름은 변대성(邊大城)이라고 하였다.

그는 허우대가 큼직한데다가 뿔이 삐죽삐죽 나온 유관(儒冠)을 쓰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사뭇 위엄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얼굴이 불그스레한 것은 낮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탓이 아닌가 보였다.

김삿갓은 아이들이 글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한쪽 옆에 꿔다 논 보릿자루 모양으로 쭈그리고 앉아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중에 <논어>를 읽던 아이가 훈장 앞으로 책을 들고 와,

"선생님 ! 이 대목은 어떻게 읽습니까 ? " 하고 묻는 것이었다.

김삿갓도 호기심이 동하여 아이가 들고 간 글을 옆에서 건너다 보니,

그 글은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人者樂山)> 이라는 글이었다.


우리말로는 <지자는 요수요, 인자는 요산>이라고 읽어야 하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훈장은 <에헴 ! >하고 헛기침으로 위엄을 떨어 보이며 아이에게 말을 하였다.

"너는 그런 것도 못 읽어서 어떡하느냐 !

그것은 <지자는 낙수요, 인자는 낙산>이라고 읽느니라 ! "

하고 일러 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훈장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樂山樂水>는 <요산요수>로 읽어야 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는데,

훈장은 태연자약 하게도 글짜 그대로 <낙산낙수>로 가르쳐 주고 있었다.

<樂>자는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서 음이 세 가지로 나눠진다.

음악에 관한 말로 쓸 때에는 <악>으로 읽어야 하고, <악기(樂器), 악보(樂譜)>,

 산과 물을 좋아 한다는 뜻으로 쓸 때에는 <요산 요수(樂山 樂水)>로 읽어야 하며,

즐겁다는 뜻에서는 <낙향(樂鄕), 과 낙천가(樂天家)>로 읽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훈장이라는 자는 그런 구별을 할 줄 몰라,

요산요수로 읽어야 하는 <樂山樂水>를 그대로 <낙산낙수>로 가르쳐 주고 있으니,

김삿갓으로선 웃음이 나올밖에 없었다.

시골에는 이런 엉터리 같은 훈장들이 흔히 있지만,

설마 강계 고을에 이런 엉터리 훈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김삿갓은 처음 부터 훈장이 아이들에게 글을

 잘못 가르쳐 주거나 말거나 아무 말도 안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이들에게 잘못 된 글을 가르킨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훈장에게 넌즈시 귀띰을 해 주었다.


"그것은 <낙산낙수>로 읽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요산요수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 "

그러자 훈장은 대뜸 얼굴에 노기를 띄우며 쏘아 붙인다.


"자네가 무얼 안다고 아이들 가르치는데,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가 ? "

대단한 나이 차가 나는 것도 아닌데, 훈장은 김삿갓에게 <해라>를 한다.

아마도 아이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더이상 대꾸없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훈장은 화가 풀리지 않았던지,

잠시 묵묵히 앉아있더니 문득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자네 고향이 어디인가 ?" 하고 물어본다.

"제 고향은 한양올시다."

고향이 <한양>이라고 대답하면 훈장의 도도함이 좀 꺾일 줄 알고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훈장은 그 대답을 듣고 나더니,

오히려 경멸하는 빛을 띄며 이렇게 쏘아 붙이는 것이 아닌가.


"어쩐지 그런 것 같아 보이더니만...

한양에 사는 인물들은 으례, <天> 자를 <하늘 천> 하고 읽으렸다 ?

그게 어째서 <하늘 턴>이 아니고 <하늘 천>이란 말인가 ?

<樂山樂水>도 마찬가질세,

그것을 <요산요수>로 읽는다는 것은 자네가 한참 잘 못 아는 것이네."

모르면 잠자코 있는 편이 좋으련만, 훈장은 얼토당토치 않은 주장을 내세운다.

마침 그때 <대학>을 읽고 있던 아이가 펼친 책을 들고 훈장에게 묻는다.


"선생님 !

< 대학지도(大學之道)>란 무슨 말을 뜻하옵니까 ? " 하고 물었다.

그러자 훈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아무런 소리가 없더니,


"이놈아 ! 너는 어째 내가 술에 취해 정신이 아물거릴 때에만 그런 걸 물어 보느냐.

내가 잠시 밖에 나가 바람을 쐰 다음 술이 깬다음 알려 줄 터이니 그리 알거라."

하며,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렇게 훈장이 밖으로 나가 버리 자,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시시덕 거리면서,

"우리 훈장님은 막히는 애기를 들을 때마다, 꼭 밖으로 나가시더라."

그러자 한 아이가 말을 했다.


"우리 훈장님은 모르는 질문을 받게 되면 안에 들어가,

마누라에게 물어서 알려주려고 그러시는 것이야 ! "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훈장인 남편이 모르는 글을 마누라가 알고 있다면,

그 마누라는 보통내기가 아니겠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저희끼리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훈장님 사모님은 옛날에 기생 노릇을 하던 분이라서,

글이 여간 유식하지 않아요."


"그런 유식한 여자가 어째서 돈도 없어 보이는 훈장하고 결혼을 했다더냐 ? "

"사모님이 어째서 우리 훈장님과 결혼했는지,

우리들은 그것까지는 몰라요."

마침 그때 밖에 나갔던 훈장이 다시 들어오더니,

아까 질문했던 아이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大學之道 --가 무슨 뜻이냐고, 네가 물었으렸다 ?

대학(大學)이란 책의 이름이고 지도(之道)라는 것은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니라."

그러자 아이가 또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재명명덕(在明明德)>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옵니까 ? "

그러자 훈장은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 오는지,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으며,


"이놈아 !

내가 또다시 정신이 아물아물해 오는 것을 보니,

술이 다시 취해 오는 모양이로다.

그 질문은 내일 아침에 대답해 줄 테니,

지금은 뜻을 모르는 대로 그냥 읽기만 하거라."

하더니 숫제 밖으로 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훈장이 없어지자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김삿갓에게 수작을 걸어 온다.

"아저씨는 우리 훈장님보다도 글을 더 많이 알고 있는 모양이죠 ?"

"예끼, 이 녀석들아 !

나는 훈장도 아닌데, 너희 선생님보다 글을 어떻게 더 많이 알겠느냐 ?"


"그래도 조금 전에 우리 훈장님께 글을 잘못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너희 훈장님이 잘못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알고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이로다."


"그래요 ?

그러면 아저씨는 우리들과 글자풀이 수수께끼나 한번 해보실래요 ?"

아이들은 훈장이 없는 해방감을 느끼는지,

김삿갓에게 엉뚱한 수작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계속 122회로 ~~~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