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90
장량이 말하는 천하의 주인이 되는 조건.
그무렵,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간 초패왕 항우는 자신을 <황제 폐하>로 자칭하면서,
날마다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만고의 강국인 진나라조차 거꾸러뜨리지 않았던가?
이런 나에게 이제 어느 놈이 감히 덤벼 올 것인가 ?"
이같은 자존 자대(自尊自大)의 망념(妄念)에 빠져 버린 항우였으니,
이때부터 그가 걸어갈 길은 오직 술과 계집 뿐이었다.
그리하여 초나라 대궐에서는 낮이나 밤이나
주연(酒宴)과 가무(歌舞)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군사 범증은 그 점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차례 간언을 올렸지만 초패왕 항우는 그때마다 코웃음을 치면서,
"때가 태평 성대인데, 어찌 연락을 즐기지 않을 수 있으리오.
아부(亞父)는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날마다 나처럼 연락이나 즐기도록 하소서."
하고 오히려 향락을 권장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던 어느 날, 시종이 황급히 달려 들어오더니,
"황제 폐하 !
한왕 유방이 포증(褒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사옵니다."
하고 아뢰는 것이 아닌가.
항우는 때마침 계집들과 더불어 주연을 즐기고 있던 중이라,
그와 같은 보고를 귓등으로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작작 하거라.
파촉에서 나오는 잔도(棧道)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는데,
제까짓 유방이 무슨 재주로 군사를 일으켜 온다는 말이냐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삼진왕들로부터,
"한왕 유방이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을 해 오고 있으니,
폐하께서는 지원군을 급히 보내 주시옵소서."하는
요청이 연달아 날아오지 않는가.
그리하여 지원군을 보내 주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비마가 달려오더니,
"삼진성은 말할 것도 없고 함양성 조차 , 한신에게 모두 점령당했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계속 동진(東進)해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옵니다." 하고
알려 왔다.
초패왕 항우는 그 보고를 받자, 크게 놀라며 분노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와드득 갈며 큰소리를 질렀다.
"한신이라는 고부가 무슨 재주로 삼진과 함양을 모두 점령했단 말이냐 ?
도대체 장한은 뭐하고 있었으며, 동예, 사마흔는 뭣들하는 작자였단 말인가 ?
내 당장 달려가 유방을 생포하고, 한신이라는 놈의 목을 베어 나의 울분을 풀리라.
여봐라 ! 곧 출전할 것이니, 모두들 출동 준비를 서두르라 하여라 ! "
항우가 급작스럽게 출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범증이 부리나케 달려와 아뢴다.
"황제 폐하 ! 한신은 결코 얕잡아 볼 인물이 아니옵니다.
그러기에 신이 일찍이 <한신을 대담하게 발탁하시어 크게 쓰시거나,
그렇지 않으시려거든 죽여 없애자>고 진언(進言)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늘날까지 한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셨다가
결국은 이처럼 커다란 우환을 당하시게 되는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아부는 한신따위에게 왜 이처럼 겁을 내시오.
삼진왕들이 한신에게 성을 빼앗긴 것은, 한신의 지략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삼진왕들 자신들이 무능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러기에 이번에는 내가 직접 출전하여 유방과 한신을
모두 다 곤죽을 만들어 놓을 테니, 아부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항우가 이같은 호언 장담을 하고, 일선으로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한(韓)나라의 장량 선생으로부터 사람이 편지를 가지고 왔사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뭐야 ?
장량이 편지를 보내왔다구 ?
그 편지를 이리 가져오너라."
항우가 장량의 편지를 즉석에서 뜯어 보니,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한(韓)나라 우생(愚生) 장량은, 삼가 초황제 폐하께 글월을 올리옵니다.
우생은 지난날 폐하의 은덕으로 고국에 무사히 돌아와,
국왕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할 일 없이 명산대천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이 또한 황제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택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근자에 한(漢)왕이 우생과 더불어 천하를 도모해 보자고
우생을 부른 일이 있었사오나, 우생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제(齊)나라가 천하를 도모해 볼 생각에서
제왕이 우생에게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물론 우생은 그 부름에도 응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를 위해 우생이 생각해 보옵건대,
한왕 유방은 워낙 야망이 작은 사람이기에,
그는 함양을 수중에 넣는 것으로 만족해 하겠지만,
제왕(齊王)은 워낙 야망이 큰 관계로 반드시 초나라까지 넘겨다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이같은 우환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지금 당장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를 완전히 제압해 버리시는 것이 상책일 것 같사옵니다.
제왕은 원대한 야망을 소신대로 펴나가기 위해 육국 원수들에게
격문(檄文)을 돌린 일이 있사옵는데,
천만 다행으로 그 격문의 사본이 우생에게 입수되었기에 참고삼아 동봉하오니,
폐하께서는 일독하시고 초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과감한 조치를 취하시도록
하시옵소서. 폐하의 무운 장구(武運長久)를 빌며 이만 줄이옵니다.
한국(韓國) 유객 장량 상서.
장량이 항우에게 이와 같은 편지를 보낸 목적은,
항우로 하여금 한나라를 치려던 칼 끝을
제나라로 향하게 하려는데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장량이 편지속에 <한왕은 야망이 작은 사람>이라고 쓴 것은
평소에 항우가 유방을 평가하는 데 촛점을 맞춰 그의 생각을 부추킨 것이었고,
<제왕은 원대한 야망가이기 때문에 반드시 초나라를 치게 되리라>
말하여 줌으로써, 항우의 경계심을 그쪽으로 돌려놓으려는 모략이었다.
그러나 강포(强暴)하기만 할 뿐으로 성격이 단순하고 지혜가 부족한
항우는 장량의 편지를 읽어 보고, 장량의 충성심을
오히려 고맙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장량이 아니면 누가 나에게 이처럼 중대한 정보를 말해 줄 것인가 ?)
항우는 장량의 충성을 고맙게 여기며,
이번에는 그가 보내 온 <제왕(齊王)의 격문>을 읽어 보았다.
제왕이 각국 원수들에게 보냈다는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왕 전영(田榮)은,
양왕(梁王) 진승을 비롯하여 육국 제왕(六國諸王) 휘하에 글월을 드리오.
옛날부터 이르기를 <사람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려면 무엇보다도
덕(德)이 있어야 한다>하였소.
그런데 자칭 <황제 폐하>라고 일러 오는 항적(항우의 본명)이라는 자는,
일찍이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어기고 유방에게서 <관중왕>의 자리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의제까지 시해하였소.
이는 천도(天道)에 반하는 행위이니, 어찌 천벌이 없을 수 있으리오.
이에 본인은 항우를 징벌하여 천도를 바로잡고자 하는 바이니,
육국의 제왕들께서도 다 같이 군사를 일으켜
성업 완수(聖業完遂)에 적극 협력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오.
항우는 제왕의 격문을 읽어 보고 주먹으로 용상을 두드리며 분노하였다.
"내 일찍이 전영이라는 자를 제왕에 봉해 주었고,
진승(陳勝)이라는 자를 양왕에 봉해 주었거늘,
그자들이 배은 망덕하게도 반란을 일으켜 천하를 도모하겠다고 하다니,
이는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나는 한왕 유방을 치기 전에 그놈들부터 단단히 부숴버려야 하겠다."
자기가 키워 놓은 후백들에게 배반을 당하게 된 셈이니,
항우가 격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범증이 조용히 아뢴다.
"폐하 ! 장량이 간곡한 편지와 함께 이런 격문을 보내 온 것은
그의 위계(僞計)임이 분명하옵니다.
유방과 장량은 둘도 없는 심우(心友)이옵니다.
장량은 지난날 폐하의 은총을 입었다고는 하오나,
그때에도 그의 마음은 유방에게 있었던 것이옵니다.
지금 유방은 함양을 점령중이온데, 폐하께서 함양으로 쳐들어가려고 하심을 알고,
폐하의 공격을 제왕에게 돌리게 하려고
이런 위계의 편지를 보내 온 것이 분명하옵니다.
하오니 제나라를 먼저 치시는 것은 고려하셔야 마땅 할 것이옵니다."
범증은 불세출의 지략가인지라,
장량의 위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항우가 지혜로운 군주였다면,
범증의 충고대로 장량의 편지를 재검토해 보았어야 옳을 일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워낙 우직하고 거친 성격을 가진 인간이므로,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부는 모르시는 말씀이오.
장량은 본시부터 나에게 뜻이 있는 사람이오.
그는 몸이 허약하여 수양을 하느라고 명산 대천을 떠돌아 다니지만,
그가 어찌 나를 버리고 소심한 유방을 따라 가겠소.
그가 오늘 같은 중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만 보아도,
그의 충정을 알 만한 일이 아니오 ?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제나라와 양나라를 먼저 토벌하고,
유방은 그 다음에 정벌하기로 하겠소."
범증이 한숨을 쉬며 다시 말한다.
"장량은 워낙 위계에 능한 자이므로,
그자를 믿으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유방을 먼저 평정해 놓으시고,
제나라와 양나라는 그다음에 치시는 것이 순서일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힘차게 고개를 흔든다.
"제나라와 한나라를 모두 정벌할 판인데, 거기에 무슨 순서가 있겠소.
내 생각대로 우선 제나라를 쳐부수고 나서,
한나라는 그 다음에 쳐부수기로 하겠소이다."
그리고 항우는 우선 제나라를 쳐부수려고 대군을 발동하였다.
한편, 장량은 항우가 대군을 거느리고
제나라로 출동했다는 정보를 받고 나자 크게 기뻐하며,
자기 자신은 즉시 위(魏)나라로 달려가 서위왕 (西魏王) 위표(魏豹)에게
면담을 신청하였다.
위표는 장량의 면담 요청을 받고,
대부(大夫) 주숙(周淑)과 상의한다.
"장량이 나를 만나자고 하는데,
무슨 일로 찾아왔을 것 같소 ?"
"장량은 유명한 세객(說客)입니다.
그는 옛날에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보다도 더욱 뛰어난 변설가라 들었습니다.
그는 필시 한왕을 위해, 대왕을 설득하려고 왔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장량이 그런 일로 나를 설득하려 한다면,
그 순간 나의 보검(寶劒)으로 단박에 목을 쳐버리면 어떻겠소 ?"
주숙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한다.
"장량은 워낙에 혁혁한 인물이기에, 항우 조차도 함부로 죽이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러하니 대왕께서는 장량을 어디까지나 정중히 대해 주시되,
그가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들어 주지는 마시옵소서."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장량을 그냥 만나 보기만 하겠소."
위표는 장량을 불러들여 수인사를 나누고 나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선생은 한왕의 신하인 줄로 알고 있는데,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아오셨소 ?"
장량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한다.
"저는 한왕(漢王)의 신하가 아니옵고,
한왕(韓王)의 신하이옵니다."
그러자 위표가 따지듯이 다시 물었다.
"선생이 한(韓)나라 사람인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선생은 오래 전부터 한왕(漢王)과
가까이 지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잖소."
장량이 대답한다.
"한왕(漢王)이 진나라를 정벌할 때에 제가 한대왕(韓大王)의 명을 받고
한왕(漢王)을 도와 드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나라를 평정하고 난뒤,
저는 즉시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분이 오늘은 무슨 용무가 있어 나를 찾아오셨소이까 ?"
이에 장량은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말한다.
"대왕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한왕은 지금 함양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사람을 보내어 저를 여러 차례 부르셨습니다.
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오는 까닭에 한왕의 부름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사오나,
그러나 옛날의 은총을 저버릴 수가 없어 함양에 잠깐 들러 인사만 여쭙고
다시 본국으러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다 보니,
모든 백성들이 대왕의 성덕(聖德)을 극구 칭찬하고 있으므로,
저는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없어 잠깐 경의(敬意)라도 표하고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된 것이옵니다."
위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하여 주안상을 차려 내오게 하여 장량을 정중히 대접하며 물었다.
"오늘날의 천하의 대세를 관망하건대,
육국(六國)이 난립해 있는데다가 양대 강국인 초나라와 한나라가
제각기 봉강 통일 (封疆統一)의 야망을 품고 분쟁을 거듭해 오고 있는데,
선생은 장차 어느 나라가 봉강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리라 보시오 ?"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 숙고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천하 대세의 흥망을 누가 감히 예언할 수 있으오리까.
그러나 모든 정세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한나라는 흥하고 초나라는 망할 것 같사옵니다."
"그 이유는 ?"
"한왕 유방은 성품이 관인 후덕(寬仁厚德)한데다가,
천문학상으로도 오성(五星)이 한나라에 상취(相聚)하고 있으니,
그것은 하늘도 그를 돕고 있는 증거입니다.
한왕은 이미 삼진을 평정하고 함양을 점령하였는데,
제가 이번에 함양에 잠깐 들러 보았더니,
인근 각지에서 제후들이 앞을 다투어 귀순해 오고 있었습니다.
제(齊)나라와 양(梁)나라는 세력이 강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머지않아 한나라와 손을 잡을 기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제나라와 양나라조차도 그런 형편이니, 그 밖의 군소 국가들이야
천하의 대세의 흐름에 어찌 순응하지 않을 수가 있으오리까."
위표는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다시 묻는다.
"만약 한나라가 그처럼 흥하게 되면,
초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시오 ?"
장량은 나직한 음성으로 조용히 대답한다.
"초나라의 항왕은 성품이 우직하고 강포하여
<관중왕>의 자리를 억지로 빼앗고 나서는 의제까지 죽이고
자기 자신을 <황제 폐하>로 자칭해 오는 바람에,
천하의 인심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대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자고로 지난 시절에 시황제에서 보듯이,
백성들의 인심을 잃어버린 군주는
망하지 않는 법이 없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위표는 그 말에 흠칫 놀라면서,
"선생께서는 민심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계시는구려. 그렇다면 선생의 말씀대로
장차 한왕이 천하의 군주가 되실 것은 틀림이 없을 것 같구려.
나는 항우로부터 관작(官爵)을 받기는 했지만 항우의 그늘을 떠나
독립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소.
천하의 대세가 한왕에게 기울어졌다면나 역시 한왕의 그늘로 들어갔으면
싶은데, 선생은 나를 위해 그 길로 인도해 주실 수는 있겠소 ?"
"대왕께서 만약 한왕에게 귀순하시기만 하시면,
한왕은 대왕을 무겁게 쓰시는 것은 물론,
항우로 부터 위협 받게 되는 지금의 지위나
영토의 보존이 원만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소생은 대왕의 성덕을 흠모하고 있는 만큼,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병풍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대부 주숙이 두 사람 앞으로 썩 나서며 큰소리로 외친다.
"대왕께서는 장량의 궤변에 넘어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만약 지금 하신 말씀이 누설되면,
항왕은 대군을 일으켜 우리 나라를 쑥밭으로 만들려고 달려 오고야 말 것입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주숙 대부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
그러자 주숙은 장량에게 정면으로 대든다.
"귀공은 무슨까닭으로 웃으시오 ?"
장량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대부는 어찌하여 천하 대세의 강약의 흐름에 그렇게도 어두우시오 ?
항우의 성품을 이렇게나 모르시는 데는 정말로 놀랍소이다."
"천하 대세의 강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
"강약의 구별을 모르신다니, 내가 설명을 해드리지요.
일찍이 한나라의 명장이었던 옹왕(雍王) 장한은
20만 군사로써 함양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귀국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장수였었소.
그렇지만 한신 장군은 단 한번의 싸움으로 폐구성을 빼앗고,
장한의 목까지 베어 버렸소.
그 옛날 항우는 장한과 아홉 번이나 싸워서 간신히 승부를 결한 데 비하면, 누
가 강하고 누가 약한 것인지는 대번에 판별되는 것이 아니오 ?"
주숙은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묻는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천하의 정세에 어둡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말이오 ?"
장량이 다시 주숙에게 말한다.
"대부가 천하의 대세에 어두운 점을 말씀드릴 테니 들어 보시오.
무릇 천하의 대세가 변화하려면 <때(時)와 세(勢)> 라는
두 가지의 원리가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은 "때"와 "세" 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해, 모두가 유동적이오.
다시 말해서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은 유동적이란 말씀이오."
그 말에 대해 주숙은 즉각 반발하고 나온다.
"선생의 말씀대로 천하의 대세가 유동적이라면,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 산을 뽑아 세상을 덮을 기세)의
영웅인 항왕을 도와서 그를 천하의 주인으로 삼으면 될 게 아니오 ?"
장량이 대답한다.
"매우 좋은 질문이오. 그러나 항왕을 믿고 따르기에는
그 자신이 자기의 용맹만을 믿고 천명(天命)을 깨닫지 못한 사람임을 알아야하오.
그는 천하를 도모하려는 야망은 있어도 지략이 없는 것이 결점이란 말이오.
그는 백성을 사랑할 줄도 모르지만 관중(關中)을 버리고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 감으로써
중심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사람이 되었소."
"그러면 선생은 관중(함양)을 차지한 한왕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옳다는 말씀인가요 ?"
주숙의 감정적인 반격에, 장량은 조용히 손을 내저으며 다시 말한다.
"대부께서는 나의 말에 오해를 하고 계시는구려.
나는 다만 천하의 추세를 객관적으로 논평했을 뿐이지,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야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니,
그 점은 오해가 없기를 바라오."
그러자 이번에는 서위왕 위표가 장량에게 물었다.
"선생이 한왕 유방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선생의 견해를 듣고 싶소이다."
"대왕께서 물어오시니, 모든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제가 보기에는 한왕은 관상학상으로도 제왕(帝王)의 상(相)을
선천적으로 타고나신 분이오.
게다가 인품이 관인 대도(寬仁大度)하여, 이르는 곳 마다 민심이 그분한테 몰립니다.
함양을 점령할 때에도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입성하였으며,
함양성 백성들이 한왕을 <천세 ,만만세>로 맞아들였다고 하니,
그 어찌 그 분을 <때>를 얻고 <세>를 얻은 어른이라고 아니 할 수 있으오리까 ?"
주숙은 아직도 반발심이 누구러지지 않아,
다시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나 군세(軍勢)에 있어서는 초나라가 한나라에 비해 우세한 편이 아니오 ?"
장량이 웃으면서 말한다.
"물론 지금으로 보아서는 한나라보다 초나라가 훨씬 우세한 편이지요.
그러나 항왕은 남의 조그만 잘못까지 책할 줄은 알아도
커다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오.
제(齊)나라와 양(梁)나라가 지금까지는 항왕을 많이 도와 왔건만,
항왕은 지난날에 지내온 의리를 무시하고 대군을 일으켜 제와 양을 치고 있는 중이오.
항왕은 그 두나라를 정벌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나라로 쳐들어 올 것인데,
그때에는 무슨 힘으로 항우를 막아낼 수 있겠소."
마침내 장량은 서위왕 위표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한 말을 토해 놓았다.
위표는 청천 벽력 같은 장량의 말을 듣고, 주숙과 함께 소스라치게 놀란다.
"항왕이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와 양나라로 쳐들어가다뇨 ?
그게 무슨 말씀이오 ?"
장량은 눈을 커다랗게 떠보이며 대답한다.
"대왕께서는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계셨던가요 ? 두고 보십시오.
제나라와 양나라는 머지않아 항우의 손에 쑥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귀국이 항우의 손에 쑥밭이 되어 버릴 차례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선생은 무슨 얼토당토않은 엄포의 말씀을 ...."
서위왕 위표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등골이 오싹해 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바로 그때, 장수 하나가 급히 달려오더니 큰소리로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대왕 마마 큰일났습니다. 초패왕이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와 양나라로 쳐들어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하옵니다."
"무엇이 ?
그러면 장량 선생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란 말이냐 ?"
위표는 몹시 당황하며 이번에는 장량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장량 선생 ! 우
리가 한왕에게 귀순을 하게 되면, 한왕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도와주게 되겠지요?"
장량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한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징벌하는
기치를 내 걸고 항우와 천하를 겨루고 있는 어른이시오.
그토록 정의로운 어른께서 어찌 자기에게 귀순해 온
선량한 나라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주지 아니하겠소이까.
귀순만 하시면 한왕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그때부터는 귀국의 어떤 고난이라도 함께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위표는 그 말에 구세주를 만난 듯이 기뻐하며,
"그러면 한왕 앞으로 항표(降表)를 써드리고, 공물(貢物)도 많이 보내 드릴 테니,
장량 선생이 수고스러우신 대로 한왕 전하께 직접 전해 주실 수는 없겠소이까 ?"
하고 말했다.
장량은 내심 쾌재를 부른다.
"나라를 구하시겠다는데, 제가 어찌 도와드리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중대한 문제는 제삼자인 제가 나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죠.
따라서 주숙 대부가 가신다면,
저도 동행하여 모든 일이 원만히 해결되도록 조언(助言)은 해드리겠습니다."
장량은 주숙의 마음까지 돌려놓으려고 일부러 주숙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주숙은 항표와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량과 함께
함양으로 한왕을 만나러 떠났다.
일행이 함양에 도착하자,
장량은 한왕을 먼저 만나 지금까지의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니,
한왕은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며 말한다.
"선생이 아니시면 이처럼 어려운 일을 누가 성사시킬 수가 있었겠소이까.
주숙이라는 사람이 위왕의 항표를 가지고 왔다니 지금 곧 만나보기로 하지요."
주숙은 대궐로 들어와 한왕에게 큰절을 올리다가
한왕의 얼굴이 신선처럼 거룩하고도 우아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과연 한왕은 장량 선생의 말대로 제왕지상(帝王之相)이 분명하구나.
항왕을 만났을 때에는 공포감에 온 몸이 떨려와 죽을지경이었는데,
한왕은 마냥 인자하게만 느껴지니,
천하의 주인은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
주숙은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서위왕 위표의 항표를 내놓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위왕 표는, 삼가 한나라 대왕 전하에게 항표를 올리옵니다.>
대왕께서는 워낙 인덕이 풍성하시와 삼진을 평정하시자,
인근 제후들이 모두가 초패왕을 등지고 한결같이 대왕 앞으로 귀순해 왔다 하오니,
진실로 축하의 말씀을 올리옵니다.
모든 물줄기는 흐르고 흘러서 결국에는 대해(大海)로 들어가듯이,
본인도 이제부터는 대왕의 어명을 충실히 받들고자 하오며,
대왕전에 약간의 공물을 헌상하오니, 이를 기회로 앞으로 대왕께서
본인과 위나라 민초들의 정성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서위왕 위표 상서.
한왕이 위표의 항표를 읽어 보고 무척 기뻐하니, 주
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대왕께서 말(馬)을 좋아하신다 하옵기에 <백벽(白壁)>이라는 이름의
명마도 한 필 가져왔사오니, 마음에 드실지, 한번 시승(試乘)해 보아주시옵소서."
한왕은 워낙 말을 좋아하는지라, 주숙과 함께 밖으로 나와 말을 타보니,
전신이 눈처럼 하얀 <백벽>이란 말은 과연 명마 중에 명마였다.
한왕은 너무도 기뻐하며, 주숙에게 융숭한 연락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주숙이 돌아가려고 하자,
서위왕 위표에게 보내는 답신(答信)을 손수 써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왕은 서위왕 족하에게 친서를 보내오.
나는 귀왕의 명성을 들어 온 지 이미 오래오.
귀왕은 주왕(周王)의 후예로서,
위나라 백성들에게 많은 인덕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길을 잘못 들어, 초패왕 항우와 손을 잡았다기에
매우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우리와 생사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하니, 진실로 고맙고도 기쁜 일이오.
이제 우리는 함양을 중심으로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여,
생사 고락을 같이하고 부귀와 영화를 함께 누려 가도록 합시다.
우리가 머지않은 장래에 한자리에서 만나,
이 기쁨을 나눌 날이 있기를 바라오.
실로 친밀감이 넘치는 친서였다.
서위왕 위표는 한왕의 친서를 읽어 보고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아아 !
한왕이 이렇게도 위대한 어른이라는 것을 나는 왜 이제서야 알게 되었을까."
계속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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