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유방의 양친 상봉》

오토산 2020. 5. 21. 16:08

초한지(楚漢誌)92
유방(劉邦)의 양친 상봉(兩親相逢)

 

삼진을 비롯하여 서위왕 위표와 하남왕 신양까지 모두 귀순을 시키고 나니,

한나라의 세력은 갈수록 강대해져 갔다.

그에 따라 인근 각지의 제후(諸侯)들도 앞을 다투어

한왕의 휘하에 들어올 것을 자진하여 요청해 올 지경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오직 초패왕 항우를 정벌해 버리는 일만이 남았구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유방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것은 항우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유방 자신의 늙은 부모들이 항우의 손에 볼모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니 유방이 앞장서 항우를 함부로 쳐없애려다가는 부모님의 생명이 무사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그 문제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한신이 입궐하여 아뢴다.

"서위왕과 하남왕을 우리 편으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항우를 향해 진격하여도 되겠사옵니다."

그러자 유방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초나라를 함부로 건드렸다가 항우의 손에 억류되어 계시는 부모님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은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한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신 등은 대왕 전하의 고충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사옵니다.

그러기에 군사 행동을 일으키기 전에

우선 태공(太公) 내외분과 일가(一家)부터 구출해 올 계획을 강구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것만 같아서,
"고마우신 말씀이오.

그러나 항우의 손에 억류되신 부모님을 무슨 재주로 구출해 올 수 있겠소 ?"

한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에 찬 어조로 대답한다.
"계획만 잘 세워 실행을 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옵니다.

매우 외람되오나 신이 목숨을 걸고 태공 내외분을 이곳으로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한왕은 한신의 말이 너무도 감격스러워

, 그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항우의 손에 갖은 고초를 겪고 계실 부모님을 구출해 주신다면,

그 은공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잊겠소이다."

"염려 마시옵소서.

신이 태공 내외분을 기어이 구출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한신은 어전을 물러나오자,

곧 장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여러 장군들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대왕의 양친(兩親)은 지금 초패왕 항우의 손에 볼모로 잡혀 계시오.

그러기에 태공 내외분을 구출해 오기 전에는, 우리는 항우를 절대로 정벌할 수가 없게 되겠소.

왜냐하면 섣불리 군사를 일으켰다가는, 태공 내외분께서 그날로 항우의 손에 살해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오.

따라서 태공 내외분을 우리가 반드시 무사하게 구출해 와야만 하겠는데,

여러 대장들의 좋은 생각이 있거든 말씀해 보시오."

다른 사람도 아닌 초패왕 항우의 손에서 볼모를 빼앗아 온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만당(滿堂)한 장수들은 고개를 수그린 채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신이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우리가 머리를 쓰기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일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오.

물론 항우가 억류하고 있는 사람을 빼앗아 오기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 손으로 직접 빼앗아 오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제삼자의 힘을 빌리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오.

그런 수단을 한번 강구해 보기 바라오."

그러자 말석에 있던 왕릉(王陵)이라는 젊은 장수가 손을 들고 일어나 말한다.
"소장은 일찍이 남양(南陽)에 있을 때 주길(周吉)과 주리(周利)라는 두 의사(義士)들과 가깝게 지낸 일이 있습니다.

그들 형제는 2천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양민(良民)들을 보호해 주며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갔는데,

지금은 부하가 2만여 명으로 늘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이들 두 형제에게 태공을 구출해 오는 일을 부탁해 보면 어떨가 싶습니다."
한신은 왕릉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들이 왕 장군의 부탁을 틀림없이 들어줄 것 같소 ?"
왕릉이 대답한다.

"그들 형제는 워낙 의협심이 강하여 의로운 일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옵니다.

게다가 소장하고는 친분이 두텁기 때문에, 제가 부탁하면 결코 거절은 아니 할 것이옵니다."

"그러면 됐소.

왕 장군이 그 일을 꼭 부탁하도록 하시오."
한신이 간곡하게 부탁하자, 왕릉이 다시 말한다.

"소장이 출발하기에 앞서,

대원수께 부탁의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슨 애긴지 어서 말씀해 보시오."

"주길과 주리 형제가 교묘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 태공 내외분을 구출하게 되면,

항우는 반드시 대군을 일으켜 맹렬히 추격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들 형제의 병력만으로는 항우의 추격을 막아 낼 길이 없을 것이므로, 대원수께서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세워주시기 바라옵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오.

그러잖아도 나는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5만 군사를 미리 배치할 생각이었소.

만약 이번 일이 성공하는 날이면, 왕 장군은 일들 공신이 될 것이니.

왕 장군은 지금 곧 나와 함게 입궐하여 대왕의 윤허를 받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한신은 왕릉과 함께 입궐하였다.
한신이 왕릉을 대동하고 <태공 구출>의 계획을 보고 하니 한왕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한다.

""나는 그동안 부모님을 못 뵈온지 3년이 넘었소. 늙으신 어른들이 그동안 얼마나 고초를 겪고 계실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오. 왕 장군은 나의 부모님을 부디 구출해 주기 바라오.

부모님만 무사히 모셔오게되면, 나는 마음놓고 초나라를 칠 수가 있을 것이오."

왕릉이 아뢴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태공 내외분을 무사히 모셔 오도록 할 터이오니,

대왕께서는 태공 앞으로 보내시는 친필 한 장을 써주시옵소서.

그래야만 태공께서 신을 믿으시고 따라오실 것이옵니다."

"오오, 참 그렇구려. 부모님께서 나의 친필을 알아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그 일을 상상하니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구려."

한왕은 눈물을 흘려가며 즉석에서 친서를 써주었다.
왕릉은 그날로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팽성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한편, 초패왕 항우는 군사를 일으켜 제(齊)와 양(梁)을 먼저 정벌하고,

한(漢)나라는 다음에 정벌하려고 출전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비마가 달려오더니,

"황제 폐하 !

서위왕 위표와 하남왕 신양이 모두들 한나라로 귀순했다고 하옵니다."하고 전하는 것이 아닌가.

"뭐야 ?

위표와 신양이 한나라에 귀순을 하였다고 ?

그놈들은 내가 직접 키워 놓은 놈들인데 배은 망덕한 것들 같으니 ! 그놈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 "
항왕은 분하여 주먹으로 용상을 쾅쾅 치다가, 범증을 불러 상의한다.

"서위왕 위표와 하남왕 신양이 근자에 와서는 나의 명령을 가끔 거역하기에,

이들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조만간 그놈들을 손보아 주려 하였는데,

그놈들이 모두들 한꺼에 한나라에 귀순을 해버렸다니,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더구나 한신이란 놈은 파촉에서 나와 가지고 우리 영토를 7천 여리나  점령해버렸으므로,

나는 그놈들을 한꺼번에 쳐 없앨까 싶은데, 아부께서는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
범증이 심사 숙고하다가 대답한다.

"한나라에 귀순한 사람은 위표와 신양만이 아니옵고,

지금 모든 인심이 한결같이 한나라 유방에게 기울어 가고 있사옵니다.

천하 대세가 이처럼 변해가고 있는 이때에, 팽성을 비워 두고 원정의 길에 오르셨다가,

만약 적이 팽성을 공략해 오면 무슨 힘으로 그들을 막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하니,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풍패(豊沛)에 억류중인

유방의 부모와 그들 일족들을 팽성으로 모두 옮겨다가 인질(人質)로 잡아 두는 일이옵니다.

그러면 한신은 절대로 우리를 공략해 오지 못할 것이니,

우리는 그들 인질을 교묘하게 이용해 가면서 때를 기다려 일거에 쳐부수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그거 참 절묘한 지략이오. 유방의 부모와 그들의 일가족을 몽땅 볼모로 끌어다 놓으면,

유방은 애비 애미가 죽을까 두려워 함부로 덤벼 오지 못할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빨리 볼모들을 붙잡아다가 놓은후 저들을 근본적으로 때려 부술 계획을 세우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항우는 즉석에서 대장 유신(劉信)에게 긴급 명령을 내린다.

"유신 장군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패현(沛縣)으로 달려가,

유방의 애비 에미를 비롯하여 유씨 일문(劉氏一門)을 모조리 붙잡아 오라.

유씨 성을 가진 놈은 단 한 놈이라도 남겨 두어서는 절대 안된다."

유신은 1천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패현으로 달려와,

풍패(豊沛)라는 마을을 포위하고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을 모조리 붙잡으니,

유방의 친척은 무려 120여 명이나 되었다.

유신은 그들을 굴비 엮듯이 생선두릅처럼 오라를 꼬아,

묶어 가지고 팽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풍패를 떠나 30여 리쯤 왔을 때의 일이다.

별안간 우거진 숲속에서 일발의 철포(鐵砲) 소리가 나더니,

구렛 나루가 무성한 건장한 장사 세 명이 긴 칼을 빼들고 숲속에서 달려나오며,

"한왕의 종친들을 모두 우리에게 넘겨라 !

그렇지 않으면 네놈들은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으리라."하고 벼락 갚은 호통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유신은 크게 노하며,

앞으로 달려나가 엄포를 놓았다.

"우리들은 항왕의 명령을 받고, 태공(太公) 일족을 잡아가는 길이다.

도대체 네놈들은 어떤 놈들이기에 우리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

그러자 한 장수가 벼락같이 달려오며,

 

"이놈아 !

말로 타일러서 모르겠거든 죽어 봐야 알겠다는 말이냐 ?"하고 외치는 동시에,

유신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리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고 보니,

남은 군사들은 유씨 일족을 그냥 내버려둔 채 사방으로 도망을 쳐버린다.
세 장수는 오라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풀어 주고,

태공 내외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태공 내외분께서는 이제 안심을 하소서.

저희들이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두 어른께서는 큰일날 뻔하셨습니다.

모두가 한왕 전하의 홍복인 줄로 아뢰옵니다."
노부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며 반문한다.

"세 분 장수들은 도대체 어떤 분들이기에,

우리 두 늙은이를 고맙게도 이렇게 구출해 주시오 ?"
그러자 세 장수중에 젊은 장수 하나가 앞으로 다가와 대답한다.

"저는 한왕 휘하에 근무하는 왕릉이라는 장수이옵고,

이 두 사람은 남양에 사는 주길(周吉)과 주리(周利)라는 두 의사(義士)들이옵니다.

우리 세 사람이 태공을 모시러 왔사오니, 이곳을 빨리 떠나셔야 하옵니다."

태공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구출해 준 세명의 장수들은 모두 다 고마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생면 부지의 사람들이 아무 까닭도 없이 자기를 구해 줄 이유도 없으려니와,

도대체 어디로 가자고 하는 것인지 조차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

물론 왕릉이라는 장수는 <한왕 휘하에 근무하는 장수>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세상이 하도 험악하니 그 말인들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태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묻는다.

"세 분은 우리 일행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것인지,

행방이나 좀 알고 갑시다."

왕릉은 태공이 불안해 하는 심정을 그제서야 깨닫고,

품속에서 <한왕의 친서>를 꺼내 주며 말한다.

"저희들이 한왕 전하의 친서를 가지고 왔사오니,

이 친서를 읽어 보시고, 저희들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태공은 아들의 친서를 읽어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오오, 이 편지는 틀림없는 내 아들 방(邦)의 필적이오.

세 분은 나의 아들의 부탁을 받고 나를 구하러 오셨음이 분명하니,

우리 일행은 당신네를 믿고 어디든지 따라가겠소."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적이 언제 어디로부터 추격해 올지 모르니, 이곳을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일행은 함양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한편 초군 대장 유신이 전사하자,

그의 부하들은 팽성으로 급히 돌아가, 항왕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저희들이 태공 일가족을 압송해 오다가 산중에서 산적들을 만나

유신 장군이 전사하는 바람에 태공 일가족을 모두 산적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항우는 그 소리를 듣고 길길이 노하며 외친다.

"패현에 무슨 산적이 있다는 말이냐 !

그자들은 유방이 보낸 한나라 군사임에 틀림없다.

그놈들은 함양으로 갔을 것이 분명하니,

지금 곧 군사를 동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그놈들을 붙잡아 와야 한다."
그리고 즉시 대장 영포(英布)와 종이매(鐘離昧)를 불러 서슬 퍼런 군령을 내렸다.

"군사 3천기를 이끌고, 함양으로 도망치고 있는 유씨 일족을 모조리 잡아 오라."
한편, 왕릉은 적의 추격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알았기에,

밤에도 이들을 태운 수레를 멈추지 않고 함양으로의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유씨 일문중에는 부녀자와 노약자도 많이 섞여 있어서,

빨리 가고 싶어도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길을 재촉하며 가다가, 하남땅을 지날 무렵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지평성 저편에서 먼지 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나며

한떼의 군사들이 질풍처럼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었다.

확인을 하나마나,

그들은 초군의 추격대가 분명하므로, 왕릉은 주길과 주리에게 말한다.

"초군 추격대가 지금 우리 덜미를 눌러 오고 있는 중이오.

부득이 나는 먼저 태공 내외분과 일족을 모시고 먼저 달아날 테니,

두 분은 이곳에서 숨을 돌리고 있다가 저들을 저지시켜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주길과 주리가 한 소리로 대답한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추격대를 최후까지 저지할 테니, 장군은 태공을 모시고 빨리 떠나가시오."

왕릉이 태공과 그 일족을 모시고 떠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초군 추격대가 노도와 같이 몰려왔다.
영포와 종이매가 장검을 휘둘러 덤벼 오며, 큰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이 역적놈들아 ! 태공을 빨리 내놓아라 !

그렇지 않으면 너희놈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리라."
주길과 주리가 당당하게 말을 달려나오며 맞선다.

"우리들은 한왕의 명을 받고 태공을 모시러 온 한나라 군사들이다.

너희들은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태공을 내놓으라는 소리를 하고 있느냐.

너희들이 태공을 빼앗아 가려고 행패를 부리면

네놈들의 목을 날려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

영포가 크게 노하며, 번개같이 달려나오며,

"이놈들아 !

누가 누구의 목을 날려 버린다는 말이냐 ! "하고

외치는 바람에 마침내 싸움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영포는 천하의 맹장이었다.

그러나 주길과 주리 형제도 결코 만만치가 않아서,

1대 2의 치열한 싸움이 50여 합이나 계속되어도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마침 그때, 초군 진지에서 정전(停戰)을 명령하는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왔다.

영포는 마지못해 싸움을 거두고 돌아와, 대장 종이매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놈들을 모조리 죽여 없앨 생각이었는데,

장군은 무슨 까닭으로 정전 명령을 내리셨소 ?"

종이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적의 후방을 가르키며,
"적의 후방에서 상당한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

적은 후방에 많은 복병(伏兵)을 대기시켜 놓은 것이 분영하오.

그렇다면 우리 병력으로 적을 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니,

오늘은 일단 이 근처에서 야영을 하고 밤새 지원 병력을 보충 받아, 

다시 추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그 말에 영포는 화를 벌컥 내며,
"에이 여보시오.

여기까지 왔다가, 적을 눈앞에 두고 싸움을 멈추자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

나는 저놈들을 죽여 버리고, 볼모들을 기어코 빼앗아 가고야 말겠소."

그리고 말머리를 돌려 주길과 주리 형제의 뒤를 다시 추격해가기 시작하니,

종이매도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왔다.
영포가 주길과 주리 형제의 뒤를 쫒자,

그들 형제도 말머리를 돌려 영포와 대적하였는데,
영포가 주길과의 접전에서 기회를 잡아 주길의 목을 대번에 날려 버리니,

주리가 크게 노하여 단독으로 영포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주리도 영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포는 4,5합쯤 싸우다가 주리 역시 한칼에 찔러 죽이고,

그때부터는 3천 군사를 모조리 쳐부수기 시작하였다.
영포가 완승(完勝)을 거두고 보니, 어느덧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포가 산기슭에 진을 친 뒤 군사들을 쉬게 하고 있었는데, 종이매가 달려와 말한다.

"과연 ,장군의 용맹은 천하의 무적이오.

장군이 아니었으면 누가 저들 두 장수를 한꺼번에 베어 버릴 수가 있었겠소이까."
영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장군이 뒤에서 지원을 해주었기에 망정이지,

나 혼자의 힘으로야 어떻게 완승을 할 수가 있었겠소."
종이매가 다시 말한다.

"저 멀리서 먼지 구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의 복병이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소이다.

오늘 밤에는 경계를 엄하게 하여야 하겠소."

"물론 그래야 하겠지요.

오늘 밤에 아무일도 없게 되면 내일 새벽에는 우리가 또다시 추격을 개시해야 하겠소."

한편, 다음날이 되도록 , 왕릉은 태공을 모시고 결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후에 소식을 듣고 보니, 주길과 주리 두 형제가 모두 다 전사를 했다는 것이 아닌가 ?
왕릉은 크게 놀라며 더욱 갈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영포와 종이매가 어느덧 덜미를 눌러 오고 있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 "

왕릉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결사적으로 태공 내외와

유씨 일가족을 태운 수레를 호위하여 달려나가고 있노라니까

, 홀연 좌우편 숲속에서 수만 군사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더니,

수레를 추격해 오던 초나라 군사들을 사정없이 때려부수는 것이 아닌가 ?

그제서야 깨닫고 보니,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초군을 때려 부수는 장수는 다름 아닌 ,

한나라의 대장인 주발과 진무였다.

이들은 한신의 명령에 의해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맹렬하게 추격해 오는 영포와 종이매의 군사들을 풀 베듯이 후려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왕릉이 갖인 고초를 겪으며 태공 내외분과 유씨 일족을 함양으로 무사히 모시고

오자, 한왕은 문무 백관들을 거느리고 성문 밖까지 마중을 나와 눈물로 태공에게 아뢴다.

"불효 막급한 소자가 항우의 계략을 막지 못하여,

늙으신 부모님에게 수다한 고초를 드리게 되어 여쭐 말씀이 없사옵니다."하고 말을 하니,

태공 내외는 아들의 등을 정답게 토닥 거리며 오히려 아들을 위로해 준다.

"너는 영웅답지 못하게 무슨 못난 소리를 하고 있느냐,

네가 천하를 얻기까지는 우리가 다 같이 고초를 겪어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

실로 감격적인 부자 상봉의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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