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장량과의 재회.》

오토산 2020. 5. 20. 13:41

초한지(楚漢誌)89

 장량과의 재회.

 

 그로부터 며칠 후,

 한신은 어느 날 조회 석상(朝會席上)에서 한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우리가 함양성을 점령했습니다만,

 서쪽에는 서위왕(西魏王) 위표가 평양(平陽)에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하남왕(河南王) 신양이 낙양(洛陽)에 버티고 있사옵니다.

그 두 사람은 항우와 가까운 사람들이므로,

만약 항우가 군사를 일으켜 함양성을 탈환하려고 한다면

두 사람은 항우와 합동 작전으로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삼면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걱정스러웠다.

한왕 자신도 내심, 은근히 걱정을 해오던 중이었는데,

정작 한신으로부터 분명하게 지적받고 나니 더욱 불안했던 것이다.

 한왕은 침통한 어조로 말하였다.

 

 "함양이 우리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항우가 군사를 일으켜 올 것이 분명한 일이오.

그렇게 된다면 적을 삼면으로 맞다뜨려야 하는 어려운 경우가 생기겠으니,

 그것을 미연에 방지할 무슨 방도는 없겠소 ?"

 

"글쎄올시다.

 초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제(齊)나라가 근래에 급속도로 강해지고 있는

형편이오니, 항우가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려면, 누군가 나서서

항우로 하여금 제나라를 치게 만들고, 우리는 그 사이에 위표와 신양을

우리 편으로 돌려놓으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거 참 묘책이오.

그러면 항우로 하여금 우리보다 제나라를 먼저 치게 만들 사람은 누가 있겠소.?"

 하고 물었다.

 한신이 대답한다.

 

"항우로 하여금 제나라를 먼저 치게 할 지혜를 가진 사람은,

오직 장량 선생 한 분이 계시올 뿐이옵니다."

 

"오오, 장자방 선생 !

그 어른이라면 그 일을 슬기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어른은 천하를 주유중(周遊中)이어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알아야 말이죠."

 

"비밀리에 사람을 놓아서 알아보면,

지금쯤 어디 계신지를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장량 선생이 계시는 곳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한왕은 장량에게 간곡한 친서를 여러장 써 가지고,

 많은 사람을 놓아 장량의 행방을 찾아보게 하였다.

 

다행히 장량의 행방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장량은 한왕의 친서를 받아 보고, 그 인편에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신 장량은 하늘 아래 어디에 있더라도

대왕 전하에 대한 사모의 마음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사옵니다.

더구나 신을 찾으시는 간곡한 친필을 받자오니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오나,

부득이한 일로 남전(藍田)에서 신풍(新豊)을 거쳐

열흘쯤 후에나 알현하고자 하오니 널리 헤아려 주시옵소서.>

 

한왕은 장량의 회신을 받아 보고 어쩔 줄 모르도록 기뻐하였다.

 한왕이 이런 소식을 알리며 한신에게 편지를 보여 주자,

 한신도 크게 기뻐하였다.

 

"장량 선생이 오시려면 아직도 10여 일은 더 기다려야 하므로,

 그동안 하남왕 신양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가 우리에게 협력해 오도록 설득 시켜 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남왕 신양과 서위왕 위표만 우리 편으로 돌려놓으면,

설령 항우가 쳐들어 오더라도 염려할 바는 없사옵니다."

 한왕은 즉석에서 찬성한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누구를 보내 신양을 설득시키는 것이 좋겠소 ?"

 

"중대부 (中大夫) 육가(陸賈)는 본래가 위나라 태생인데다가,

변설(辯舌)도 능하려니와, 하남왕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그러하니 육가를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육가를 불러 하남왕을 설득시키도록 부탁하자,

 육가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지난날 대왕께서 진나라를 평정하셨을 때,

신은 함양에서 대왕을 처음 만나 뵈옵고 오늘날까지 3년 동안,

부모님과 처자식을 내버려둔 채 줄곧 대왕만 따라다녔습니다.

 다행히 부모님과 처자식들이 아직도 낙양에 그냥 살고 있으니,

신이 낙양에 가서 신양을 설득해 볼 것은 물론이옵고,

가능하면 서위왕 위표도 설득해 우리와 뜻을 같이 할 수 있도록 힘써보겠습니다."

 

 한왕은 육가의 충정을 고맙게 여겨,

황금 10근을 하사하며 잘 다녀오도록 간곡히 당부하였다.

 육가가 함양을 떠나 낙양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가니,

부모와 처자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육가는 부모님에게 큰절을 올리며,

 "소자 불효 막심하여 오랫동안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사온데,

그간 고초가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하고 사죄를 하니

 늙은 아버지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네가 집을 떠난 그날부터 우리 집안은 끼니를 끓여 먹기가 어렵도록 곤궁했었다.

하남왕께서 그런 사정을 아시고 고맙게도 다달이 곡식을 보내 주셔서

 지금까지 아무 걱정 없이 지내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하남왕의 은혜가 대단하였으니,

너는 지금 당장 하남왕을 찾아 뵙고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도록 하여라."

 

 육가가 옷을 갈아입고 하남왕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니,

 신양은 크게 기뻐하면서, 육가에게 묻는다.

 

"육대부가 한왕을 따라가신 이후,

나는 세상사를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어 얼마나 쓸쓸했는지 모르오.

다행히 귀공이 돌아와 주셔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구려.

귀공이 3년 동안이나 가족을 버리고 한왕만 따라 다닌 것을 보면,

한왕이라는 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닌 모양인데,

 귀공이 보시기에 한왕은 어떤 인물입디까 ?"

 

 육가가 대답한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한왕은 인덕(仁德)이 넘쳐서

 한번 만나 보면 발길을 돌리기가 어려운 어른이시옵니다."

 

신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왕이 덕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나도 많이 들어 왔지만,

그렇게까지 인덕이 후한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구려."

 

 육가가 다시 말한다.

 "한왕은 얼마 전에 삼진을 평정하고 함양성까지 점령했사온데,

어디를 가나 한왕이 나타나기만 하시면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기쁨으로 그분을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한왕 휘하에는 만고의 명장인 한신 장군을 비롯하여,

번쾌,조참,주발등 기라성 같은 맹장이 즐비하여 한왕은 머지않아

천하의 주인이 되실 것이 분명합니다."

 

 신양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크게 움직인 듯,

육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실상인즉 나도 한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오래 전부터

한왕에게 귀순해 볼까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오."

 

육가는 그 말을 듣고 신바람이 나서,

 "참으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평소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계셨다면, 차제에 한나라의 귀순을

단행해 버리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확답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신양은 고개를 가로 흔들며,

 "내가 아무리 한나라에 귀순하고 싶어도, 당장은 안 될 말이오."

 하고 명백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보인다.

 

"생각을 품고 계시다면서 단행하지 못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

 

"생각해 보시오.

초패왕 항우라는 사람은 성미가 워낙 포악한 사람이 아니오.

그런 그가 내가 자기를 버리고 한왕에게 귀순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만 있겠소 ?

 모르긴몰라도 그날로 대군을 몰고 쳐들어와서, 나를 여지없이 유린해 버릴 것이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지금 당장 한왕에게 귀순할 수가 있겠소.

나는 죽으라 사나 항우를 배신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사정을 들어 보니 신양에게 귀순을 무리하게 권고할 수가 없게 되자,

육가는 말머리를 돌렸다.

 

"사정이 그러시다면, 귀순까지는 못 하시더라도,

 만약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오더라도 정면으로 싸우지는 마시옵소서."

 

"글쎄, 그런 일이란 그때를 당해 봐야 할 일이지,

지금 뭐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육가는 신양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함양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한사코 못 떠나게 붙잡는 바람에

지체하면서 낙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 턱 없는 한왕은,

육가가 열흘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몹시 걱정이 되었다.

 

(육가가 하남왕을 설득시키려고 떠난 지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혹시 무슨 불상사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

 

 이런 걱정에 싸여 있는 어느 날 ,

돌연 <장량 선생이 오늘 중으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어쩔 줄 모르게 기뻐하면서 만조에 긴급 명령을 내린다.

 

"장량 선생을 정중히 영접할 수 있도록 ,

 만조 백관들은 모두 긴급히 출두하라."

 

 그리하여 문무 백관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입조(入朝)하자,

한왕은 장량을 영접할 절차를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장량 선생이 지금 신풍(新豊)으로부터 돌아오시는 중이라고 하니,

조참과 관영은 수레를 가지고 20리 밖까지 마중을 나가고,

한신 장군은 설구, 진패 등과 함께 주효상(酒肴床)을 차려서

5리 밖까지 영접을 나가도록 하오.

영접 절차에 예절을 벗어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오.

 나는 여타 백관들과 함께 승덕문(承德門) 앞에서

장량 선생을 몸소 맞아들이기로 하겠소."

 

 영접 절차 하나만 보아도 한왕이 장량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윽고 장량이 탄 수례가 승덕문 가까이 다가오니,

한왕은 두 손을 벌리고 달려오며 말한다.

 

"장량 선생 ! 어서 오십시오.

선생과 헤어진 이후로, 나는 선생과의 재회를 학수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장량은 수레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신 장량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랫동안 신금(宸襟)을 어지럽게 해드리어 죄송 망극하옵니다."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

원로에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으니, 어서 대전으로 오르십시다."

 

 한왕이 친히 장량의 손을 잡고 대전으로 이끌어 올렸다.

 한왕이 용상에 정좌하자, 장량은 새삼스럽게 큰절을 올리며,

그간의 사정을 품고하였다.

 

"대왕 전하 !

신은, 몸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사오나

마음만은 항상 대왕을 지척에 모시고 있었사옵니다.

지난날 파촉으로 들어가시는 노상에서 대왕 전하에게 작별을 고할 때,

 신은 세가지 중대한 약속을 드린 바가 있사옵니다.

 첫째는 항왕으로 하여금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도록 꾸미는 일이었사옵고,

둘째는 육국(六國)으로 하여금 초나라를 등지게 만드는 일이었사옵고,

셋째는 초나라를 때려부술 대원수의 인재를 물색하여 보내 드리는 일이었사옵니다.

 이제 그 세 가지일을 모두 실현시키고,

 이미 약속드린 대로 함양에서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신은 무한히 기쁘옵니다."

 한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우리가 함양으로 돌아와 이렇게 선생과 재회하게 된 것은 모두가 선생의 덕택입니다.

 이 공훈을 금석(金石)에 새겨서 대대로 전해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황공하옵게도 과찬의 말씀을 내리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장량이 대왕에 대한 귀환 인사를 끝내고 대궐을 물러나오니,

한신이 모든 장수들을 원수부에 대기시켜 놓고 장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신은 장수들과 함께 장량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소장이 선생의 천거로 한왕께 발탁되와

다소의 공적을 이루게 된 것은 모두가 선생의 은총 덕택이옵니다."

 장량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원수가 이 나라의 위덕(威德)을

만천하에 떨치게 해주신 것은 대왕의 홍복(洪福)이시오."

 

 다음날 아침 어전 회의에서, 육가가 낙양에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장량은 단정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육가가 낙양에 간 목적은 신양을 설득시키려는 것 보다,

 가족을 만나려는 데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신양은 콧대가 대단히 높은 인물이라,

육가가 그를 석득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적이 걱정한다.

 "그러면 선생은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

 

"신양과 위표는 신이 직접 찾아가서,

우리에게 귀순해 올 수 있도록 애써 보겠사옵니다.

그들을 귀순시켜 놓은 뒤에,

한신 원수가 군사를 몰고 동진(東進)을 하면

천하의 대사는 순조롭게 풀려 나갈 것이옵니다."

 그러자 한신이 즉석에서 찬성하며 말한다.

 

"육가는 부모 처자를 만나 보고 싶어 낙양에 돌아갔을 뿐,

 선생이 아니시면 신양과 위표를 도저히

우리 편으로 끌어 들일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탄식을 하면서,

 "선생은 바로 어제 돌아오셨는데,

어찌 또다시 먼 곳으로 떠나시라고 할 수 있겠소 ?"

 그러자 장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천하의 형세가 방향을 가르는 혼돈의 시기에 ,

신이 어찌 일신의 안일만 도모하고 있을 수 있으오리까.

대왕을 만나 뵙기가 무섭게 또다시 작별을 고하기가 저 역시 안타깝기는 하오나,

매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오니,

대왕께서는 먼 장래를 생각하시어 쾌히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선생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선생을 끝까지 붙잡을 수는 없는 일이구려.

그러면 앞으로 선생께서는 어떤 계략을 쓰시려는지,

떠나시기 전에 선생의 계략이나마 알려 주시고 떠나시면 고맙겠소이다."

 장량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신에게는 지금 두 가지의 계략이 있사옵니다.

첫째는 육국(六國)을 부추겨서 초나라를 배반하도록 만드는 일이옵고,

둘째는 항우에게 그럴듯한 표문(表文)을 보내어 항우로 하여금

제(齊)나라를 치게 하는 것이옵니다.


제나라는 항우가 눈엣가시처럼 고깝게 여기는 강대국인 까닭에

조금만 부추겨 놓으면 항우는 우리를 겨누던 칼을 돌려 ,

제나라를 반드시 치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면 그들이 전쟁을 하며 힘을 빼는 기회를 이용하여,

 신이 달려가 평양의 위표와 낙양의 신양을 이해(利害)로 설득하여

 모두 우리 편으로 돌려놓을 생각이옵니다."

 

 한왕은 장량의 심오한 계획을 듣고 거듭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장량은 즉석에서 항우에게 올리는 표문을 작성하여 팽성으로 보내고,

 자신은 5,6명의 종자(從者)만 거느리고 비밀리에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가 있는 평양(平陽)으로 떠나갔다.

 

 

계속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