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유방의 함양 재입성 》

오토산 2020. 5. 19. 10:53

초한지(楚漢誌)88

 유방의 함양 재입성.

 

 함양(咸陽)은 진(秦)나라 시절의 도읍지(都邑地)로 관중(關中)의 요새(要塞)였다.

 그러기에 <함양을 점유하는 자만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는 말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 올 정도였다.

 

그러나 초패왕 항우는 오로지 금의 환향(錦衣還鄕)을 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아부(亞父) 범증의 간곡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최고 통치자인 항우가 머나먼 팽성으로 떠나 버렸으니,

함양의 방위 태세가 소홀해 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함양은 국가의 안보상으로도 절대적인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는 사마이(司馬移)와 여신(呂臣),

두 장수가 겨우 만 명의 군사로써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비마가 달려오더니,

 "한나라 군사들이 어느 새 삼진을 평정하고,

이제는 함양으로 쳐들어 올 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하고

 보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마이와 여신은 크게 놀라, 그 사실을 팽성에 급히 알리며,

지원군을 시급히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함양에서 팽성까지는 머나먼 2천여 리 길,

말을 아무리 빨리 달려도 가는데만 보름이 걸린다.

 

그러기에 지원군이 빨리 달려 와 주기만을 학수 고대하고 있던 어느 날,

비마가 다시 달려오더니,

 

"한나라 10만 군사가 어느 새 부풍(扶風)을 지나

 30리 밖까지 진격해 오고 있는 중입니다."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사마이와 여신은 크게 당황하며 상의한다.

 

"우리가 만 명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10만 대군과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

 

"누가 아니래 !

더구나 한신은 출중한 전술로, 삼진왕들을 차례로 격파해 버리지 않았던가 ! "

 

"그나 그뿐인가 ?

 함양에 백성들은 한왕이 온다는 말을 듣고,

저마다 한왕을 은근히 환영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거든."

 

"그러니까 우리들은 팽성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수비만 해야 할 거야.

그러노라면, 범증 군사께서 무슨 비상 대책을 강구해 주시겠지."

 

사마이와 여신은 그날부터 성문을 폐쇄하고,

오직 수비 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한편, 한신은 함양성을 목전(目前)에 두고,

첩자들을 통하여 적정(敵情)을 소상하게 알아 보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함양성은 워낙 난공 불락의 철옹성인 까닭에,

 순전히 무력으로만 공략하려다가는 우리쪽의 희생자만 많이 낼 뿐,

승리를 거두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함양을 공략하는 데 있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

고차원의 전략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판단한 한신은,

 "여마통 장군을 이리로 불러라"하고 명했다.

 

 잠시후 여마통이 부름을 받고 달려오자,

한신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장군이 아니면 안 될 긴급한 일이 하나 생겼소."

 

여마통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감격하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오나,

소장이 꼭 필요한 일 이라면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사오니

원수께서는 명령만 내려주시옵소서."

 

"고마운 말씀이오."

 

"실상인즉, 소장은 귀순해 온 이후로 원수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오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하여 심히 괴롭게 여기던 중이었사옵니다.

그러니 소장에게 어떤 명령을 내려 주시더라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책임을 다하겠사옵니다."

 한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장군은 폐구성에 부임해 올 때에,

항우의 이름으로 발행한 병부(兵符)를 받아 가지고 왔을텐데,

그 병부를 아직도 가지고 있소 ?"하고 물었다.

 여마통이 대답한다.

 

"이제는 필요치 않은 것이오나,

아직까지 가지고 있기는 하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렇다면 그 병부를 이용하여 장군에게 중대한 사명을 맡겨야 하겠소."

 

"무슨 일이든지 명령만 내려 주옵소서."

 

 "장군은 이제부터 함께 귀순해 온 부하들과 함께 초군 병사의 옷으로 다시 갈아 입고,

 함양성으로 달려가 수문장에게 병부를 내보이면서,

< 우리는 항왕께서 보내신 지원군이다>라고 속이시오.


그러면 그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환영할 것이 분명한데,

우리군사들이 그 부근에 미리 매복해 있다가,

성문이 열림과 동시에 성안으로 노도와 같이 몰려들어가 함양성을

일거에 점령할 생각이오.

만약 이 일이 성공하게 되면, 모든 공로는 장군에게 돌릴 것이니,

 최선을 다해 주시오."

 

 실로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위계 전술이었다.

 여마통은 크게 기뻐하며 대답한다.

 "소장이 맹세코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여마통은 재삼 다짐을 하다가, 문득 얼굴에 실망한 빛을 띄며,

 "그런데 병부를 가지고 저들을 속이는데는 문제 되는 점이 하나 있사옵니다."

 하고 말을 한다.

 

 "병부를 보여 주기만 하면 될 텐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이오 ?"

 

"원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모든 병부에는 그것이 발행된 날짜가 기록되어 있사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는 병부에는 3년 전의 날짜가 들어있사오니,

그런 병부를 가지고 저들을 속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아차, 내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하였소.

그야말로 실수를 할 뻔 하였소....

그 문제는 그것대로 해결할 방도를 찾을테니,

장군은 그 병부나 가져오도록 하시오."

 

 여마통이 숙소로 달려가 병부를 곧 가져 왔는데,

 그 병부의 발행 일자는 <大楚王 二年 三月 十日>이라는

 3년전의 날짜가 쓰여있었다.

 한신은 병부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나서 말한다.

 

 

"음 ....

날짜가 이렇게나 틀리는 병부로 저들을 속이려고 했으니,

하마터라면 큰일날 뻔했는걸."

 

그리고 생각을 골똘히 해보다가,

문득 부관을 불러 명한다.

 

"우리 군사중에 이병(李昞)이라는 기사(技士)가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을 곧 이리 불러오너라."

 

 이병이라는 사람은,

 문서를 변조하는 데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한신은 이병을 불러다가, 자세한 사정을 말해 주고 나서,

 "<大楚王 二年 三月 十日>을 <大楚王 五年 五月 十七日>로 감쪽같이 고쳤으면

싶은데 자네가 가능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옵니다."

 이병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몇가지 약물을 사용하여 글자를 변조해 놓았는데,

 그야말로 누가 보아도 속지 않을 수 없도록 감쪽 같았다.

 한신은 크게 기뻐하면서, 변조된 병부를 여마통에게 내주며 군령을 내린다.

 

"이 병부를 가져가면 귀신도 속일 수가 있을 것이니,

 여 장군은 이제부터 패릉(覇陵)을 돌아서 함양성으로 가도록 하오.

그동안에 우리는 번쾌,주발, 근흠, 시무 등 네 장수로 하여금

 성밖에 은밀히 숨어있게 했다가, 성문이 열림과 동시에 3만 군사가

 몰려 들어가, 함양성을 순식간에 점령하도록 할 것이오."

 

여마통은 군령을 받고 나자, 비밀리에 경수(涇水)를 건너 패릉으로 돌아나왔다.

 팽성에서 함양으로 오려면 패릉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일부러 그곳을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여마통이 이끄는 허위 지원부대는 패릉에서부터는

초나라의 검은 깃발을 드높이 휘날리며 당당하게 함양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함양성 척후병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사마이와 여신에게,

 "팽성에서 이제야 지원군이 오고 있사옵니다."하고 알리니,

 사마이와 여신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성의 망루에 직접 올라가 확인까지 하였다.

 이윽고 여마통이 성문 앞에 당도하여 성안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항왕의 명령을 받고,

범증 군사의 지시에 따라 팽성에서 함양을 구하러 온 선발 부대요 !

 성문을 빨리 열어 주시오."

 

 "팽성에서 왔다면 항왕의 병부를 가지고 왔을 것이니, 병부를 보여 주시오.

그래야만 성문을 열어줄 수 있소."

 

"항왕께서 내려주신 병부가 여기 있으니,

 확인 되는 대로 빨리 성문을 열어 주시오."

 

여마통은 자신 만만하게 말하며,

문틈으로 문제의 변조된 가짜 병부를 들여보내 주었다.

 

 사마이와 여신은 여마통의 병부를 면밀하게 들여다 보았다.

 병부에 찍혀 있는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옥새(玉璽)와

 발부 날짜 등은 조금도 하자(瑕疵)가 없었다.

 

이에 사마이와 여신은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성문을 활짝 열어주며,

 "어서 오십시오.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하고 ,

여마통과 그의 수행 부대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여마통은 성안으로 군사들을 몰고 들어오며,

사마이에게 말했다.

 

"우리는 선발 부대로 후속 부대가 곧 도착할 테니, 

 성문을 닫지 말고 기다려 주시오."

 

"아니, 성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

 

"후속 부대가 곧 대거 나타날 테니,

그런 줄 알고 있으라는 말이오."

 

 여마통의 입에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 숲속에서 잠복해 있던 번쾌, 주발, 근흠, 시무가 3만 군사를 몰아쳐,

물밀 듯이 성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여마통과 그의 수행원들은 깜짝 놀란 사마이와 여신을

순식간에 결박을 지어 놓고, 성루에 붉은 깃발을 드높이 계양하면서

모든 군사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다.

 

"우리는 한나라 대장군 번쾌와 주발이다.

누구든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는 살려줄 것이고 저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죽일 것이니, 모두들 알아서 처신하라 ! "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초나라 군사들은 기가 질려 버려서,

손에 든 무기를 내던지고 땅에 엎드려 살려 주기를 애원하였다."

 

그리하여 한신은 관중의 요충인 함양성을 피 한방울,

 화살 한촉 쏘지 않고 거짓말 처럼 쉽게 점령해 버렸다.

 한신은 그날로 한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함양성 함락을 알렸다.

 

한왕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 다음날로 함양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한왕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모두들 거리로 몰려나와서

 <한왕 만세 ! 만만세 !>를 외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지경이었다.

 

 한왕은 유서 깊은 함양 성내를 골고루 둘러보며,

수행한 문무 백관들을 향하여, 감격스럽게 말했다.

 

"나는 진작부터 관중왕이 되었을 것인데,

항우에게 배신을 당하는 바람에 함양 입성이 이렇게도 늦어졌구려,

오늘 날 이런 감격스러운 일을 만나고 보니,

사필 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소."

 

 진나라 시절부터 사용되던 궁전을 깨끗이 수리해 놓고,

 한왕이 궁전으로 처소를 옮기자,

한신은 문무 백관을 대동하고 입궐하여 하례를 올리니,

한왕은 하례를 받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 오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대원수를 비롯하여

 여러 문무 백관들의 심혈을 기울인 보필 덕분이오.

오늘은 연회를 크게 베풀어, 여러분의 노고를 마음껏 위로해 드리겠소이다."

 이리하여 이날 밤의 연회는 과거의 어떤 연회보다도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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