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 (98)
영포(英布)의 귀순.
한왕의 뒤를 추격하던 대장 정공(丁公)이 한왕을 살려 보내고,
옹치와 함께 본영으로 돌아와 항우에게 거짓 보고를 올렸다.
"우리 두 사람이 한왕의 거취를 백방으로 탐색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면목없이 돌아왔사옵니다."
그러자 항우는 발끈 화를 내며 말한다.
"에이 못난 것들 같으니라구 ....
그나저나 유방이란 놈은 이번 싸움에서 워낙 타격이 커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범증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한다.
"유방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시옵니다.
그들이 이번에 패한 이유는, 아무런 지략도 갖추지 못한 위표라는 자를 총대장으로 임명한 데 있었습니다.
한신이 아직도 함양에 건재(健在)한데다가, 그들은 막강한 병력과 풍부한 군량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이번 패전의 설욕(雪辱)을 하려고 반드시 반격을 가해 올 것이옵니다.
우리는 그 점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소리 내어 비웃는다.
"한신의 재주는 내가 잘 알고 있소. 한신 따위가 무엇이 두려워 아부는 한신에게 항상 겁을 내시오.
만약 한신이 지략에 능한 자 였다면 한왕을 팽성으로 보내 실패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오."
"....."
범증은 항우에게 아무리 충고를 해보아도 본전도 못 찾게 되자 아에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마침, 시종이 들어와 고한다.
"일찍이 한나라에 귀순해 갔던 사마흔과 동예가 한왕의 부모와 처를 볼모로 잡아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사옵니다."하는 것이었다.
"뭐야 ?
나를 배반했던 사마흔과 동예가 다시 돌아왔다고 .... ?
그자들을 당장 이 자리에 불러들여라."
사마흔과 동예가 어전으로 끌려 나오자, 항우는 그들의 죄상을 사정없이 질책한다.
"나는 너희들을 삼진왕에 봉하여 충성할 기회를 주었건만,
네놈들은 나를 배반하고 유방에게 투항하여 삼진을 빼앗겨버렸으니,
그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들이 비록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절개를 모르는 네놈들을 어떻게 살려 둘 수 있을 것이냐. ...
여봐라 ! 저놈들을 당장 원문 밖으로 끌어내어 목을 베어 버려라."
명령 일하,사마흔과 동예는 주변없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다가 결국은 우직하기만 할 뿐,
용서할 줄을 모르는 항우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 버리고 말았다.
항우는 사마흔과 동예의 처형을 명령하고 나서, 시종을 돌아보며 명한다.
"사마흔과 동예가 유방의 가족들을 붙잡아 왔다니 유방의 애비를 이 자리에 끌어오너라."
태공은 결박을 당하고 항우 앞으로 끌려 나오자,
항우는 불호령을 내리듯 태공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네놈의 아들 유방은
사상(泗上)의 정장(亭長 : 요즘으로 치면 洞長)에 불과했던 것을 내가 한왕으로 치켜올려 주지 않았더냐 ?
네 아들 유방이 이런 은혜를 모르고 내 영토를 침범해 왔으니, 이는 용서 못 할 반역 행위이다.
자고로 반역자의 가족은 구족(九族)을 멸하는 법이니, 너는 마땅히 참형에 처해 질 것이로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호통을 질러대었다.
그러나 늙은 태공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 처럼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위처럼 조용히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항우는 태공의 의연한 태도가 더욱 비위에 거슬려,
"저 늙은 것을 당장 끌어내어 참형에 처하라 ! "하고 벼락같은 호령을 내렸다.
태공이 무참하게 끌려 나가자,
범증이 머리를 조아리며 항왕에게 간한다.
"한왕이 비록 참패했다고는 하오나, 함양에는 한신이 거느리고 있는 막강한 대군이 아직도 있사옵니다.
우리가 태공과 여 왕후를 볼모로 붙잡아 두고 있으면,
저들은 공격을 해오더라도 최후까지 덤벼 오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들을 일단 죽여 버리고 나면 적은 원한이 골수에 맺혀서 끝까지 덤벼 올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유방의 부모와 처는 죽이지않으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도 그 말에는 수긍이 가는 바가 있는지,
"그러면 유방의 부모와 처를 옥에 가두고, 우자기 장군의 책임하에 감시를 엄하게 하시오.
그리고 나는 이쪽 일이 일단락 되었으니,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봐야 하겠소."
하고 제나라를 향하여 떠나갔다.
한편, 제왕 전광(齊王 田廣)은 초군 대장 용저와 종이매에게 포위되어, 식량 부족으로 심한 곤경을 겪던 차에,
항우조차 팽성을 탈환하고 합세하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초패왕의 위세는 더 한층 고조되었고 군사들의 사기 또한 이를 데 없이 양양하였다.
팽성에서 대패한 한왕은 영양성에 머무르면서
각지에서 몰려오는 패잔병을 규합하여 어느 정도의 전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왕은 장량을 불러 상의한다.
"우리의 병력이 이제 어느 정도 복구되기는 했지만, 실전을 지휘할 최고 사령관이 없는 것이 걱정입니다.
한신을 대원수로 다시 임명하고 싶지만,
그는 해임당한 데 불만을 품었는지, 내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도와주려고 달려오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선생께서 좋은 지혜를 알려 주소서."
한왕의 말은 간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량은 머리를 조아리며 한왕에게 아뢴다.
"한신 장군은 어디까지나 대왕 전하의 신하이옵니다.
그러므로 한신 장군은 마땅히 대왕을 찾아 뵈러 여기까지 와야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군신지의(君臣之義)로 보아서는 마땅히 그래야만 옳을 줄로 나도 생각하오.
그러나 한신 장군은 여태까지 나를 찾아오기는커녕 아무 소식도 없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느냐 말씀이오 ?"
"그 문제는 제가 한신 장군을 직접 찾아가서 원만하게 해결하도록 하겠으니, 대왕께서는 조금도 염려치 마소서.
그보다도 신에게는 다른 걱정이 하나 있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묻는다.
"선생께서 걱정이 있으시다뇨 ?
무슨 일이옵니까 ?"
장량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지금 천하에는 한신 장군 외에도 두 명의 명장이 또 있사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아직도 그들을 못 알아보고 계시니 신으로서는 오히려 그 일이 크게 걱정되옵니다."
"옛 ? 천하에 한신 장군과 같은 명장이 두 사람 더 있다구요 ?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이름을 말씀해 주소서."
"한 사람은 영포(英布) 장군이옵고, 다른 한 사람은 팽월(彭越) 장군입니다.
만약 그 두 사람을 데려다가 한신 장군과 합세하여 세 사람이 도모한다면,
천하를 얻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팽월 장군은 이미 우리와 내통(內通)이 되어 있으니까 언제든지 불러 올 수 있지만,
영포 장군은 옛날부터 항우의 심복지장(心腹之將)이 아니오 ?
항우의 심복을 우리가 어떻게 유인해 올 수 있겠소 ?"
"신이 보기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아니하옵니다."
"어떤 점으로 보아 그렇지 않다는 말씀인지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소서."
그러자 장량은 조용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한다.
'영포 장군이 오래 전부터 항왕을 꾸준히 섬겨 오고 있음은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영포가 항왕의 명령을 받고 태공과 여 왕후를 탈환해 가려다가 실패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항왕은 영포 장군을 개 돼지처럼 무지막지하게 매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일이 있고 나자 영포는 항우에게 원한을 품고 지금은 구강(九江)으로 물러가,
마음속으로 항우와 결별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유능한 세객(說客)을 보내,
이해(利害)로써 설득만 잘하면 영포를 충분히 유인해 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장량은 그야말로 천하의 정세뿐만이 아니라
남의 마음속 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한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러면 누구를 세객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금 육안(六安)에 수하(隨何)라는 현인이 살고 있사온데,
영포를 설득할 사람은 오직 수하가 있을 뿐이옵니다.
대왕께서는 그를 초청하시어 그 일을 간곡히 부탁해 보시옵소서."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다시 기뻐하며,
"수하라는 현이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가 그렇게나 유능한 세객인 줄은 몰랐소이다.
그러면 선생의 말씀대로 그 분을 초청하여 부탁을 해보겠소이다."
한왕이 수하를 초청하여 간곡히 부탁하니, 수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대왕 전하께서 분부하시는 일이니 소생이 전력을 기울여 노력해 보겠사옵니다."
그리고 수하는 영포가 있는 구강에 도착하자 즉시 사람을 내세워,
"육안에 살고 있는 야인(野人) 수하가 영포 장군의 위명(威名)을 사모하여,
배안(拜顔)의 영광을 가지고자 찾아왔사옵니다."하며 영포에게 면회를 신청하였다.
영포는 수하의 면회 요청을 받고, 모사 비혁(費赫)을 불러 물었다.
"육안에 살고 있는 수하라는 현인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는데,
그가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 하는 것같소 ?"
그러자 비혁이 오랫동안 심사 묵고하다가 말한다.
"수하는 한왕의 부탁을 받고 주공을 만나러 왔을 것이옵니다."
"한왕의 부탁을 ?
한왕이 무슨 일로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왔다는 말이오 ?"
"한왕은 팽성에서 대패하고 나자, 항왕에게 설욕을 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항왕을 당해 낼 사람이 없기 때문에 수하를 보내어 주공을 설득하려고 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왕이 항왕을 치기 위해 나를 설득하려 한다구 ...?
한왕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수하라는 사람을 보냈다면 그 사람을 한번 만나 보는 것도 좋을것 같구려."
영포는 대번에 호응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비혁이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주공께서 한왕의 요청에 응하실 생각이 계시더라도, 수하를 호락호락 만나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지금은 몸이 불편하시니 후일에 다시 찾아오라고 면회를 거절해 버리십시오.
그러면 수하는 그냥 돌아가지 아니하고 반드시 나를 찾아오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면 제가 수하를 먼저 만나서 주공에게 유리하도록 의견을 조정하겠습니다."
영포는 비혁의 충고를 옳게 여기고 수하의 면회를 거절해 버렸다.
그러나 면담을 거절당했다고 그냥 돌아와 버릴 수하는 아니었다.
(멀쩡한 영포가 신병을 핑계로 면회를 거절한 것은 누군가 배후에서 조정을 하는 것이 틀림 없는 것 같은데,
그 인물이 과연 누구일까 ?)
수하는 영포를 조종한 배후의 인물을 여러 방면으로 조사한 결과,
마침내 모사 비혁이 배후의 인물임을 알아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비혁에게 면담을 신청하였다.
비혁은 수하가 찾아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수하를 정중히 맞아들였다.
그리고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물어 보았다.
"귀공은 누구이신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
수하가 대답한다.
"저는 여기서 멀지 않은 <육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옵고 이름은 <수하>라고 하옵니다.
지금은 한왕이 머물러 계시는 영양성 내에 살고 있사온데, 그동안 전쟁 때문에 고향에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가,
시국이 안정되었기에 조상들의 성묘를 하려고 고향에 들른 것이옵니다."
"성묘를 오셨다는 분이 나는 왜 찾아오셨소 ?"
"저는 평소부터 영포 장군의 위덕(威德)을 무척 흠모하고 있었기에
고향에 왔던 길에 영포 장군을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군께 면회를 신청하였으나, 장군이 신병중이라고 하면서 만나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선생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면회를 거절당했으면 그냥 돌아갈 일이지,
나까지 찾아오실 이유라도 있었다는 말씀이오 ?"
"처음에는 그냥 돌아가 버릴 생각이었으나,
영포 장군이 면회를 거절하신 이유가 혹시나 나를 한왕이 보낸 세객으로 오해하신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와 같은 오해를 풀기 위해 선생을 찾아온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선생은 영포 장군께서 그런 오해를 품지 않으시도록 부탁드리옵니다."
"알겠소이다.
그런 부탁이라면 내가 주공에게 잘 말씀드려 오해를 안 하시도록 하겠소이다."
이렇게, 수하는 자신의 정체를 일단 숨겨 놓고 나서,
이번에는 혼자말 비슷하게 개탄하는 말을 하였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씀인데,
저는 이번에 영포 장군을 만나 뵈러 왔다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비혁은 그 말을 듣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라며 반문하였다.
"주공에 대해 실망을 하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어떤 점에서 실망을 하셨다는 말씀이오 ?"
수하가 조용히 대답한다.
"저는 지금까지 영포 장군이라면 구강의 진수(鎭守)로서,
각지에 숨어 있는 현사(賢士)들을 널리 모아들이는 훌륭한 어른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영포 장군을 만나 뵈러 와 보니, 장군은 엉뚱한 의심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만나 주지도 않으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떤 현사들이 영포 장군의 휘하로 모여들겠습니까.
매우 외람된 말씀이나 영포 장군이 그런 태도를 취하시게 된 데는
선생 같은 분이 보필을 잘못하신 때문이 아닙니까 ?"
수하는 비혁의 보필이 잘못되었음을 정면으로 꼬집고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혁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비혁은 얼굴을 붉히면서 수하를 나무란다.
"에이, 여보시오.
내가 무슨 보필을 잘못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오 ? "
그러나 수하는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자고로 영주(英主)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참모들이 보필을 잘 하고 못 하기에 달려 있는 법이오.
내 비록 보잘것 없는 인물이긴 하지만,
영포 장군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찾아 온 사람에게 면회를 거절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요 ?
만약 영포 장군에게 똑똑한 참모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니 나는 영포 장군을 만나러 왔다가 환멸의 비애만 느끼고 돌아가게 생겼소."
이런 말을 끝으로 수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고 하자,
비혁이 수하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내가 주공께 여쭈어 선생을 꼭 만나 뵙도록 해드리겠소이다."
수하의 면담을 거절하도록 부추킨 장본인이 자신이었기에,
비혁은 주공의 명예를 훼손한 불찰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렇게 수하는 비혁의 알선으로 다음날 아침에 영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영포는 비혁을 통하여 수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는지라 수하를 정중히 맞으며 묻는다.
"선생은 지금 한왕이 주둔하고 있는 영양성 내에 살고 계시다고 들었소.
그게 사실입니까 ?"
"예,
사실이옵니다."
"그렇다면 한왕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실 터인데,
한왕이 지난번 팽성 공략 때에는 어찌하여
한신 장군을 기용하지 않았다가 참패를 면치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아시오 ?
그리고 또 한왕이 지금 영양성에 주둔하면서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오 ?"
영포는 한나라의 사정을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수하는 시치미를 떼고 대답한다.
저는 그 방면의 일은 잘 모르기는 하옵니다만, 한왕께서 지난번에 <의제의 발상>을 선포하자, 모
든 후백들은 항우에게 격분하여 모두들 초나라를 치는 데 적극 협력하겠다고 맹세했었습니다.
그래서 한신 장군에게는 함양을 지키게 하고, 한왕 자신이 직접 정도에 올랐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막상 싸움이 막 시작될 무렵에 난데없는 <모함 사건>이 생겨서
한왕이 그 때문에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옵니다."
"모함 사건이라뇨 ?
그게 무슨 말씀이오 ?"
"그것은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이 아닌 영포 장군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모함이었습니다."
수하의 말에 영포는 별안간 눈을 크게 뜨며,
"나의 명예를 땅에 떨어드리는 모함이라뇨 ?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구려. 궁금해 견딜 수가 없으니 좀더 소상하게 말씀해 주시오."
영포는 수하에게 성화같은 재촉을 했다.
수하는 영포가 자신의 말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수하는 짐짓 분개하는 빛을 보이며 영포에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초패왕이 의제를 시해한 죄로 변방 제후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자,
<역적>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의제를 시해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구강왕 영포 장군이었다>라고
엉뚱한 모함을 퍼뜨렸던 것이옵니다."
영포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뛸 듯이 분노하며,
"뭐요 ?
의제를 시해한 사람이 항우가 아니고 나였다구요 ?"하고 다급하게 반문했다.
수하가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항우는 의제 시해의 책임을 장군에게 뒤집어 씌웠지만 그 효과는 놀랄만큼 지대했습니다.
한왕이 전쟁에 대패한 원인도 그런 모함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
한왕의 패배가 어째서 내게 대한 모함때문이었다는 말씀이오 ?"
"생각해 보십시오.
의제를 시해한 대역 죄인이 항우인 줄로 알고, 변방 제후들이 한왕과 힘을 합해 항우를 쳐부술 계획이었는데,
<의제를 시해한 사람은 항우가 아니고 구강왕 영포 장군이었다>고 모략하는 바람에,
변방 제후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돌변하여 한왕과의 협동 작전에 모두들 발을 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려니 한왕은 대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과적으로 영포 장군은 항우의 모함으로 대역 죄인의 누명을 뒤집어 썼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한왕까지 대패하게 만든 셈입니다.
그것은 영명하신 장군으로서는 결코 묵고할 수 없는 중대사입니다."
수하의 말을 듣자 영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자말로 투덜거렸다.
"음 .... 나에게 의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놈은 분명히 항우였었다.
그런데 그자가 이제 와서는 모든 죄를 나에게 뒤집어 씌워 나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
그자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자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그러자 수하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으며 만류한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이 사실이 항우에게 알려지면, 그는 장군을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 말에 영포는 화를 발칵 낸다.
"귀공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지난 날 진황 자영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도 항우였고,
시황제의 여산릉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령한 사람도 항우였고,
구강에서 의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나에게 내린 사람 역시 틀림없는 항우였었소.
이렇게 나는 항우에게 충성을 다하느라고 차마 못할 일을 모두 감행했는데,
항우는 나를 써먹을 대로 다 써먹고 나서,
이제 와서는 상을 주지는 못하나마 모함으로 나를 매장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내 어찌 그런 자를 그냥 내 버려둘 수있겠소 ?"
수하의 술책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적이어서 영포는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었다.
수하는 영포의 감정에 충격을 주기 위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장군께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의제를 시해한 대역 죄인>이라는 오명만은 깨끗이 씻어 버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군의 오명은 천추에 길이 남게 됩니다.
영포는 생각할 수록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가슴을 두드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항우란 놈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오.
두고 보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우를 죽여 없애고야 말 것이오."
수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말한다.
"항우는 워낙 용맹하기 때문에 그를 죽여 없애기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설사 항우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오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명을 깨끗이 벗어나시려면 방법을 달리 하셔야 합니다."
"의제 살해의 누명을 깨끗이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고요 ?
그것이 무엇이오 ?
선생이 방법을 알고 계시는 모양인데, 어서 내게 말씀 좀 해주시오."
영포는 수하에게 바짝 다가서며 대답을 재촉하였다.
그러자 수하는 깊이 생각해 보는 태도를 보이다가 머리를 조용히 들며 말한다.
"누명을 깨끗이 벗으려면, 한왕과 손을 잡고 항우를 공동으로 쳐부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왕은 <대역 죄인 항우를 섬멸하겠다>는 깃발을 뚜렸하게 내걸고 있으니까,
한왕과 한 패가 되어 항우와 싸우면 대역 죄인의 오명은 절로 벗겨지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
영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나 한왕이 나하고 손을 잡으려고 할까요 ?"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들어 아시겠지만, 한왕은 도량이 크셔서 어떤 사람이 귀순해 와도 반갑게 맞으실 분입니다.
더구나 한왕은 평소에도 장군을 각별히 흠모해 오셨기 때문에 장군께서 찾아가시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말로 나를 반갑게 대해 줄까요 .... ? "
"지금까지 직접 전투의 상대가 항복이나 귀순을 했어도 그들 모두를 반갑게 맞아 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도 결심이 서신다면 제가 한왕께 장군의 뜻을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귀공이 나의 뜻을 한왕께 꼭 좀 전해 주시오.
나는 한왕을 도와서 항우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
이렇게 영포가 한왕에게 귀순할 결심을 굳혔을 바로 그떼,
항우로 부터 뜻하지 앟은 조서(詔書)가 날아왔다. 항우가 보낸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구강왕 영포 장군은 보시오.
장군은 근자에는 일신상의 안일만 도모하면서, 내가 제나라를 치는 데도 지원병을 보내 주지도 않았고,
유방이 팽성을 점령하여 전투를 치룰 때에도 출병을 하지 않았으니 그 무슨 심사요.
그대는 자신의 무용(武勇)만 믿고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지키지 않으니, 이는 분명히 반역 행위요.
나는 이제부터 모든 군사들을 규합하여 유방을 처없앨 생각이니, 이번에는 지원병을 보내도록 하시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니 각별히 유의하시오.
그야말로 오만스럽기 짝없는 으름장이었다.
영포는 항우의 조서를 읽어 보고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즉석에서 조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울부짖듯 외쳤다.
"나를 대역 죄인으로 몰아버린 자가 무슨 낮짝으로 이런 으름장을 놓는단 말인가 ....
여봐라 ! 이 조서를 가지고 온 자를 당장에 능지 처참시켜라."
항우의 조서를 가지고 온 자를 극형에 처하라는 엄명을 내린 영포는 모사 비혁을 불러 부탁한다.
"나는 이제부터 수하 선생과 함께 영양성으로 가서, 한왕에게 귀순할 생각이오.
공은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수일 안으로 영양성으로 오도록 하오."
결국 항우의 조서는 영포의 귀순을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영포는 수하와 함께 영양성으로 한왕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한왕은 영포가 귀순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밖까지 몸소 마중을 나와 주었다.
"용명(勇名)을 천하에 떨치는 영포 장군께서 나를 찾아와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려.
오늘의 이 우정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두 사람이 함께 대전(大殿)으로 올라오니,
그 자리에는 장량, 진평 같은 중신들이 영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포는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잠시후에 벌어진 환영연에 자리를 함께 하였다.
영포가 환영연에 참석한 중신의 면면을 살펴 보면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명을 받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중신과 대부들 간에 웃으며 주고 받는 대화가 마치 친구처럼 화기 애애한 것 이었다.
(한왕이 인후하신 군주임은 진작부터 들어왔지만,
군신지간에도 이렇게 다정 다감하고 화기 애애할 줄은 정말 몰랐구나.
과연 한왕이 이런 성군이라면 누가 한왕을 위해 목숨을 아낄 것인가 ! )
...
영포는 귀순해 온 것이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한왕에게 새삼스럽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은 구강성에 3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사온데,
모든 군사를 오늘로서 대왕 전하께 바치고, 대왕을 측근에서 모시고 싶사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구강성의 성주를 친히 임명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그러면 팽월 장군을 구강 성주로 임명하여, 초나라 군사들의 군량 수송로를 막아내도록 합시다."
한편, 항우는 영포가 한왕에게 귀순한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하며
당장 군사를 일으켜 구강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자 군사 범증이 간한다.
"영포쯤 배반했기로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옵니다.
우리가 힘을 길러 삼진을 탈환한 뒤에 함양까지 밀고 올라가면 한왕과 한신인들 어쩔 것이옵니까 ?
함양만 점령하고 나면 제후들은 절로 머리를 숙이고 모여 오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그도 그럴 성싶어 그의 말을 쫒기로 하였다.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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