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거경대학에서 의촌 번남댁을 다녀와서

오토산 2020. 5.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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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대학에서 의촌 번남댁을 다녀와서

 

부라원루를 답사하고 나서 부포에서 고개를 넘어 의촌에 있는 번남댁을 찾아갔다.

의촌앞 낙동강변에는 매년 봄 청보리축제가 열렸으나 금년에는 청보리축제가 취소되고

가마득히 펼쳐진 보리밭에 파란 보리들이 한들거리며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마을 좌측에 자리한 번남댁(樊南宅)에는 이동익 주손을

비롯한 문중관계자분들이 안내를 했다. 

 

번남댁(樊南宅)은 순조때 지어진 广 李同淳(1779~1860)의 고택으로 삼척부사를 지낸

치옹 이휘부가 선친을 위해 건립하였고 대원군집정을 지낸 번엄의 손자 左山 李晩胤이

1875년(철종 8) 서울의 창덕궁을 모방해 99칸을 지었으나 6.25전란으로 일부가 없어지고

'ㅁ'자 본채와 'ㅁ'자 사랑채, 본채와 사랑채 사이에 행랑채를 포함하여 72칸 정도가

남아있으며 3대이상의 대가족이 거주할수 있도록 배치와 구조가 특이해

좋은 연구자료가 된다고 한다.

 

번엄(广)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은 퇴계선생의 9세손으로 둘째손자 이순도의 후손이며

참판 이귀천의 아들로 1807년(순조 7)에 문과급제를 하고 1815년 시강원설서, 병조좌랑,

사헌부자평 등을 거쳐 1841년 한성좌윤, 1844년 병조참판, 1845년 호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858년(철종 9)에 가의대부, 이듬해 동지춘추관사를 역임하였다. 

번엄의 아들은 치옹 이휘부이며 치옹의 아들 좌산 이만윤은

186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번남댁을 중건하고 삼호당(三乎堂)이라 불렀다.

 

좌산 이만윤은 三乎堂기문을 지었으며 기문글씨는 아들 이중태가 썼다고 하며

'삼호'란 논어 학이편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남을 위해 일을 계획하되 불충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교제함에 신의를 잃은바 없었는가.

전수 받은바를 익히지 않은바는 없는가'에서 취한것이며

사랑채에는 대원군의 친필인 '左山'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번남댁의 마루에서 이동익 주손으로부터 집안의 유래에 대하여설명을 들었다.

대원군이 5대조와 함께 일주일을  이 곳에서 기거하시며 현판 3점과 병풍을 남겼고

4대가 대과급제를 하여온 가문으로 지금은 문적들과 함께 국학진흥원에 보관중이며 

번암댁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서 멸실된 사랑채와 별당들도 복권할 계획이며

집의 위치가 멀리 청량산이 보이고 앞에 낙동강이 흐르는 좋은 곳이라 하였다.

 

번남댁의 답사를 마치고 이동익 주손을 우리들에게

우측편에 수월헌 이집(1672~1746)의 정자인 강정(江亭)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수월헌은 퇴계의 현손 교관 영철의 아들로 재취부인 안동권씨의 3남1녀중 막내아들이며

사냥중 우연히 꿩을 숨겨준 연연으로 권씨와 재혼하였으며 어머니 음덕으로

수월헌은 풍천임씨와 결혼하여 8남2녀를 얻어 번성하였고 어머니묘소도 꿩이 잡아준 명당터라

후손들은 꿩을 잡지 않는다고 하며 관리가 허술하여 일부건물은 훼손되어 가는것이 아쉬웠다.

 

우리는 번남댁과 강정을 돌아보고 친절한 안내를 하여주신 이동익 주손에게 감사를 드리고

안동시청 앞으로 돌아와서 해산하였다. 

오늘 하루를 함께 하여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전임강사님들과 수련원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안전운행을 하신 사장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답사중에 만난 앙증스런 우편배달차~~

답사중에 만난 앙증스런 진가차(우편배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