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거경대학에서 성성재종택과 부라원루를 다녀와서

오토산 2020. 5. 29. 00:14

 

사진이 잘 보이지 않으시면 아래주소로 확인해주세요

blog.daum.net/uh512/13003

 

 

거경대학에서 성성재종택과 부라원루를 다녀와서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답사로

주진교를 건너 부포리 성성재종택에 도착을 하였다.

 

부포리(浮浦里)는 고려중기 부라원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부르기도 하고

1,000호의 큰 동네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생계가 부유해서 수(壽)를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불릴 만큼 장수마을 이었고

호소골은 옛날 호랑이가 나와서 때때로 울었다고 하여 호소곡이라 불렀다는 설과

마을입구에 맹호동이 있어   호소곡이라 불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성성재종택(惺惺齋宗宅)은 조선중기 학자인 성성재 금난수 선생의 가옥으로 안방과 부엌,

고방의 상부까지 통칸으로 상부에 다락을 창을 달아 채광과 환기를 좋게하여 18세기 상류가옥의

시대성과 지역성이 잘 드러난 집이며 퇴계선생이 손수 현판과 팔영시를 써 주었다고 전한다.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는 퇴계 선생의 제자로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1577년(선조 10) 제릉의 참봉을 비롯하여 집경전과 경릉의 참봉을 지내고

1585년 장흥고봉사가 되고 그 뒤 직장, 장례원사평을 지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 봉양을 위해 고향에 은거하다가 정유재란때 의병을 일으켰고 1599년 봉화현감에 임명되어

1년만에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왔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성성재 종택에서는 33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귀향하여 생활하시는 14세손 금창업님이

우리를 안내하시며 화재로 소실되어 복원한 현재 종택이 자리한 위치는 동계서원이 있던 곳이며

종손분은 서울에 계신다며 집안의 유래에 대하여 설명과 안내를 하여 주었다.

상세한 안내를 하여주신 분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는 부라원루를 찾아갔다.

 

부라원루(浮羅院樓)는 고랴후기부터 조선말기까지 시행해온 역원(驛院)제도에 따라 예안현에

설치되었던 부라원역의 누각으로 다른 건물도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누각만 남아 있으며

안동부내에 27개 원이 있었으나 모두 소멸되고 당시의 누각이 남아 있는 곳은 이 곳이유일하며

건립연대는 알수 없으나 현판이 한호의 글씨인 것으로 보아 1600년 전후로 추측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건물로 윗부분은 대청이고 주위에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동신 전임강사는 원(院)은 대개 역과 역 사이에 자리 하였하고 공무로 출장한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장소로 파발마가 지나면 요즘의 구급차에게 길을 피하 듯 길을 피하였으며

파발마가 등에 메고 다니는 문서통이 유세통이었다는 설명을 하였다.

우리는 부라원 답사를 마치고 의인에 있는 번남댁을 찾아갔다.

 

 

성성재 마루 밑에서 물도 했볕도 없이 자라나는 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