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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대학에서 월천서당을 다녀와서
5월 28일 09:00 안동시청 앞에서 도산선비문화수련원 거경대학 회원 70명이
월천서당과 성성재종택, 부라원루, 번남댁을 답사를 떠났다.
안동을 출발하여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과 컨벤션센타 공사중인 부분을 지나서
동부리 다래마을에 있는 월천서당을 찾았다.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월천 조목 선생이 1539년(중종 34)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수학하던 곳으로 중앙에 마루 2칸을 두고 좌,우에 통간방(通間房)을 배치한 홑처마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이 썼다고 전한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은 퇴계선생의 제자로 1552년(명종 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선생은 진작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45차례에 걸쳐 배명(拜命)이 내렸으나 대부분 나가지 않아 40년 동안 봉직기간이 4년 남짓하고
임진왜란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동생과 두 아들과 더불어 망우당 곽재우와 합세하여 국난극복에
앞장섰으며 퇴계선생의 제자중에서 유일하게 1615년(광해군 7) 도산서원 상덕사에 종향되었다.
월천서당에 도착을 하니 횡성조씨 문중에서 오신 조진극씨 등 두 분이 우리들을 안내를 하시며
횡성에서 사시던 월천선생의 5대조가 문경으로 낙남하였고 조부가 예천 금당실로 이거 하였다가
월천선생의 어른(참판 趙大春)이 1488년 權受益의 사위가 되면서 다래마을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마지막 한집이 금년에 이주를 한다고 회고하며
좌측기슭에 이건된 겸재정(謙齋亭)은 월천선생의 동생 조정(趙禎 1551~1663)이
본인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라는 설명 등 문중의 유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여 주셨다.
우리는 친절히 안내 하여주신 두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수련원으로 갔다.
선비문화수련원 제2원사에 도착을 하니 김종길 원장님이 우리를 친절히 맞아 주셨다.
우리는 강의실에서 상읍례를 하고 도산십이곡을 제창하였으며
이어서 원장님은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시며
유교문화에 바탕을 둔 선비정신으로 이끌어 온 조선왕조는 당시 세계적 유래가 드문 역사이며
현조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의 모임이 문중이라 하고 지역의 문중의 연합체가 유림이라 하며
서원은 사설교육기관으로 존현양사의 기능을 수행했고 퇴계선생은 34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도덕성 부재로 물질문명과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지면서 유교문화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나
코로나19를 격으면서 우리국민들이 보여 준 의료진들과 배달원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생필품사재기가 없이 극복하여 가는 국민들을 보면서 우리의 선비정신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선비정신 가운데 실천 할 수 있는 한 것을 가정과 사회에서 실천하여 가자고 하였다.
특강이 끝나고 권갑현 교수님이 성학십도(경제잠도)에 대한 경전 강의을 하고
경제잠 해설을 우리의 동요곡(퐁당퐁당)으로 함께 부르며 오전 일과를 마치고
수련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부포로 현장답사를 떠났다.
특강을 하여주신 원장님과 경재잠을 부르기 쉬운 동요곡으로 알려주신
권교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함께 하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조선의 500년 역사를 지켜온 선비정신은
존현양사와 봉제사 접빈객, 향약으로 지역사회를 교화하였고
수차례 사화를 격으며 선비정신으로 역사를 바로 세워왔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경술국치 때 의병활동으로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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