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 (102)
왕릉 장군의 어머니.
초패왕 항우가 팽성에 머무르고 있는 어느 날,
첩자가 달려와 항우에게 급히 아뢴다.
"폐하 ! 지금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쳐들어가 위왕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묻는다.
"뭐야 ? 한신이 위나라에 가 있다고 ?
그러면 영양성은 지금 비어 있을 것이 아니냐 ?"
영양성을 쳐들어갈 기회는 바로 이때다 싶어 항우는 즉석에서 범증을 불렀다.
"한신이 위나라로 원정을 갔다니, 우리는 이 기회에 영양성으로 쳐들어가 유방을 생포해 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
범증은 신중히 생각하며 대답한다.
"우리가 신속히 손을 쓴다면 유방을 생포하기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옵니다.
그러나 한신은 워낙 용의 주도한 인물이기 때문에, 원정을 떠나기 전에 대책을 세워 놓았을 것이 분명하므로,
어디까지나 신중을 기하셔야 하옵니다."
그러자 대장 용저(龍沮)가 말한다.
"주상께서 직접 출정하신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다고 아부께서는 그런 걱정을 하시옵니까 ?"
그러나 범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일을 도모할 때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여야 하는 법이오."
항우는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차 없다는 듯이, 대장 이봉선(李奉仙)에게 3천 군사를 주어 선봉 부대로 삼고,
자기 자신은 후진이 되어 영양성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한왕은 항우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한신 장군이 없는 틈을 타서 항우가 우리에게 쳐들어 온다는데,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이까 ?"
장량이 대답한다.
"한신 장군이 떠나기 전에 말한 대로,
왕릉 장군으로 하여금 막아 내게 하면 될 것이옵니다."
한왕은 왕릉을 급히 불러 군령을 내린다.
"지금 초패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으니,
장군이 급히 나가 저들을 막아 주시오."
왕릉은 주저하는 빛을 보이며 한왕에게 아뢴다.
"초패왕의 군세가 워낙 막강하여 무력으로 저들과 맞서게 되면 우리쪽의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오니,
정면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저들이 쉽게 접근해 올 수 없도록 개울을 깊게 파놓고 시간을 끌면서 비책을 쓰게되면,
저들은 도망을 가게 될 것이옵니다."
"비책이란 어떤 계략을 말하는 것이오 ?"
"비밀이 누설되면 안 되므로 대왕 전하께만 아뢰옵겠사옵니다."
그리고 왕릉은 한왕의 귓전에 입을 갖다 대고 무엇인가 비밀을 속삭였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왕릉에게 말했다.
"장군이 그런 비책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소.
그러면 진평을 군사로 임명할 테니, 크게 승리를 거두어 주기 바라오."
한편, 초군 선봉장 이봉선은 3천 군사를 몰고 영양성으로 먼저 달려왔으나,
성은 사대문이 굳게 닫힌 채 적은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고,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웬일일까 ?)
선봉장 이봉선이 항우에게 아뢴다.
"폐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적은 모두 겁에 질려 도망을 쳐버린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항우가 신중을 기하며 말한다.
"우리가 먼 길을 오느라고 모두들 지쳐 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적정(敵情)을 정확하게 파악한 뒤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자."
이리하여 초군은 저마다 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왕릉은 그날 밤 먼 길을 달려 온 적들이 피곤에 지쳐 잠들기를 기다려
동서 남북 사방에 마른 풀을 여러 군데 쌓아 놓고, 한밤중에 야습을 감행할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5백 명의 돌격대에게는 머리에 붉은 두건을 씌우고, 옷도 붉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손에는 횃불과 단도 하나씩을 가지고 있게 하였다.
그야말로 <붉은 도깨비>의 형상을 갖추도록 시킨 것이었다.
이런 태세가 갖춰지자, 이번에는 대장 하후영에게 군령을 내린다.
"잠시 후에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오르면 우리의 <붉은 도깨비 부대>는 적진 속으로 총돌격을 감행할 것이오.
그러면 적들은 처음 보게되는 <붉은 도깨비>의 내습에 크게 당황하여 모두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니,
하후영 장군은 그때를 놓치지 말고 3만 군사로써 도망하는 적들을 모두 베어 버리시오."
초나라 군사들은 이같이 무시무시한 야습이 준비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모두들 정신없이 잠에 떨어져 있었다.
잠시 후,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 오름과 동시에, 손에 손에 횃불을 밝혀든 5백여 명의 <붉은 도깨비 부대>가
괴성과 함께 진고를 울리며 초군 진지의 한복판으로 밀려 들어가니,
잠 속에 빠져 있었던 초병들이 혼비 백산하여 도망을 치기 바빴다.
"이게 웬 난데없는 날도깨비들이냐 ? "
붉은 도개비에 놀란 초군이 정신없이 도망을 치며 그런 소리를 외쳤는데,
실상 도깨비 부대는 5백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초군 병사들의 눈에는
1만이 넘어 보이는 무시무시한 대부대였다.
초병들이 어둠 속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후영의 부대가 도망가는 초병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장검으로 베어 죽여서, 들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붉은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중군(中軍)에서 자고 있던 항우가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무장을 갖추고 달려와 보니,
한 사람의 적장이 도깨비 부대의 선두에서 종횡 무진하며 아군 병사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항우는 크게 분노하여 장검을 휘두르며 적장을 향하여 비호같이 달려갔다.
"이놈아 !
싸우려거든 어디 나에게 덤벼 보거라 ! "
항우는 적장을 한칼에 찔러 죽일 요량으로 고함을 지르며 번개처럼 돌진해 갔다.
그러나 적장은 항우가 생각한 것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적장은 번개처럼 덤벼오는 항우의 공격을 옆으로 살짝 비키더니 오히려 반격을 가해 오는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은 정면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장수들은 항우 앞에서는 독수리에게 쫒기는 병아리처럼 맥을 못 춘다.
그러나 지금 항우와 겨루고 있는 적장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항우가 아무리 질풍같이 덤벼도 <붉은 도개비 부대의 대장>은 그때마다
몸을 가볍게 피하면서 날카롭게 반격을 가해 오곤 하였다.
항우는 약이 오를대로 올라, 이번에는 장여(丈餘)의 철퇴(鐵槌)를 바람개비 처럼 휘둘러댔다.
아무려니 <도깨비 대장>도 그것만은 당해 낼 수가 없었던지, 그제서야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항우는 위신이 손상된 것에 크게 분노하여,
적장을 얼마간 쫒아 가다가 추격을 멈추고 부하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나에게 덤벼들다가 도망간 적장은 도대체 어떤 놈이냐 ?"
부하가 대답한다.
"그는 다름 아닌 한장(漢將) 왕릉(王陵)이옵니다."
"뭐야 ?
그자가 바로 내가 평소부터 유인해 오고 싶어했던 왕릉이란 말이냐 ?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쫒아가서 그자를 붙잡아 와야만 하겠다."
항우는 진작부터 왕릉의 고명을 들었던 터인지라, 그를 자기 부하로 삼고 싶어 했었다.
그리하여 지금이라도 왕릉을 붙잡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계포,종이매,용저등 모든 장수들이 앞을 가로 막으며 만류한다.
"폐하 !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폐하께서 직접 잡아오지 않으셔도 왕릉을 제발로 걸어오게 할 수있는 좋은 방법이 있사옵니다."
"어떤 계략인지, 어서 말해 보아라."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왕릉의 어머니를 볼모로 잡아 두고 있사옵니다.
왕릉은 누구보다더 효성이 극진한 사람이오니, 왕릉의 어머니를 이 자리에 끌어다 놓고 죽이려고 하면,
왕릉은 꼼짝없이 제발로 달려오게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왕릉을 붙잡아 두게 되면 영양성도 우리 손에 쉽게 함락시킬 수 있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계략을 듣고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과연 명안 중의 명안이로다.
그러면 사람을 급히 보내어 왕릉의 어미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
항우의 명령에 의하여 왕릉의 어머니를 데려오려고 비마가 팽성으로 급히 달려갔다.
한편, 왕릉이 <도깨비 부대>의 야습으로 커다란 전과를 올리고 돌아오니,
한왕은 원문까지 마중을 나와 왕릉의 손을 잡으며 치하한다.
"장군은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격파했으니,
그 전공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간밤에 전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오나,
항우가 아직 물러간 것은 아니오니 우리는 금후의 대책을 긴급히 세워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자 쟝량과 진평이 함께 나서며 한왕에게 아뢴다.
"한신 장군이 위나라를 평정했다고는 하오나, 그쪽 사정이 복잡하여 속히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우리는 항우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이 아니라,
한신 장군이 돌아올 때까지는 지키기만 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한왕은 장량의 말을 옳게 여겨, 공격을 회피하고 수비 위주로 나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항우는 영양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싸움을 걸어 오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그렇다 보니 오히려 이 편에서 불안감이 점점 증폭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사 하나가 왕릉에게 달려와 아뢴다.
"장군님 ! 큰일났사옵니다.
항우가 지금 장군님의 자당(慈堂)어른을 팽성에서 이리로 끌어다 놓고 죽이려 한다고 하옵니다."
왕릉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항우가 볼모로 붙잡아 두었다는 나의 어머님을 이리로 끌어다 놓고 죽이려 한다고.... ?
너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느냐 ?"
"자당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드님을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최후의 말씀을 저쪽에서 전하는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장군께서 지금 당장 달려가시지 않으면 자당을 영원히 못 뵙게 되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왕릉은 그 말을 듣고 목을 놓아 울다가 한왕에게 달려가 자신의 고충을 사실대로 아뢴다.
"신의 노모가 70이 넘었사오나, 신은 아직까지 노모에게 변변한 효도 한 번 한 일이 없사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항우가 신의 노모를 볼모로 끌어와 죽이려 하므로,
노모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신은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어머니를 구해 보고 싶사오니, 신이 항우를 찾아갈 수 있도록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신이 비록 항우를 찾아가더라도 대왕에 대한 일편 단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장량을 불러 물었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지 선생께서 슬기로운 지혜를 알려주소서."
장량은 오랫동안 심사 묵고하다가 조용히 머리를 들며 왕릉에게 말한다.
"장군이 노모를 구하기 위해 노심 초사하는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소.
그러나 노모를 구하기 위해 항우를 찾아 가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오.
항우는 며칠 전 장군에게 대패했기 때문에,
장군을 쉽게 제거해 버리려고 이런 못된 사술(詐術)을 쓰고 있는데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면 어떡하오.
노모께서 실제로 항우의 진지에 끌려 오신지 확실한 사실조차 모르면서
심부를꾼의 말만 믿고 달려가면 어떡하느냔 말이오.
그러하니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어,
노모가 그곳에 나와 계신지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 순서일 듯 하오.
아울러 노모께서 일선에 붙잡혀 오셨다면, 노모의 친필 서한을 받아 오게 합시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항우를 찾아 가는 것은 그 후의 일이오."
과연 장량의 논리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한왕은 장량의 논리에 크게 감탄하면서, 왕릉에게 달래듯 말했다.
"자방 선생의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이오.
그러면 모사 숙손통(叔孫通)을 보내,
자당께서 정말로 항우의 진영으로 끌려 나와 계신지 어쩐지 우선 그것부터 확인하기로 합시다.
이 후의 문제는 확인이 되는대로 다시 논의하기로 합시다."
모사 숙손통이 어명을 받들고 초진으로 항우를 찾아가니,
항우는 매우 퉁명스러운 어조로 숙손통에게 말한다.
"왕릉은 나와 고향이 같은 패현(沛縣) 사람이오.
따라서 왕릉은 같은 고향사람인 나를 섬겨야 옳을 일인데, 그자는 유방을 도와 나를 크게 해치고 있소.
그래서 나는 그자의 어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오.
지금이라도 그자가 나를 찾아와 잘못을 인정하고 항복을 한다면, 어미와 함께 아들을 모두 살려 줄 용의가 있소.
그러나 그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자의 어미를 죽여 불효자의 악명(惡名)을 천추에 남게 할 생각이오."
이렇게 말하는 항우의 기세는 매우 험악하였다. 숙손통이 조용히 반문한다.
"왕릉 장군의 어머니를 한 번 만나 뵙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오 ....
여봐라 ! 왕릉의 어머니를 이 자리에 끌어내 오너라 ! "
이윽고 왕릉의 노모가 형리들에게 끌려 나오자 숙손통에게 묻는다.
"귀공은 어디서 오신 누구시기에, 나 같은 늙은이를 만나자고 하시오 ?"
숙손통은 허리를 굽혀 정중한 인사를 올리며 대답했다.
"저는 왕릉 장군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랍입니다.
자당께서 지금 고초를 겪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왕릉 장군이 몹시 괴로워하고 계시옵니다.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장군께서는 자당을 구하시기 위해 이리로 직접 찾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라옵건데 자당께서는 아드님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을 한 장만 써 주시옵소서.
장군께 그 서한을 전달해 올리면 즉시 이곳으로 달려오실 것이옵니다."
숙손통은 왕릉의 어머니가 이같은 아들의 전갈을 들으면 응당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 죽게 된 자신을 아들이 달려와 살려 주겠다는데,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나 ?
그러나 왕릉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노파는 숙손통의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얼굴에 노기를 띠며 큰소리로 꾸짖는 것이었다.
"귀공은 어찌하여 말 같지 않은 말씀을 하고 계시오.
한왕은 워낙 관인 대도(寬仁大度)하신 관계로, 만천하의 창생(蒼生)들이 그분을 부모님처럼 받들어 모신다오.
내 아들이 천만 다행으로 그와 같이 훌륭한 어른을 주군으로 모시게 되어,
이 어미는 항상 하늘에 감사하고 있다오.
만약 내 아들이 한왕에게 충성을 다하여 다소나마 공을 세운다면,
나는 공신의 어미로써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것이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도리이거늘, 어찌하여 구차하게 일시적으로 생명을 건지자고,
내 아들을 역적에게 항복하여 악명을 천추에 남게 하겠소.
귀공은 속히 돌아가셔서 내 아들에게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해 주시오."
왕릉의 어머니는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호위병의 허리에서 단도를 낚아채더니
자기 자신의 가슴에 칼을 꼿고, 땅바닥으로 엎어지며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닌가 ?
말릴 새도 없이 눈깜빡 할 사이에 벌어진 일로,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숙손통은 물론,
항우를 비롯하여 입시했던 호위병과 형리들도 미처 손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항우는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며 눈앞에서 장렬하게 죽어 가는
왕릉모의 광경을 보자 분통이 터져 올랐다. 그리하여,
"저년의 시체를 당장 끌어내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버려라 ! "
하고 무서운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용저가 항왕에게 간한다.
"폐하 ! 저 늙은이의 죄는 백 번 죽어 마땅한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파의 장례를 예를 갖추어 지내 주게 되면,
왕릉이 그 은공에 탄복하여 결국에는 우리에게 귀순해 올 수있는 계기가 되겠사오나,
만약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없애면, 왕릉은 원한이 골수에 맺혀
반드시 보복을 하려고 이를 악물고 덤벼 올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장래를 생각하시어 노파의 시체를 고향인 팽성으로 곱게 보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항우도 그 말에는 수긍 되는 점이 있어,
노파의 시체를 팽성으로 보내 주도록 허락한 뒤에 숙손통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공은 영양성으로 돌아가거든 왕릉더러 지금이라도 귀순하도록 권고해 주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군을 일으켜 왕릉뿐만 아니라 한왕 유방까지 모두 사로 잡아 목을 잘라 버릴 것이오.
유방에게도 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시오. 살고 싶거든 왕릉을 하루 속히 내게 보내라고 말이오."
그야말로 안하 무인의 폭언이었다.
항우는 막강한 힘을 가진 강자(强者)인지라,
그가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 온다면 한왕이 나라를 지탱하기가 어려울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숙손통은 그와 같은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항우에게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하였다.
"실상인즉, 한왕은 현사(賢士)들에 대한 태도가 이만저만 불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작부터 폐하에게 귀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왕릉 장군 역시 평소부터 저와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이번에 제가 돌아가게 되면 왕릉 장군과 상의하여 머지않아 폐하 앞으로 귀순해 오기로 하겠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귀공도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고마운 일이오.
그러면 속히 돌아가 왕릉을 꼭 데려오도록 하시오.
그래 주면 귀공에 대한 대우는 특별히 생각해 주기로 하겠소."
항우는 숙손통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이번에는 한나라의 군사 비밀을 알아내려고 이렇게 물었다.
"유방은 지금 병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기에 나에게 항복을 아니하고 버티는 것이오 ?"
숙손통이 대답한다.
"지금 한나라의 병력은 20만이 넘고, 대장만도 6,70명 가까이 있사옵니다.
게다가 무기와 군량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 폐하께서 장기전을 펼치시면 불리하게 되실 것이옵니다.
이런 군사력과 군비가 있음에도 이번 전투에서
시종 일관 수비 태세로 나오는 것은 그 나름대로 깊은 계략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틔이며 물었다.
"그 계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
"실상인즉 한신이 위나라를 평정하고 나서, 지금 폐하가 부재중인 틈을 타서
팽성으로 쳐들어가 볼모로 잡혀 있는 태공과 여왕후를 탈환해 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옵니다.
그런 뒤에는 일단 영양성으로 돌아와 제(齊)나라와 연(燕)나라를 차례로 정벌하여
폐하를 오도 가도 못 하도록 궁지에 몰아 넣을 계획을 꾸미고 있는 중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유방과 한신이 그렇게도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있단 말이오 ?"
"물론입니다.
한신이 팽성으로 쳐들어가면 그때에는 한왕도 정면으로 공격해 올 것인데,
전후방에서 일시에 공격해 오게 되면, 폐하께서도 이번만은 저들을 막아내기가 어려우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속히 팽성으로 돌아가셔서 한신의 공격을 막아낼 태세를 미리 갖추어 놓으시는 것이 상책일 것이옵니다."
"알겠소.
그러면 귀공과 왕릉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팽성으로 철군할 테니 빨리 다녀오시오."
숙손통은 항우를 팽성으로 즉시 철수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부득이 영양성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우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데는 크게 성공한 셈이었다.
숙손통이 영양성으로 돌아와 왕릉 장군의 어머니가 처참하게 자살한 경위를 자세히 말해 주니,
왕릉은 미친 듯이 통곡을 하며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는다.
"항우란 놈이 내 어머니를 죽게 했으니, 항우는 나의 불구대천지 원수로다.
이제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항우를 내 손으로 죽이고야 말리라."
항우가 아직도 팽성으로 철군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장량이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항우가 한신 장군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팽성으로 철수하고 싶어하면서도
숙손통과 왕릉 장군이 귀순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니, 우리는 우리대로 손을 써야만 할 것 같구려."
진평이 반문한다.
"손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
"항우가 숙손통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울화통이 터져서 무섭게 덤벼올 것 같으니,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겠다는 말이오."
"듣고 보니 과연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그러면 어떤 대책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까 ?"
"나에게 비책이 있으니,
대왕 전하의 윤허를 받아 그 비책을 쓰기로 합시다."
장량은 한왕의 윤허가 내려지자 곧 전옥(典獄)을 불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옥중에 있는 두 사람의 사형수의 목을 잘라, 성문 위에 놓이 매달아 놓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옆에는 방문을 써 붙이되, 숙손통과 왕릉이 항우와 내통을 하고 있었기에
이를 적발하여 두 반역자의 목을 베어 효수(梟首)한다는 사실을 자세히 써넣어라."
진옥이 장량의 명령대로 죄수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성문위에 높이 걸어 놓고 방문까지 써붙이니,
성안의 사람들은 효수형을 당한 죄수가 숙손통과 왕릉인 줄로 믿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져 마침내는 정찰병의 입을 통해 항우의 귀에까지 들어가니,
항우는 놀라움과 동시에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저런저런, 숙손통과 왕릉은 틀림없이 나에게 귀순해 올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모두 효수형을 당했다니,
이런 애석한 일이 어디있단 말이냐... ! 내가 이번 전투에서는 운이 나쁜 모양이니,
이제는 빨리 철수하여 팽성이나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 ! )
한왕은 항우가 철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량에게 물었다.
"항우가 철군을 시작했다니 이 기회에 적의 후방을 공략하는 것은 어떠하겠소이까 ?"
그러나 장량은 고개를 가로 젖는다.
"지금의 우리 형편에서는 그런 때가 아니옵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마시옵고 때를 기다려 주시옵소서."
항우가 팽성으로 돌아와 범증에게 영양성에서의 철군 과정을 말해주니, 범증은 땅을 치며 탄식하였다.
"숙손통과 왕릉이 귀순을 약속했다는 것도 말짱 거짓말이었사옵고,
두 사람이 효수형을 당했다는 것도 폐하를 속이기 위한 장량의 사술(詐術)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서야 숙손통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땅을 치며 분노하였다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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