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 이좌거의 지혜.》

오토산 2020. 6. 1. 12:35



초한지(楚漢誌) (104) 이좌거의 지혜.

조(趙)나라로 진군해 온 한신은 국경 지대의 요새(要塞)인 정경성 30리 밖에 진을 치고,

대장 장이(張耳)를 불러 상의한다.

 

"지금 정경성을 지키고 있는 광무군 이좌거(廣武君 李左車)는 지략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고 들었소.
그러니 첩자를 많이 보내어, 적의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소이다.

만약 경솔하게 움직였다가 우리의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면 큰일이니 말이오."

장이가 대답한다.
"지금 조왕(趙王)을 측근에서 보필하고 있는 사람은 성안군 진여(成安君 陳餘)입니다.

진여는 병법에 통달했다고는 하지만, 융통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진여와 이좌거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진여는 이좌거의 말을 좀처럼 들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안심하고 정경성으로 대담하게 치고 들어가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신은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속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오. 적의 허실을 정확하게 파악도 하기 전에

무작정 진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니, 우선 첩자를 보내 정경성의 사정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한신은 10여 명의 첩자들을 장사꾼으로 변장시켜 많은 돈을 주어 정경성으로  들여보냈다.
장사꾼으로 변장한 첩자들은 정경성 안으로 들어가  일부는 주막에서 날마다 술을 마시며

술꾼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민심의 향배를 정탐했고, 일부는 물건을 사는척 하면서

사람이 많은 시장을 배회하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조왕 조알은 한나라 군사들이 곧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2만에 이르는 군사들을 비상 대기 시켜놓고, 진여와 함께 정경성으로 순시를 와서 이좌거에게 묻는다.

 

"한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온다고 하는데, 대부이라면 어떤 방비책을 세우겠소 ?"
이좌거가 대답한다.
 
"한신은 위나라를 평정하고 대주의 하열을 정복한 여세를 몰아 우리한테까지 쳐들어 오고 있사온데,

그 기세가 매우 험악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형편에 소상한 장이까지 가세하고 있어서 무력으로 맞서기에는 매우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저들은 군량과 군수 물자를 천 리 밖에서 날라와야 하기 때문에

군량 사정만은 매우 곤란할 형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유능한 장수를 시켜 3만 군사를 데리고 후방으로 돌아가 한군의 보급로를 차단시키게 하면,

저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철군할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조왕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이좌거와 사이가 좋지 않은 장군 진여가 즉석에서 반대하고 나왔다.

 

"대부의 계략은 일종의 사술입니다.

싸움에 있어서는 의(義)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싸울 일이지, 무엇 때문에 잔꾀를 부린답니까 ?

한신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알려졌지만,

그것은 확대 과장된 숫자이옵고, 실상인즉 4,5천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정면으로 싸워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으려니와,

저들은 이미 천 리 길을 달려 온 관계로 군사 전체가 피로에 쌓여 있을 것이 온데,

무엇 때문에 비겁하게 정면으로 싸우기를 회피합니까 ?"
 
이좌거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한신은 군량 보급선이 길어짐에 따라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좌거의 계략대로 한군의 보급로가 조군에 의해 끊어진다면

한신은 꼼짝못하고 철수해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한신이 운이 좋았던지, 진여는 이좌거의 작전 계획을 무시해 버리고,

"적의 병력은 4,5천에 불과하니 전면 공격을 퍼부어 송두리재 때려부숴야 합니다."하고

총공격론을 다시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자, 이제는 조왕 자신이 결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조왕은 오랫동안 심사 묵고하다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자는 이 장군의 계획은 너무 소극적이오.

이왕이면 진여 장군의 의견대로 적에게 정면 공격을 퍼부어 정정 당당하게 승리를 거두도록  합시다."
 
이좌거는 조왕의 말을 듣고,
(조나라는 이제 꼼짝없이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한신은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고 크게 안도하였다.
그리하여 대장들을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렸다.

 

"적장 진여는 우리 병력이 4,5천 명뿐인 줄로 알고 정면으로 공격해 오기로 했다니,

우리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면만강(綿蔓江)을 등지고 배수진(背水陳)을 치고 있다가 적이 오는 대로 격파할 것이니,

주발 장군은 정병 2천을 데리고 산중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일선으로 달려 나오거든

그 기회에 정경성을 점령하고, 우리의 붉은 깃발을 성루에 걸어 놓고 성을 굳게 지키도록 하시오."
 
한신이 <배수진>을 치겠다는 말을 듣고 모든 장수들은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강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것은, 만일의 경우에 후퇴할 길이 없으므로 

병법상으로는 가장 졸렬한 포진법(布陳法)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대장인가,
"하필이면 배수의 진을 치려고 하시옵니까 ?"하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한신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배수의 진을 치기로 하였으니, 여러 말들 말고 내 명령대로 하시오."하고

일언지하에 다른 대장들의 반론을 막아버렸다.

다음날, 조나라 군사들이 진열을 단단히 갖추고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정찰병을 통해 한나라 군사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진여는 크게 웃으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들이 배수진을 치고 있다고 하니, 한신이라는 자의 지략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로다.

우리는 일시에 총공격을 퍼부어 한나라 군사들을 모조리 수장(水葬)시켜 버리자."

조나라 군사들은 함성을 울리며 진고를 두드려 사기를 한층 올리며 노도와 같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조나라 군사들이 일시에 몰려오자, 한신은 조참,번쾌,근흠 등을 불러 긴급 군령을 내렸다.

"적들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있소.

그런데 우리는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설 수 없도록 배수의 진을 치고 있으니,

모든 장수들은 병사들을 결사적으로 독려하여 적을 남김 없이 쳐부수도록 하시오.

적의 기세가 대단하니, 만약 한 걸음이라도 후퇴하는 자는 즉석에서 목을 베어 버리도록 하시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한신의 군사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양군 사이에는 처참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조나라 군사들은 적의 병력이 4,5천 명밖에 안 되는 줄로 알고 마구 덤벼오기 시작했는데,

막상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 한신의 군사들은 구름떼처럼 계속해 몰려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병력의 숫자에서 밀리기 시작한 조나라 군사들은 크게 당황하여

자기네 본거지인 정경성으로 급히 쫒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문 바로 앞에 다달아 보니, 성문은 굳게 잠겨져 있고,

성루에는 한나라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우리가 어느 사이에 적에게 본거지까지 빼앗겨 버렸단 말인가 ?"
군사들은 도망갈 곳이 없어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였다.
최고 지휘관인 진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떼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좌충 우돌하며

고군 분투를 하고 있는데, 홀연 관영 장군이 말을 달려와 진여의 머리를

한칼에 베어 버리는 바람에 조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 바람에 허둥대던 조왕도 졸지에 생포됨으로써, 조나라는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완패하고 말았다.
한신이 정경성에 입성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나자, 여러 대장들이 한신에게 입을 모아 물었다.

 

"자고로 배수진(背水陳)이라는 것은 병법에서 가장 기피하는 진법이온데,

원수께서는 어찌하여 배수의 진을 치셨습니까 ?"
한신이 웃으며 대답한다.

 

"병법에는 <함지사지 이후생(陷之死地 而後生)> 이라는 말이 있소.

배수의 진을 치는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불리할 줄을 알면서도 부득이 배수의 진을 쳐야 할 때가 있는 것이오.

어제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였소."

"부득이한 경우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

 

"우리가 이번에는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新兵)들을 많이 데리고 왔소.

그런 탓에 정작 싸움이 벌어지게 되면 대개는 도망을 먼저 생각하기 마련이오.

그러기에 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배수의 진을 치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던 것이오.

우리가 이런 계획을 가지고 이번 전투를 치뤘으니,

앞으로 이 병사들은 이번 싸움에서 큰 경험을 했을 것이고

우리가 강군(强軍)으로 한단계 발전할 수있는 계기가 될 것이오.

이것이 내가 배수의 진을 쳤던 가장 큰 이유요."

모든 장수들은 한신의 임기 웅변의 능란한 병법 전개에 혀를 차며 감탄하였다.
한신은 이번 전투에서 조왕을 생포함으로써 조나라를 완전히 정복한 셈이었다.
그러나 한신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나라의 명철한 대부인 이좌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이좌거를 생포하기 전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신은 다음과 같은 방문을 널리 써 붙였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좌거를 잡아오는 사람에게 황금 천 냥을 상금으로 줄 것이다.>
방문을 써 붙인지 사흘 만에 이좌거는 어느 농사꾼의 손에 붙잡혀 결박을 당한 채 끌려 왔다.

한신은 즉석에서 결박을 풀어 주고,

이좌거를 상좌로 받들어 앉히며 물었다.

 

"제가 이번에는 연(燕)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 어떤 작전을 쓰면 될지 대부께서 가르침을 내려 주소서."
이좌거는 너무도 과분한 한신의 예우에 감격해 마지않으며 대답한다.

 

"자고로 패군지장(敗軍之將)은 병사(兵事)를 논하는 법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나라를 망쳐 놓은 이 몸이 무슨 얼굴로 병사를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
 
그러자 한신은 머리를 수그리며 다시 말했다.
"그 옛날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을 때에는 나라를 크게 망쳐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秦)나라에 가서는 진나라를 크게 흥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

조나라가 망한 것은 조왕이 대부의 탁월한 계략을 듣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왕이 만약 진여의 말을 듣지 않고 대부의 말씀을 들었다면 저희들은 결코 승리하지는 못했을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데, 대부께서는 연나라를 평정할 수 있는 지혜를 제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좌거는 한신의 흩트러짐 없는 극진한 예우(禮遇)에 크게 감동하여 머리를 숙이며 말문을 열었다.
"장군께서는 위표를 생포하고, 하열과 장동을 제압하고,

이제는 조나라까지 정복하심으로써 사실상 명장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군사와 군마가 긴 행군과 전투로 피폐해지고 군량도 넉넉하지 않아,

지금 당장  연나라를 공략하신다는 것은 무리가 될 것입니다.

연이 비록 조그만 나라인 것은 맞지만, 하루 이틀에 망할 나라는 아니옵니다. 

만약 칼을 뽑았다가 연나라를 쉽게 제압하지 못하면, 그때에는 제(齊)가 장군을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을 마시고, 지략으로 처리하시는 것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지략을 쓰면 좋을지, 대부의 고견을 들려주시옵소서."

 

"장군께서는 군사를 일으키실 생각을 마시고,

조나라에 그냥 머물러 계시면서 군사들의 훈련만 열심히 시키고 계시옵소서.

그러면 연나라의 민심이 크게 요동칠 것이오니, 그때에 가서 ....."
 이좌거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말고 뜸을 들인다.

 

"그때에 가서 어떤 지략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까 ?"
한신은 초조한 마음에서 다음 말을 재촉하였다.
 
이좌거가 다시 말문을 연다.
"연나라의 민심이 불안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유능한 세객(說客)을 보내 연왕(燕王)을 이해(利害)로 설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연나라만 굴복해 오게 되면, 제나라는 저절로 기세가 꺾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싸우지 않고도 두 나라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신은 이좌거의 탁월한 지략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신은 이좌거의 말대로 군사들을 훈련과 휴식을 교대로 시키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연후에 어느 날, 한신은 변론에 능숙한 수하(隨何)에게 편지를 써 주면서,

연왕을 만나 보고 오게 하였다.
연왕은 한신이 사신을 보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불안해 하였다.
그리하여 중신 회의를 열고 대책을 상의하니, 모사 괴철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한신은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병마가 몹시 지쳐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싸울 기력이 없으니까, 대왕을 편지로 설득해 보려고 사신을 보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한신의 요청을 호락호락 받아들여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이오 ?"

 

"대왕께서는 한신이 보낸 서한을  받아 보신 후에, 신을 한신에게 보내 주시옵소서.

그러면 신이 한신을 직접 만나 보아서, 그 결과에 따라 차후의 방침을 결정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연왕은 내심 괴철의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겨,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데,

때마침 한신의 사신이 서한을 가지고 도착했다고 알린다.
연왕은 수하를 불러 들여 만났는데 ,수하가 연왕에게 내보이는 한신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나라 대장군 한신은 연왕 휘하께 편지를 보내오>
초패왕 항우는 잔학 무도하기 이를 데 없어, 의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하였으니,

이는 천인이 공노해 마지 않을 일이오.

이에 한왕께서는 정의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 이미 삼진을 석권하고 위(魏)와 조(趙)도 평정했으니,

이는 힘이 강한 때문이 아니고 하늘의 뜻을 쫒았기 때문이오.
이렇게 한군(漢軍)이 가는 곳 마다 천의(天意)를 순응하지 않는 자가 없거늘 ,

유독 연왕만은 우리에게 순응해 올 줄을 모르니, 이 어찌 된 일이오 ?

내 지금 조나라에 머물면서 귀왕이 속히 귀순해 오기를 권하는 바이오.

만약 나의 요청이 무시된다면 나는 무력으로써 왕의 자리를 빼앗아 버릴 것이니,

후일에 뉘우침이 없도록 처신하기를 바라오.                     한나라 대장군 한신.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협박장과 다름없는 서한이었다.
연왕은 한신의 편지를 읽어 보고 매우 고깝게 여기며 수하에게 말한다.

 

"한왕은 얼마 전에 항왕에게 대패하고 나서, 지금은 영양성만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무엇을 믿고 이런 무례한 편지를 보냈소 ?"
수하가 대답한다.

 

"한왕이 초패왕에게 일시적으로 패배했다고는 하나,

그때만 하여도 한왕께서 초군에게 이중 삼중으로 포위를 당하고 계실 때에,

돌연 하늘에서 성스러운 백광(白光)이 내리 비쳐서 한왕을 구출해 주셨으니,

그 어찌 하늘의 도움이었다고 아니 할 수 있으오리까.

자고로 성왕(聖王)이 되려면 백령(百靈)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 법이옵니다.

한왕께서는 지금은 비록 영양성에 몸을 의탁하고 계시오나,

그분의 휘하에는 지략이 풍부하신 장량 선생을 비롯하여, 백전 불굴의 명장인 한신 장군과,

군정(軍政)에 탁월하신 소하 승상 같으신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아셔야 하옵니다.

초패왕 항우가 비록 무력은 막강하다고는 하오나, 

항우는 폭정을 거듭해 온 관계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 버려서, 머지않아 반드시 멸망하게 됩니다.

대왕께서는 지금 결정을 미루시다가 초패왕이 패망하는 날에는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실 것이옵니까 ?

 대왕이 철썩같이 믿고 계시던 조나라가 이미 멸망한 이 판국에 대왕만이 혼자 안전을 도모하시려는 것은

대세를 너무나도 모르시는 처사인 것 같사옵니다."

연왕은 수하의 말을 들어 보고 사태가 절박하게 되었음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모사 괴철을 따로 불러 긴급 지시를 내렸다.

 

"수하의 말을 들어 보니 사태가 매우 절박하오.

그러니 귀공이 한신을 직접 찾아가 만나 보고 오시오.

우리의 태도는 그 후에 결정하기로 하겠소."

 

괴철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신이 한신을 만나 한나라의 허실을 소상하게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괴철은 수하와 함께 한신을 만나러 떠났다.

 

한신은 연락병을 통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연왕이 나를 만나게 하려고 사신을 보냈다고 하니,

연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굴복하러 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하고

크게 기뻐하며, 많은 사람을 내보내 괴철을 융숭하게 영접하였다.

괴철이 융숭한 영접을 받으며 영내로 들어오니,

한신은 중앙 단상에 의연하게 앉아 있고, 많은 장수들은 좌우에 정연히 읍하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도 장엄하여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신은 단하의 괴철을 굽어보며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대부께서 나를 찾아 온 것은 나를 설득하여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인 모양인데,

내가 대부의 수완에 쉽게 넘어갈 것 같소 ?"

 

"......"

비수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한신의 질문에,

괴철은 얼른 대답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한신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만약 연왕이 성문을 활짝 열고 우리에게 순순히 항복해 온다면, 난들 전쟁을 좋아해서, 무고한 생명을 살상하리오.

지금 육국(六國) 중에서 우리에게 항복해 오지 않은 나라는 오직 연나라가 있을 뿐이오.

모든 나라들이 한왕의 위덕에 순응하여  스스로 귀순을 해 오고 있거늘,

유독 연나라는 항우의 힘에 의지하여 우리에게 맞서 온다면,

우리는 부득이 연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오..

그리고 내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연나라는 일시에 초토화 되게 될 것이오."
 한신은 여기까지 말을 하고, 이번에는 좌우를 돌아보며 새로운 지시를 내린다.

 

"여러 장군들은 잘 들으시오.

나는 이제부터 연나라와 제나라를 모두 정벌하겠소.

그리고 나서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대부에게 알려주기 위해,

사신으로 온  괴철 대부를 그때까지 객사(客舍)에 정중하게 모셔 두도록 하시오."
 
괴철은 꼼짝 없이 객사에 연금(軟禁)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해보고 고달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천만 뜻밖에도 조나라 시절의 대부 이좌거가 괴철을 찾아왔다.
조나라와 연나라는 동맹국이었던 관계로, 두 사람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괴철은 이좌거를 만나자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조왕께서는 생포가 되고 진여 장군은 전사를 하고,

뒤이어 우리 연나라는 한신 장군으로 인해, 누란(累卵)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
이좌거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한다.
 
"대부께서는 무엇을 주저하시오.

자고로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말이 있지 아니하오 ?

한왕은 항우에게 시해된 의제를 정중하게 장사지내 드림으로써 천하의 의주(義主)가 되셨소.

게다가 한신 장군의 용병술은 신출 귀몰하여 그를 당할 사람이 당대에 없는 형편이오.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조왕에게 순순히 항복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했건만,

조왕은 끝까지 나의 충고를 무시하고 막강한 한군에 맞섯다가

결국에는 나라도 망치고 자기 자신도 포로가 된 것입니다.

대부께서도 그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셔서, 한왕 편이 되든가 ,혹은 초패왕의 편이 되든가,

스스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시오."
 
이좌거의 이같은 말을 들은 괴철은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초패왕은 의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힘으로 찬탈했는데,

한왕은 의제를 끝까지 받들어 모신 것을 보게 되면,

한왕은 인의(仁義)가 무척 두터운 사람인 것은 틀림 없기는 하오만 ....."
하고 망설임을 보인다.
 
그러자 이좌거가 다시 말한다.
"항왕과 한왕은 의로운 면에서도 비교가 안 되오.

그러나 인격적인 면을 불문에 붙이고 순전히 군사적인 면에서만 보더라도,

한왕이 훨씬 우세하다는 것을 아셔야 하오.

한왕 휘하에는 장량,한신,소하, 진평 같은 신출 귀몰한 현사들이 있지 아니하오 ?

항왕 휘하에도 범증,용저, 계포,종이매 같은 용장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그들이 어찌 장량이나 한신 같은 사람들의 지략을 당해 낼 수 있겠소 ?"
 
괴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닌게 아니라, 범증 군사는 장량의 지략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고,

용저와 계포등은 한신 장군을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시면서 무엇을 주저하시오.

한왕은 흥하고, 항왕은 망해 가고 있는 판인데

무엇 때문에 흥하는 사람을 놔두고 망해가는 사람을 따르려고 하느냐 말씀이오 ! "

 

"..... "
 괴철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결심이 섯는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장군의 말씀이 옳소이다.

그러면 우리도 이제부터는 한왕을 섬기기로 하겠으니, 한신 장군을 다시 한번 만나보게 해주시오."

 

"참으로 좋은 판단을 하셨소이다."
 이좌거는 크게 기뻐하며 한신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괴철은 연왕에게 항복을 권유하겠노라고 ,

한신에게 분명하게 말하니 한신은 매우 흡족하게 여기며 말했다.

 

"대부는 단순한 사신일 뿐이니,

이제는 본국으로 돌아가 연왕으로 하여금 정식으로 항복한다는 뜻을 명확하게 표명하게 하시오.

그리고 대부가 돌아가실 때에는 조참과 번쾌 두 장수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부와 동행을 하게 하겠소."
 
한편, 연왕은 대부 괴철을 한신에게 보내 놓고, 그 결과가 몹시도 궁금하였다.
그러던 차에 괴철이 돌아와 지금까지의 경과 과정을 소상하게 보고하고 난 뒤,
"우리나라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항왕을 버리고 한왕을 섬기는 것이 생책이 되겠사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연왕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그러잖아도 나 역시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그러면 조참과 번쾌 두 장수를 기꺼이 맞아 들여서, 진정으로 친선을 도모하도록 합시다."하고

성밖으로 달려 나와 두 장수를 융숭하게 맞아들였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나 한신이 몸소 연왕을 찾아 오니,

연왕은 정식으로 항표(降表)를 작성하여 한신에게 올리니,

한신은 크게 기뻐하며 연왕을 깍듯이 왕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렇게 한신은 화살 한 촉 쏘지 않고 ,

이좌거의 지혜를 빌려  연나라를 고스란히 접수하였던 것이다.
한신은 연왕의 항표를 수하에게 시켜, 영양성에 있는 한왕에게 급히 보내고,
그때부터는 제(齊)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또다시 원정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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