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범증(范增)의 절명(絶命)》

오토산 2020. 6. 2. 13:47



초한지(楚漢誌) (105)

범증(范增)의 절명(絶命)

대한(大漢) 3년 11월.
한신이 위(魏), 대주(代州), 조(趙), 연(燕)등의 네 나라를 차례로 정복함에 따라,

한왕 유방의 세력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초패왕 항우의 마음은 지극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범증이 입궐하여 항우에게 품한다.

 

"한신이란 자가 육국을 휩쓸고 돌아가는 바람에

한왕 유방은 영양성에 가만히 앉아서도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들의 세력 확장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우리에게 어떤 불상사가 닥쳐올 지 모르니,

저들의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지금 당장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사옵니다."
 
항우가 즉석에서 대답한다.
"그러잖아도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오.

그러기에 내가 불원간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영양성으로 직접 쳐들어 가기로 하겠소.

이렇게 내가 나선다면 유방 따위는 문제가 안 될 것이오."
항우는 자신 만만한 어조로 말하였다.
 
이런 항우의 호언 장담은 한나라 첩자에 의해 한왕에게 즉시 알려졌다.
한왕은 항우가 조만간 10만 군사를 이끌고 직접 쳐들어 온다는 말을 듣자 크게 불안해 하며,

장량과 진평을 불러 상의한다.
 
"항우가 불원간, 십만 군사를 직접 이끌고  영양성으로 쳐들어오겠다고 하는구려,

한신 장군은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아직 북방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영포 장군은 구강(九江)으로 돌아가 버렸고,

왕릉 장군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으니,

항우의 내습(來襲)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지 크게 걱정이오."
 
그러자 진평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에게 좋은 계략이 있사오니,

대왕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무슨 계략이 있기에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구려."
 진평이 다시 대답한다.

 

"초패왕이 믿고 있는 사람은 범증과 종이매, 용저와 주은 등, 몇몇 군사와 장수에 불과하옵니다.

그러하니 우리가 반간지계(反間之計)를 써서 항우와 범증을 반목(反目)하게 만들면

저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내분(內紛)이 일어나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성품이 워낙 우직하기 때문에, 떠도는 소문만 듣고서도 범증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범증이 제아무리 좋은 계략을 상신해도 듣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또 하나의 계략을 써서 항우를 저절로 망하게 만들어 놓겠사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첩자를 매수할 공작금으로 황금 4만 근을 내 주었다.
진평은 그 돈으로 적의 첩자들을 매수하여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범증과 종이매는 지금까지 많은 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왕이 아무런 논공 행상도 베풀어 주지 아니하므로, 그들 두 사람은  항왕에게 원한을 품고,

지금은 한왕과 내통하여 초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책동하고 있다.>
 
진평이 매수한 첩자들을 통해 퍼뜨려 놓은 이같은 유언비어는 확대 재생되어,

초나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서 마침내는 항우의 귀에까지 들어 갔다.
항우는 그 소문을 듣고 대로하였다.

 

"나는 범증을 <아부(亞父)>로 대접해 오고 있는데,

그자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유방과 내통하여,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고 있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

그 자가 이렇게 나온다면 당장 불러다가 목을 베어 버리리라 !"
 
항우는 워낙 성품이 불같이 급하고 우직한 사람인 지라 앞뒤를 가릴 새도 없이 길길이 분노하였다.
그러자 대장 용저가 간곡히 간한다.

 

"떠돌아 다니는 소문은 누군가의 모략으로 퍼뜨린 말이 분명하오니, 믿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범증 군사께서 폐하에게 원한을 품고 계실 리가 만무하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그대는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가 ?

범증이 진심으로 나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면,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리가 없지않은가 ?"

 

"전시에는 적이 이간책(離間策)으로 그 같은 유언 비어를 퍼뜨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범증 군사를 끝까지 믿어 주시옵소서."
 
항우는 그 말을 듣고서야 반신반의 하며 분이 풀렸다.,
그러나 한번 의심을 품고 나니, 그때부터는 범증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영양성을 공략하는 일만은 단독으로 결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단독으로 출정하여,

영양성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밤낮 사흘 동안이나 무지무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성안에 칩거해 있는 한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아무리 공격을 퍼부어도 일체의 반응이 없으니, 적들은 이미 도망쳐 버리고 성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냐 ?

그렇다면 모두들 성벽을 기어올라가 성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할 것이다 ! "

초군들이 기다란 사다리와 밧줄을 성벽에 걸고 성벽을 기어 오르기 시작하자,

어느 틈에 한나라 군사들이 나타나 성벽을 기어 오르던 초군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펄펄 끓는 물을 퍼붓는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다 보니, 초군은 크게 당황하여 그때부터는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항우는 크게 노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성벽을 타고 넘으라 ! "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거머리 같은 초군의 끈질긴 공격이 계속되자 장량이 한왕에게 품한다.

 

"초군의 공격이 자심하여 끝까지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으니,

임시 방편으로 사신을 보내 항우에게 화친(和親)을 제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

그러면 항우는 화의(和議)를 수락할 것 같으니,

그때에 가서 진평의 <반간지계(反間之計)>를 다시 한번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

한왕은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에 잠겨 있었다.
그러자 장량이 다시 간한다.

 

"병서에 이르기를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란은 말이 있사옵니다.

이것은 전시에는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전법이옵니다.

이번만은 항우에게 우리가 먼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여 위기를 넘기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우리가 화친을 제의해도 항우가 들어주지 아니하면 어떡하오 ?"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항우가 성품은 포악하여도 결단성은 없는 사람입니다

. 게다가 우리의 세력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화친을 제의하면 고민하는 듯 하다가 결국에는 들어 줄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말씀대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해 봅시다."
그리하여 변설에 능한 수하가 왕명을 받들고 초진으로 향하였다.
이윽고 수하는 항우를 만나 간곡하게 말했다.

 

"그 옛날 한왕은 폐하와 함께 회왕(懷王)의 명을 받고,

형제지의(兄弟之義)를 맺고 동서로 나뉘어 진(秦)나라를  정벌한 일이 있습니다.

그 후에 한왕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증왕(褒中王)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고향이 하도 그리워서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향이 그리웠기 때문이지, 천하를 도모하려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한왕이 이미 관중(關中)을 얻었으므로 소원이 성취된 셈입니다.

그러하니 이제부터는 영양성을 경계로 동쪽은 초나라가,

서쪽은 한나라가 각각 통치하여 피차간에 부귀를 오래도록 다 같이 누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

두 분께서는 과거에 형제의 의까지 맺으신 사이인 관계로,

이 문제도 역시 형제의 의리로써 해결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고개를 몇 번이고 기울이다 대답한다.
"그렇다면, 한신이 지금 나의 예하국(隸下國)인 연(燕)나라를 점령하고 있는데,

그 문제는 어떡하겠다는 것이오 ?"하고 묻자,

수하가 다시 대답한다.

 

"폐하께서 화친을 수락만 하시면,

한신 장군을 즉시 연나라에서 철수시키겠습니다."
 항우는 대답을 아니 하고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범증을 불러 물어본다.

 

"한왕이 수하를 보내 화친을 제의해 왔는데,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

이번에는 일단 화친에 응해 주었다가, 후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연후에 유방을 다시쳤으면 좋을 것같은데,

아부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
 그러자 범증이 대번에 머리를 흔든다.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저들은 영양성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임시 방편으로 화친을 제의해 온 데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영양성을 철저히 때려부숴야 합니다.

이번에 영양성만 때려부수면, 그 후에는 한신이 100만 대군을 몰고 와도 맥을 못 추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수하의 감언(甘言)에 속아 대사를 그르치려고 하십니까 ?"
 
 범증은 워낙 지략이 출중한 모사인지라 그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정확하였다.

항우는 범증의 말을 듣고 크게 흔들렸다. 그리하여 수하를 다시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직 화친에 응할 결심이 서지 않았으니,

대부는 일단 돌아가서 하회를 기다려 주시오."
 
항우는 수하를 돌려보내고 나서 영양성을 본격적으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수하가 그런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항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군사상의 비밀입니다만,

한왕께서 화친이 성립 될 줄로 알고

연나라에 주둔중인 한신 장군에게 긴급히 철수하라는 군령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신 장군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불원간에 영양성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내심 적잖이 놀랐다.

그리하여 끝까지 싸우려던 결심이 크게 흔들려서,
"가부간에 내가 사신을 보내기로 하겠으니, 그리 알고 일단 돌아가 주시오."하고 말했다.

 

사람을 보내 가지고 한왕이 주둔하고 있는 영양성내의 허실을 정확히 알아보고 나서,

최후의 판단을 내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수하가 영양성으로 돌아와 지금까지의 교섭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니 진평은 크게 기뻐하며 한왕에게 아뢴다.

 

"항우가 사신을 보낸다고 했다니 우리로서는 이처럼 좋은 기회가 없사옵니다.

만약 사신이 오면 우리는 그자를 이용하여 항우와 범증 사이을 완전히 갈라 놓아야 합니다.

초나라에서 범증 한 사람만 제거해 버리면 항우를 거꾸러뜨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항우와 범증 사이를 어떻게 갈라 놓겠다는 말씀이오 ?"

 

"장량 선생과 저에게 절묘한 복안(腹案)이 있사오니,

그 점은 염려치 마시옵고 저희들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옆에 앉아 있던 장량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한편 항우는 영양성의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수하가 다녀간 뒤

사흘 째 되는 날,<사신>을 보냈는데,  보낸 사람은 우자기(虞子期)이었다.

 

변설가나 모사를 보내기 보다는 장수인 우자기를 보내어

적의 군세(軍勢)를 살펴보게 하려는 항우의 숨은 뜻이 있는 사신이었다.

 

 우자기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영양성으로 찾아와 한왕을 만나려고 하니,

장량과 진평등이 몸소 마중을 나와 융숭하게 접대하면서,
"대왕께서는 어제 과음(過飮)하신 관계로 아직 잠자리에 계시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옵소서."하며

우자기를 매우 호화스러운 객사(客舍)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점심상이 나오는데, 음식은 산해 진미(山海珍味)가 그득한 성찬이었고,

음식을 담은 그릇 조차도 금배 옥완(金杯玉碗) 뿐이었다.

 

장량과 진평은 우자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융숭하게 공대(恭待)하면서,
"범증 아부께서는 무양(無恙)하시옵니까 ?

범증 아부께서 오늘은 무슨 일로 귀공을 이처럼 일부러 보내시더이까 ?"하고

계획적으로 엉뚱한 말을 물어 보았다.
 
우자기는 장량과 진평으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고 내심 크게 놀랐다.

자기는 초패왕이 보낸 사신인데, 장량과 진평은

자기를 범증이 보낸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우자기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면 범증은 소문처럼 아무도 모르게 이들과 내통이라도 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 ? )
 그러한 의심을 품으며, 자기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범증 아부가 보낸 사람이 아니고,

항왕 폐하께서 보내신 특명 사신(特命使臣)입니다."
장량과 진평은 그 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는 빛을 보인다.

 

"그러면 당신은 범증 아부께서 보내신 밀사가 아니고,

항왕이 보낸 사람이란 말이오 ?"
 
그리고 이내 심부름꾼을 부르더니,
"이 사람은 범증 군사께서 보낸 밀사가 아니고 항왕이 보낸 사람이라고 하니,

이 방에 모실게 아니라 바깥 사랑으로 데려가도록 하시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
 
우자기는 마지못해 바깥 사랑방으로 쫒겨 나왔다.
바깥사랑은 조금 전에 있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초라하고 가재 도구도 형편없이 허술하였다.

게다가 바깥 사랑방으로 우자기를 쫒아내고 난 장량과 진평은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음 ....

이제 알고 보니 범증과 한왕간에는 내통 관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구나 ! )
 
우자기는 이를 갈며 분노하였다.
마침 그때 수하가 찾아오더니 말한다.

 

"대왕께서 이제야 기침하셨소이다.

나와 함께 입궐하여 대왕을 알현하기로 합시다."
 
우자기는 수하를 따라 입궐하여 접견실(接見室)로 들어왔다.
접견실에는 책이 여러 천 권이 쌓여 있었고, 책상위에는 서류도 많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왕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수하는 우자기를  의자에 앉혀 놓고 나서,
"대왕께서는 지금 세수를 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내가 대왕을 모시고 나오겠습니다."하고 방에서 나가 버린다.
 
우자기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책상위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훔쳐보았다.
그중에는 누가 보냈는지 모를 서한이 한 통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항우는지금 팽성을 비워 놓은 채 영양성을 취하려고 원정 길에 올랐는데, 병력은 10만 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천명을 거역한 사람이니 머지않아 한군(漢軍)에 의해 패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한왕께서는 항복하지 마시고, 한신 장군을 급히 불러다가 영양성을 끝까지 수호하도록 하시옵소서.

노신(老臣)과 종이매 장군은 이곳에서 끝까지 대왕을 도와 드릴 것이옵니다.

참, 지난번에 보내주신 황금(黃金)은 잘 받았습니다.

대왕께서 통일 성업을 완수하시거든 이 늙은 신하를

고향의 후백으로나 봉해 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우자기는 그 편지의 주인공이 범증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항간에 떠돌아 다니는 소문도 있으려니와, 장량과 진평이 자기를 대해 주던 태도의 변화등으로 미루어,

범증이 한왕과 내통하고 있다는 심증을 충분히 굳힐수 있었다.

 

(범증이라는 늙은이가 이렇게도 음흉한 놈이라면 절대로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우자기는 범증을 처단할 물적 증거로 삼기 위해 문제의 편지를 가슴속에 훔쳐 넣었다.

이윽고 수하가 한왕을 모시고 들어왔다.
한왕은 수인사를 받고 우자기에게 말한다.

 

"그 옛날 항왕과 내가 의제의 명을 받고 진나라로 쳐들어갈 때에,

의제께서는 함양을 먼저 점령한 사람을 <관중왕>으로 봉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소.

그런데 함양을 먼저 점령한 사람은 나였건만, 항왕은 관중왕의 자리를 나에게 빼았고, 나를 파촉으로 쫒아버렸소.

그리하여 나는 부모와 고향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여 부득이 군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오.

그리고 이제,관중땅을 점령함으로써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므로, 피차간에 화친을 도모하려는 것이오.

공은 이런 나의 뜻을  항왕에게 솔직히 전해 주시오."

우자기가 대답한다.
"항왕 폐하께서도 대왕의 뜻을 충분히 짐작하시고 저를 사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대왕께서는 사흘 안에 반드시 항왕 폐하를 찾아 오셔서 그 뜻을 직접 품고해 주시옵소서."
한왕이 다시 말한다.

 

"나의 참모들과 상의하여 사흘 후에 항왕을 만나러 갈 테니,

공은 먼저 돌아가 그 뜻을 전해주시오."

우자기는 초진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항우에게 문제의 편지를 내 보이며,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음은 이 편지 한 통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사옵니다."
하고 장량과 진평에게 설움당한 사실까지 소상하게 보고하였다.

항우는 그 서한을 읽어 보고 부들부들 떨며,
"범증이란 늙은이를 당장 불러다가 이실 직고하도록 사정없이 고문하라 ! "
하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졸지에 범증이 어전으로 끌려나왔고, 본인을 모함하는 편지의 내용을 추궁당하자 사태의 전말을 깨닫고,

땅에 엎드려 울면서 아뢴다.

 

"평생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폐하를 보필해 온 이 몸이 어찌 이심(異心)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이 편지는 장량과 진평이 신을 죽여 없애기 위해 조작한 모략이오니, 폐하께서는 속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그런 변명으로 의심이 풀릴 항우가 아니었다.
"쓸데없는  변명은 그만 늘어 놓아라.우자기 장군이 영양성에서 이 편지를 직접 훔쳐왔는데,

이것을 어찌 장량과 진평의 모략이라고 말할 수가 있단 말이냐 ?"
항우는 워낙 의심이 많은 성품인지라 아무리 변명을 늘어 놓아도

소용이 없을 것을 깨닫고, 범증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소원을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의심을 하시면 굳이 변명은 아니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의 공로가 적지 않았사오니, 여생을 고향에서 지낼 수 있도록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 늙은 신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아무리 포악한 항우도 70고령의 범증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일말의 측은감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범증은 노구(老軀)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해 온 충신이 아니었던가 ?

항우는 범증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대의 마지막 소원이 그러하다면,

여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해 주리다."하고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었다.

그렇게 범증은 군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면하고 고향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범증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 가상으로 등창(背瘡)이 나서 육신조차 고통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등창이 열흘 쯤 계속 되자, 못 견디게 아프고 쑤셔와서 잠을 이룰 수도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

세상 만사가 모두 헛 것으로만 보였다.

범증은 참고 견디다 못 해 아들을 불렀다.
"여기서 동쪽으로 3백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와우산(臥牛山)에 들어가면,

토굴 속에 양진인(楊眞人)이라는 백발 노인이 계실 것이다.

그 어른은 나에게 도(道)를 깨우쳐 주신 은사일 뿐 아니라,

어떤 병이라도 잘 고치는 천하의 명의(名醫)이시기도 하다.

너는 지금 곧 그 어른을 찾아가서 내가 등창으로 고생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좋은 약을 구해 오도록 하거라."

범증의 아들은 부친의 말을 듣고 와우산으로 <양진인>을 찾아갔다.
과연 와우산 어떤 토굴에는 족히 100세가 넘어 보이는

호호 백발의 양진인 노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범증의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고하고

,부친이 등창으로 극심한 고생중인 증상을 자세히 말하고 나서,
"가친의 등창이 속히 쾌유되도록 좋은 약을 지어 주옵소서."하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러자 양진인 노인은 대뜸 고개를 흔들며 냉혹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범증을 위해 약을 지어 줄 수 없노라

그 옛날 범증이 나에게 도를 배운 것은 사실이나,

범증은 내가 가르친 정도(正道) 보다는 밀모(密謀)와 기계(奇計)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기에,

범증이 하산할 때에 나는, <부디 명군(明君)을 택하여 정도의 길을 걸어가라>고 신신 당부를 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당부를 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

범증은 항우 같은 암군(暗君)을 섬기다가 결국에는 몸까지 망치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런 자의 병을 고쳐 줄 수가 있겠느냐 ?

범증이 지금 등창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리신 천벌인 줄로 알고 있으라고 전해라."

양진인 노인이 그렇게 나오니 범증의 아들은 더 이상 말을 붙여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와 양진인 노인의 말을 사실대로  전하니, 범증은 너무도 슬퍼하다가

 

"악 !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려져 죽고 말았다.

때는 대한 (大漢) 4년 4월, 범증의 나이 71세였다.
이로써 파란 만장한  한,초(漢楚)의 정국 투쟁에서 일익을 담당 하였던 큰 별이 지고 말았으니,
항우는 그 소식을 듣고 목을 놓아 울었고, 한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