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초한지(楚漢誌) 《기신의 순절(殉節)》

오토산 2020. 6. 3. 11:47



초한지(楚漢誌) (106)

기신의 순절(殉節)

항우는 범증이 결백했음을 사후(死後)에서야 깨닫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아 아, 나는 장량과 진평의 반간지계에 속아서 둘도 없는 충신을 잃었구나 ! "하고

며칠 동안이나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아무리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항우는 여러 날 동안 비통에 잠겨 있다가 하루는 종이매를 불러 말한다.

 

"나는 범증 아부와 함께 그대를 의심해 왔었다.

그러나 모든 의심은 이제 깨끗이 지워졌으니, 그대는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
종이매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폐하를 섬기는 데 어찌 두 마음이 있을 수 있으오리까.

지난번에 우자기 장군이 훔쳐 온 편지는 진평과 장량이 교묘하게 조작한 <반간지계> 였던 것이옵니다."

항우가 대답한다.
"나도 이제는 모든 것을 명백히 알았노라.

그러므로 유방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혀서,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양성에 있는 유방을 철저히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항우는 즉석에서 항백을 군사(軍師)로 삼고 전군을 총동원 하여 영양성 정복의 길에 올랐다.
한편, 한왕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불안하여 중신 회의를 긴급 소집하였다.

 

"항우가 이번에는 단단히 벼르고 전군을 총동원 하여,쳐들어 오는 모양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의 지금에 병력으로는 그들과 대적하기에는 절대 부족 한데다가 ,

한신 장군도 북방 정벌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

우리측 장수와 병력으로는 항우를 당해 내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구려."

장수들은 고개를 수그린 채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장량이 조용히 입을 연다.

 

"범증이 우리의 계략으로 죽었기 때문에

항왕은 매우 격분하여 영양성을 대번에 함락시키려고 덤벼 올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적은 팽성에서 군량도 많이 수송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군량 걱정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만약 영양성을 포위하고 나서 영양강(榮陽江)에 둑을 쌓고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일시에 터뜨려버리는 수공법(水功法)을 쓰게 되면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손을 들게 될 것 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하였으니,

대왕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나서 진평을 바라보며,
"진대부는 어떤 신출 귀몰한 묘책이 없겠소이까 ?"하고 물었다.

진평이 대답한다.
"묘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묘책을 쓰게 되면 영양성을 적에게 일시에 빼앗기지는 않고

대왕께서 무사히 피신하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다만, 우리네 장수들 중에서 대왕을 위해 그만한 묘책을 실천해 옮겨 줄 용장이 과연 있을지

, 그것이 문제입니다."

진평의 말이 끝나자 모든 장수들은 아연 긴장하였다.
그것은 진평의 말이 모든 장수들을 겁쟁이로 취급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장수들은 한결같이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던 중에,

대장 주발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선생은 어찌하여 저희 장수들을 이처럼 업신여기는 말씀을 하시옵니까 ?

저희들은 오늘날까지 주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충성을 다해 왔사옵고,

앞으로도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선생께서 어떤 묘책을 쓰시려고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희들은 주공을 위하는 길이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감당해 낼 각오가 되어 있사오니,

묘책을 이 자리에서 밝혀 주소서."

진평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장군들이 그런 각오를 가지고 계시다니, 나로써는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묘책은 비밀을 요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모두 공개할 수는 없는 것을 양해하시오."

그리고 진평이 한왕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귓속말로 무언가 수군거리니, 
한왕이 얼굴에 기쁨이 충만해 지면서,

 

"참으로 기가막힌 묘안이오.

장량 선생과 상의하여 그 계책을 꼭 쓰도록 합시다."하고 말했다.

회의가 끝나자, 장량은 진평과 단둘이 마주앉아 문제의 묘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그러면서 장량이 말한다.

 

"이 계책을 실천에 옮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장수들의 사기를 크게 돋구워 놓을 필요가 있겠소.

오늘 밤에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의하여 내일 실천에 옮기도록 합시다."

다음날 장량은 느닺없이 주연(酒宴)을 성대하게 베풀고, 모든 장수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청하였다.

그리고 주연이 벌어지는 석상에는 한 채의 수레와

그 수레를 추격하는 수백 명의 무장 군인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한폭 걸려 있었는데,

귀인(貴人)인듯 한 사람 하나가 수레에서 내려 우거진 숲으로 쫒겨가는 모습도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장수들이 그림을 감상하다가 장량에게 물었다.

 

"자방 선생 !

이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 그림이옵니까 ?"
장량이 대답한다.

 

"이 그림은 그 옛날 제(齊)나라의 경공(景公)이 진(晉)나라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단신(單身)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오.

뒤에서 맹렬하게 추격하는 군사들은 모두가 진나라 군사들이지요."

"그러면 경공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

 

"당시에 경공은 꼼짝 없이 적에게 붙잡혀 죽을 판이었지요

. 그런데 바로 그때, 난데없는 어떤 촌부(村夫)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경공더러,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사오니,

대왕께서는 소인과 옷을 바꿔 입으시고 빨리 숲속으로 도망을 가십시오.

이 수레는 소인이 어의(御衣)를 갈아입고 대왕을 대신하여 몰고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더란 거예요."

장수들은 장량의 이야기에 흥미가 진진하여,
"그래서 제경공은 옷을 갈아입고 무사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며 ,

눈을 반짝이면서 장량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장량은 장수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일부러 약간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나라 경공은 우리 대왕님처럼 매우 인자하신 어른이셨소.

이 처럼 인자하신 어른이, 어찌 자기가 살려고  남을 대신 죽으라고 할 수 있겠소.

그래서 제경공은 옷을 바꿔 입고 도망가기를 거절하셨지요."

그러자 장수들이 모두들 혀를 차면서,
"저런 저런 .....

그러면 제경공은 진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셨다는 말씀입니까 ?"
하고 묻는다.
장량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런 것은 아니오.

제경공이 옷 바꿔 입기를 거절하자,

촌부는 화를 내면서 <소인 하나 죽는 것은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오나,

대왕께서 돌아가시면 나라가 망할 것이 아니옵니까 ?

이런 판국에 무엇을 주저하시옵니까> 하고

말하며 옷을 억지로 갈아 입혀서 경공을 숲속으로 쫒아 보내고,

자기는 수레를 유유히 몰아 나갔다는 것이오."

"그야 말로 이름 없는 의사(義士)였군요.

그러면 그 촌부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까 ?"
장량이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 촌부는 당연히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역시 죽지 않고 살아 남았으니, 세상 일이란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요.

옛말에 <사생즉사 사필즉생( 死生卽死 死必卽生) 이라하더니>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죽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은 살길이 트인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라고 해야 하겠지요."

장수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눈들이 휘둥그래지며,
"아니,

제경공을 대신해서 어의를 입고 수레를 몰고 가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났다는 말씀입니까 ?"
하고 궁금하기 짝이 없어 하였다.

장량이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진나라 군사들은 촌부를 제경공으로 알고 그를 생포하여 진왕(晉王)에게 끌고 갔는데,

진왕은 그 촌부가 가짜 제경공인 것을 알고 크게 노하며<당장 목을 베어 죽이라>고 했더랍니다.

그러자 그 촌부가 진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임금님을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니 죽음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소.

그러나 임금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을 죽인다면,

그런 충신을 함부로 죽인 어리석은 진왕을 위해 장차 위기에서 누가 대신 목숨을 바칠 것이오 ?

왕께서는 그 점을 각별히 생각 해 보시오.> 라고 말했더니,

진왕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결국은 그 촌부를 죽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는 것이오.

이 그림은 그때 제경공이 쫒기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장수들은 장량의 말을 듣고 한결같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다시 묻는다.
"그러면 그 촌부는 제나라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 아니옵니까 ? "

 

"물론이지요.

그 후에 제경공은 진나라를 평정하는 대업을 완수하고 난 뒤,

그 촌부를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해 왔다오."

장량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새삼스럽게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도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 촌부와 같은 충신이 꼭 필요하오."

그러자  모든 장수들은 장량의 말을 듣고 분연히 입을 모아 이구 동성으로 맹세하듯 말한다.

 

"이름 없는 촌부조차 임금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알았거늘,

하물며 대왕의 중록(重祿)을 받아 오고 있는 저희들이 어찌 대왕을 위해 목숨을 아끼오리까 ?

선생께서 분부만 내려 주시면 저희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왕전에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장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여러 장군들께서 한결같이 그와 같은 충심(忠心)을 가지고 계시니, 이 나라의 장래는 매우 믿음직스럽소이다.

그러나 여러 장군들도 알고 계시다시피, 지금 몰려오는 초군에게 우리는 언제 패망할지 모르는 상황이오.

목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으로 적에게 <위장 투항(僞裝投降)> 전술을 써 보는 길밖에 없겠는데,

그 전술을 쓰려면 용모가 대왕과 흡사한 용장이 한 사람 있어야 하오.

여러 장군들 중에 혹시 그런 사람이 없겠소 ?"

장량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장 기신(紀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소리로 외친다.

 

"그런 일이라면 소장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소장의 얼굴과 용모가 용안(龍顔)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런 임무라면 누구보다도 소장이 적임일 것이옵니다."

 

장량과 진평이 기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기신은 왕과 용모가 헷가릴 정도로 흡사한 것이었다.
장량이 크게 기뻐하며 기신을 곧 대궐로 데리고 들어가

한왕에게 기신으로 하여금 <위장 투항> 하게 할 것을 품고하였다.
그러자 한왕은 대뜸 머리를 가로 흔든다.

 

"그건 안 될 말씀이오.

나는 대업을 아직 완성하지 못해 수하에 장수들에게 아무런 은총도 베풀어 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사랑하는 장수를 어찌 나 대신에 죽어 달라고 할 수 있으리오.

남을 죽여 이(利)를 취하겠다는 것은 인의(仁義)에 벗어나는 일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기신이 자진하여 아뢴다.

 

"대왕 전하 !

지금 우리의 사태는 매우 위급하옵니다.

만약 장량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이 계략을 쓰지 않아 영양성이 적들에게 함락되어 버리면,

그때에는 신이 살아 있은들 대왕에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으오리까 ?

오늘날 신이 주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지극히 가벼운 일이오나,

영양성을 지키고 나면 신의 미명(美名)은 영원히 살아 남을 것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군신(君臣)이 다같이 속수 무책으로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이옵니까 ?"

기신이 이처럼 애타게 호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왕이 아직도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기신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자살할 기세를 보이며 말한다.

 

"대왕께서 신의 충심을 이처럼 믿어 주지 않으신다면,

신은 차라리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 버리겠습니다."
한왕은 황급히 달려와 기신의 손에서 장검을 빼앗으며 타이르듯 말한다.

 

"잠깐만 .... ! "
그리고 기신을 가까이 데려다 놓고 조용히 말한다.

"장군의 충성은 하늘을 뚫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구려.

장군의 양친(兩親)께서는 아직 생존해 계시오?"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니 한 분이 계실 뿐이옵니다."

 

"그러면 장군의 어머니를 오늘부터 나의 어머님으로 삼고, 내가 모시기로 하겠소.

장군은 처자도 계시는가 ?"

 

"예, 있사옵니다.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사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장군의 부인은 나의 누이동생으로 삼고,

장군의 아들은 나의 친아들로 삼아,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양육에 책임을 질 테니,

장군은 안심하고 뜻대로 해 주기를 바라오."

 

기신을 위한 이같은 한왕의 인자한 배려에 동석했던 장량과 진평도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일단 위장 투항의 전술을 쓰기로 하는 방침이 세워지자,

장량은 영양성 앞까지 진군해 와서 진을 치고 있는 항우에게

한왕의 이름으로 손수 항표(降表)를 작성하여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왕 유방은 삼가 패왕 황제 폐하께 머리 숙여 글월을 올리옵니다.>
신은 일찍이 황제 폐하께 한왕(漢王)으로 봉함을 받고 파촉으로 부임을 했사오나,

그곳은 산 설고 물 설어서 건강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운데다가

고향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여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관중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팽성 전투에서 폐하에게 대패하고 나서부터는 용기를 상실하여,

지금은 영양성에서 간신히 목숨만을 보존해 오고 있는 형편이옵니다.

한신은 동정(東征)의 길에 오른 이후로 불러도 돌아오지 아니하고,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도 날마다 떠나가 버리니,  이 어찌 나의 무능한 소치가 아니오리까.

이제 폐하께서 사상 초유의 대군을 발동하여 영양성을 치려하시니,

우리의 운명은 오로지 폐하의 손에 달려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만약 지난날의 우정을 생각하시어 저의 목숨만을 살려 주시겠다 하오시면,

저는 오늘이라도 투항할 결심이 확고하게 서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연민지정(憐憫之情)을 두텁게 베풀어 주시옵소서." 

 <유방 올림>
 
항우는 유방의 항표를 읽어 보고 사신에게 물었다.
"유방이 언제쯤 성을 나와 항복하러 오겠다고 하던가 ?"

 

사신이 대답한다.
"폐하께서 허락만 내려 주시면,

오늘 밤이라도 항복하러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항우는 그 대답을 듣고 크게 만족해하며 사신을 즉석에서 돌려보내고,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명한다.

 

"유방이 오늘 밤에 항복을 하러 온다고 하니,

막사 장막(帳幕)뒤에 장수 몇 사람이 숨어 있다가 유방이 내 앞에서 북면(北面)하고 앉아 절을 하거든,

그 즉시 달려 나와 유방을 즉석에서 죽여 버리도록 하오.

그래야만 나의 원한이 풀리겠소."
 
과연 항우다운 무지막지한 명령이었다.
이런 명령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장수 다섯이 각기 번뜩이는 장검을 가지고

장막 뒤에 숨어서 한왕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장량과 진평은 기신을 위장 투항하게 하는 동시에

한왕이 성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대왕을 먼저 떠나시게 한 뒤, 기신을 출발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
장량이 그렇게 말하자 진평는 손을 설래설래 내저으며 반대한다.
 
"지금 초군이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으므로,

대왕께서 성 밖으로  나가셨다가는 큰일나시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

 

"기신 장군에게 곤룡포(袞龍袍)를 입혀 동문으로 내보낼 때에,

횃불을 든 미녀들 5백여 명을 배행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리하여 초군 병사들의 눈을 현혹케 하면 병사들이 모두 동문으로 몰려 올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기회를 이용해 평복으로 갈아 입으신 후에 서문으로 빠져 나가시면 무사하실 것이옵니다."
 
진평은 워낙 계교가 비상한 사람인지라,

그의 절묘한 술책에는 장량조차 감탄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기신이 한왕으로 분장을 하고,

5백여 명의 시녀들을 앞뒤로 나누어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게 하고 동문 밖으로 나서니,

아니나다를까 초군 병사들은 한왕이 탄 수레보다는

저마다 아우성을 치며 미녀들 주변으로만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한왕은 그 기회에 막료들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빠져나와 멀리 성고성(成皐城)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항우는 초저녁부터 유방이 나타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종이 달려오더니,
"유방이 이제야 나타났사온데,

앞,뒤로 미녀 5백 명씩이나  거느리고 오는 중이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 ?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엇다.
"하하하,

유방이 본래부터 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항복하러 오는 주제에 계집을 5백명 씩이나 데리고 오다니,

그자가 정신이 돌아버린 모양이구나."

그러면서 항우 자신도 미녀들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여,

몸소 횃불을 밝혀 들고 영문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유방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미녀들과 함께 유유히 수레를 타고 오는데,

항우가 마중을 나왔는데도 수레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았다.

(저런 무례한 놈이 있나.

감히 내 앞까지 수레를 타고 오다니, 저놈이 제정신이란 말인가 ?)

 

항우는 매우 괘씸하게 여기며 수레 앞까지 다가갔지만,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말이 없었다.

 

항우는 적이 의아스러워 수레 위의 사람을 향하여
"한왕 유방은 항복을 하러 온 주제에 어찌하여 아무런 말이 없는가 ?"하고

큰소리로 호통을 질렀다.

수레 위에 사람은 그제서야 반쯤 가려진 휘장을 손으로 올리고 빠끔히 내다보면서,
"나는 한왕이 아니고 한나라의 대장 기신이로다 !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

항우가 횃불로 수레위를 자세히 비추어 보니,

수레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은 비록 곤룡포를 입기는 하였으나 유방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였다.

 

"앗 !

너는 누구냐 ?"
항우는 감쪽같이 속은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울화통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며,
"이놈아 유방은 어디 가고 네 놈이 왔느냐 ! "하고

하늘이 무너질 듯한 호통을 내질렀다.

그 호통이 얼마나 요란했던지 5백여 명의 미녀들이 한꺼번에

"악!" 하는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사시나무 떨듯 이 떠는 통에 한바탕 짧은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수레 위에 앉아 있는 기신은 항우를 오연히 굽어보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한왕을 대신하여 죽으러 온 사람이다.

대왕께서는 그대가 없는 사이에 팽성을 치려고

한신,영포,팽월 장군등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조금 전에 팽성으로 떠나가셨다.

팽성을 공격하게 되면 그대의 가족들은 결코 무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항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면 오늘 낮에 보내 온 항표(降表)는 새빨간 거짓이었단 말이냐 ? "

 

"물론 그렇다.

지금이라도 용기가 있거든 광무(廣武)로 달려가 자웅을 결해 보라.

그러면 제아무리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이라도 우리를 당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항우는 눈앞에 닥친 죽음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기신의 충성심에 한편으로는 내심 감탄을 하면서,
"도대체 유방에게 이렇듯 충성스러운 너는 누구냐 ?"

그러자 계포가 항우에게 말한다.

 

"이자는 한군 대장 기신이라는 자이옵니다.

당장 끌어내려 목을 베어 버리라는 명을 내려 주소서."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답한다.

 

"나도 비록 많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 사람 같은 충신은 한 사람도 없지 않느냐 ?

저 자를 그대로 죽여 버리기는 그의 충성심이 너무도 아까우니, 순순히 타일러서 긴요하게 쓰고 싶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잘 설득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한 항우는 수레위를 향하여 타이르는 어조로 말을 하였다.

 

"그대의 충성심은 가히 본받을 만 하구나.

내 이제 그대에게 이르노니,

수레에서 내려와 곱게 항복을 한다면 내가 그대를 크게 중용하리라."
그러자 기신은 수레 위에서 항우를 오연히 굽어보며 큰소리로 꾸짖듯이 말한다.

 

"항우는 듣거라,

너는 워낙 멧돼지 같이 우악스런 자가 아니더냐. 내 어찌 너와 같은 무식한 자를 섬길 것이냐 ?

또한 대장부가 어찌 임금을 섬기는 데 있어, 두 마음이 있을 것이냐.

목이 열 번 달아나는 한이 있더리도 금수 같은 네놈에게 항복할 내가 아니다.

나는 살아서도 한왕의 심복이었던 것처럼,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한왕을 위해 너같은 포악한 무리를 섬멸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이니 쓰잘머리 없는 소리는 그만 지껄이거라."

항우는 그 말을 듣자 열화같이 분노하며 또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이자를 수레에 탄 채로 화형(火刑)에 처해 버려라 ! "

이윽고 수레와 수레 주변에 기름불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수레에 타고 있는 기신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비명을 지르기는 커녕,
눈썹 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

 

<sn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