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 (108)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항우.
성고성을 떠난 한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신이 점령하고 있는 조나라로 길을 재촉하였다.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군을 계속하기는 이만저만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도망가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었다.
어느덧 고통스러운 머나먼 행군의 끝이 보였다.
그것은 한신이 주둔하고 있는 성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왕은 성을 눈앞에 둔 50리 밖에 군사들을 주둔시킨 연후에,
수십기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한신이 있는 성안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한신과 장이는 어젯밤 술에 대취하여 아직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한왕은 진중을 돌아보다가 한신의 처소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의 책상위에는 <원수의 인장>이 들어 있는 비단 주머니가 그냥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내가 하사한 원수의 인장을 이처럼 소홀히 간수하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
한왕은 한신을 매우 괘씸하게 여기며 <원수의 인장>을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 나오자,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한신이 황급히 달려나왔다.
한신은 마루위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대왕께서 행차하시는 줄을 모르옵고,
영접을 나가지 못한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한왕은 탄식을 하며 한신을 꾸짖는다.
"내 지금 진중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오.
장군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원수의 인장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저져 있으니 군기가 이렇게나 문란해졌을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만약 적이 나의 사신을 사칭(詐稱)하고 진중으로 들어 왔다면, 생각만 하여도 아찔한 일이 벌어질 뻔 하였소.
이런 정신 상태라면 어찌 통일 천하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겠소 ?"
한왕의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 "
한신은 대답을 못하고 머리만 수그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장이가 부랴부랴 달려와 마룻바닥에 말없이 머리를 조아린다.
한왕은 장이를 호되게 꾸짖기 시작하였다.
"그대는 일군의 부장으로서 군사를 감독하고 독려할 책임이 있거늘,
내 지금 진중을 둘러보니 군기가 문란하기 이를데 없소.
이는 마땅히 군법 회의에 돌려 참형에 처해야 할 일이오.
그러나 그대들 두 사람은 지금까지의 공로가 컷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긴히 써야 할 인재들이기에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할 터인즉,
그리 알고 명심해 주기 바라오."
한왕은 단단히 못을 박아 놓고 본영(本營)으로 돌아오니,
한신과 장이는 두 손을 읍하고 따라오며 연방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한왕은 끝까지 묵묵 부답이었다.
이윽고 본영에 돌아온 한왕은 장수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폭탄 선언을 내린다.
"내 조금 전에 진중을 순찰하다가 <원수의 인장>을 주워 왔건만,
한신 장군은 아직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그런 사람에게 어찌 원수의 중책을 맡길 수 있으리오.
유능한 인재를 택해 원수를 새로 임명하기로 하겠소."
한왕의 폭탄 선언을 듣고,
장량과 진평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장량은 즉석에서 한왕에게 간한다.
"한신과 장이의 직책을 박탈하시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인 줄로 아뢰옵니다.
그들이 책무에 태만했던 것은 사실이오나, 일시적인 과오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오니,
대왕께서는 너그러이 용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자신이 맡은 막중한 책무를 유기하고 술이나 마시는 사람에게 어찌 국가의 중책을 맡길 수 있으리오.
나는 선생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소이다."
한왕의 노여움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이에 장량은 다시 입을 열어 간한다.
"그 옛날 위(衛)나라에 순변(筍變)이라는 대장이 있었습니다.
위왕은 그가 어느 농가에서 계란 두 알을 빼앗아 먹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하시어 순변을 파직시키려고 했었습니다.
그러자 당시에 대학자였던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위왕에게 간하기를,
<사람을 쓰는 것은 마치 뛰어난 목수가 목재(木材)를 다루는 것과 같아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점은 버려야 한다고 일러옵니다.
소중하게 써야 할 장수를 계란 두 개쯤 빼앗아 먹었다고 파면을 시킨다면,
이웃의 적국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를 얼마나 업신여길 것이옵니까.> 하고 말했더니,
위왕께서는 그제서야 자사의 깊은 뜻을 알아들으시고 순변의 파면을 취소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신과 장이의 경우도 순변의 경우와 무엇이 다르오리까.
바라옵건데, 대왕께서는 그들의 파직을 너그럽게 취소해 주시옵소서."
한왕은 장량의 간언을 듣고 나서 두 사람을 용서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 다른 숙원만은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어서, 한왕은 한신과 장이에게 따져 물었다.
"지난 날 내가 영양성과 성고성에서 항우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있을 때,
그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는가 ? "
한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그 당시 제나라와 연나라는 변계(變計)가 극심하여, 도저히 군사들을 뽑아 낼 수가 없었던 것이옵니다.
그동안의 정벌을 허사로 만들 수는 없는데 다가, 대왕께서 멀고 먼 영양성에
포위되어 계시다는 말씀을 풍문으로만 들었지,
사실 여부를 정확히는 몰랐기 때문에 부득이 출병하지 못했던 것이옵니다."
한왕은 그제서야 그 문제에 대한 의혹이 풀렸다.
그러나 아직도 또 다른 의혹은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 이번에는 ,
"조나라를 정복한 지 이미 오래건만,
아직도 무슨 이유로 제나라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소 ?"하고
또 다른 문제를 따져 물었다.
한왕이 한신에게 가지가지 의혹을 품게 된 것은,
한신의 힘이 날로 강대해 지는 데 대한 불안감에서 온 것이었다.
한신은 한왕의 질문을 받고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우리 군사들은 오랫동안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싸우느라고 그 당시에는 몹시 피로해 있었사옵니다.
제나라는 육국 중에서도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피로한 군사로써 강한 나라를 치면 패배할 것이 분명하기에,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예기(銳氣)를 북돋우어 가지고 제나라를 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되었기에 이제부터라도 제나라를 정복하려는 중에 대왕께서 오셨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제나라를 평정시켜 육국을 모두 대왕의 봉토로 만들 것이오니
대왕께서는 지켜보아 주시옵소서."
한왕은 그제서야 의혹이 해소되는 듯,
"그렇다면 원수를 그대로 유임시켜 줄 테니,
육국을 반드시 평정하도록 하시오."하고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었다.
한신이 사은 숙배하고 물러가자, 대부 여이기가 한왕에게 품한다.
"지금 우리에게 항복을 해 오거나 귀순해 온
각 고을의 왕자들을 그 고을의 후백(侯伯)으로 봉해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
그렇게 하시면 모두들 대왕의 성덕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복종을 하게 됨은 물론이려니와
장차 우리의 세력 확장에도 큰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육국 후백들의 인장(印章)까지 새겨 놓고,
불원간 여이기 노인에게 육국을 순방시켜 각국 왕자들을 그 나라의 후백을 봉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장량이 그 소식을 듣고 대경 실색하며 한왕에게 품한다.
"누가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정책을 건의했는지는 모르오나, 그런 어리석은 정책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 옛날 탕왕과 무왕 시절에는 각국 왕자들의 생살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지,
지금처럼 어느 한나라도 안정되게 장악하지 못 한 우리의 형편으로는 불가한 처사이옵니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도 항우와 정면으로 대결을 하고 있는 처지인 지라,
우리가 지금 각국의 왕자들을 후백으로 봉해 버리면,
그들은 우리와 초나라, 양쪽의 눈치를 보느라고 달가워 하지도 않을 것이옵니다."
한왕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여이기 대부가 그런 건의를 하기에 나는 육국 후백들의 인장까지 새겨 놓았는데,
선생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도 아니었소이다그려. 그러니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소이다."
그리고는 이미 새겨 놓았던 인장을 모두 깨뜨려 버렸다.
여이기 노인은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장량은 그 사실을 알고 어느 날 여이기 노인의 처소로 찾아가 머리를 정중히 수그리며 이렇게 사과하였다.
"소생은 그 정책을 대부께옵서 건의하신 줄을 모르고,
다만 국가를 위해 냉혹하게 비판했던 것이오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무릇 천하를 논할 때에는 시세의 강약을 보아 판단해야 옳을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지금 우리는 초나라의 영토를 절반 가량 점령하고 있음은 사실이오나, 항우의 세력은 아직도 막강하옵니다.
이러한 판국에 어찌 육국의 후백을 봉할 수 있으오리까 ?
대부께서는 한왕을 옛날의 탕왕처럼 생각하고 계시는 모양이오나,
우리의 힘은 아직 그만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보옵니다."
여이기 노인은 장량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는 듯,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내가 너무 성급한 판단을 했소이다.
나는 오직 대왕을 위해 그런 건의를 했을 뿐 다른 뜻은 없었으니, 선생은 양해해 주소서."
"소생은 선생의 충심을 모르는 바 아니옵니다."
여이기 노인은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왕께서는 이번에 항우에게 빼앗긴 영양성을 다시 탈환하려고 하시는데,
그 일에 대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그 계획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대부께서는 지금, 저와 함께 입궐하셔서,
그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대왕께 건의 하시면 좋겠사옵니다."
장량은 여이기와 함께 입궐하여 한왕에게 품한다.
"자고로 임금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들이 먹고 사는 것에 정책의 근본을 두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항우는 영양성을 점령하고도 창고에 가득한 곡식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하니 대왕께서 영양성을 탈환하시거든 창고 안의 곡식을 모두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도록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민심을 완전히 돌려 놓으면 영양성은 영원히 우리의 소유가 되어 버릴 것이옵니다."
한왕은 여이기 노인에게 묻는다.
"장량 선생의 건의를 대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
"신은 장량 선생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옵니다.
하루라도 속히 영양성을 탈환하도록 하시옵소서."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자 한왕은 한신을 조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자기 자신이 3군을 거느리고 영양성 공략의 길에 올랐다.
한편, 팽성으로 떠나간 왕릉은 팽성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성안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애초부터 성을 점령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아니하 고,
성안의 민심을 소란하게 만들어 항우를 유인해 오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공격이었다.
왕릉이 10여 일을 두고 연일 공격을 퍼부으니 성안의 민심은 과연 소란해지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불안하였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군사를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외황으로 달려가 팽월을 치고, 다른 한 패는 남계로 달려가 영포를 치려 했었지만,
자신의 본거지인 팽성이 위헙을 받고 있다고 하니, 계획을 변경하여 팽성으로 급히 달려 올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항우를 팽성으로 유인해 오려는 장량의 계획이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었다.
왕릉은 항우가 성고성을 떠나 팽성으로 급거 돌아 온다는 소식을 듣자,
그날 밤으로 군사들을 거두어 영양성으로 다시 돌아와 버렸다.
그런데 항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히 팽성으로 돌아와 보니,
왕릉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성안은 멀쩡하지 않은가 ?
"왕릉은 간 곳조차 없는데 왜들 야단스럽게 굴었느냐 ?"
항우가 팽성을 지키던 장수들을 나무라니 그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폐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왕릉이 겁에 질려 도망을 간 것 같습니다."
마침 그때 비마가 달려와서 항우에게 아뢴다.
"적장 팽월이 대량(大梁)의 17개 성을 모두 점령하고 지금은 외항에 머물고 있사옵니다."
항우는 그 소리를 듣고 격노하며 한탄한다.
"내가 외항으로 바로 갔더라면 팽월이란 놈을 단박에 부셔버렸을 것인데,
방향을 바꿔 팽성으로 돌아온 것이 큰 실수였구나 ! "
(내게는 어찌하여 기신 이나 주가, 종공 같은 믿을 만한 충신이 한명도 없는 것일까 ... ?
쯔쯧...)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외항으로 달려가 팽월을 쳐부술 것이다 ! "
그러자 옆에서 항우의 낙담을 지켜 보던 항백과 종이매가 간한다.
"팽월 따위가 설사 대량을 점령했기로 무슨 대단할 것입니까 ?
폐하께서는 오랫만에 팽성에 돌아오셨으니,
잠시 숨을 고르시는 휴식을 하시옵고, 용저 장군으로 하여금 팽월을 치게 하심이 좋을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대번에 도리질을 하며 말한다.
"나를 배반한 영포가 유방을 도와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데다가,
한신이란 자는 지금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략하고 있어서 사태가 매우 험악하게 되었다.
제왕 전광(齊王 田廣)이 한신에게 밀려 구원을 요청해 왔으니 용저 장군을 제나라로 보내 제를 구하도록 하고,
나는 팽월을 때려부수기 위해 나 자신이 직접 출전해야만 하겠다."
그리고 항우는 3군을 거느리고 즉시 대량으로 떠나갔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항우였던 것이다.
....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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