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

거경대학에서 영주 무섬마을을 다녀와서

오토산 2020. 6. 21. 11:18

거경대학에서 영주 무섬마을을 다녀와서

 

화기리 인동장씨 종택 답사를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수도리 무섬마을에 도착을 하니

영주시 허강원 문화관광해설사사가 우리들을 안내하여 무섬마을을 답사하게 되었다.

 

무섬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과 고가가 보존되어 있는 전통마을로 '수도'라는 이름은 내성천이

마을을 3면으로 감싸안고 흐르며  그 가운데 섬(島)처럼 떠 있는 마을로 뒤로는 산을 배경으로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는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풍수지리상 우물을 뚫으면

마을이 가라 앉는다고 하여 빗물이나 강물을 이용하여 살아 왔다고 한다.

 

미을 입향조 박수(朴燧 1641~1729 반남박씨)선생이 1666년(현종 7) 마을건너 머름(遠岩)에서

이곳으로 분가하면서 터전을 이루었고  그 후 증손서인 김대(金臺 1732~1809 선성김씨)선생이

1757년(영조 33) 영주 삼판서고택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지금까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두 성씨가 집성촌이루고 살아오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3.1운동 이후 각 처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일본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여

여기로 본거지를 옮기고 동네주민들과 함게 아도서숙(亞島書塾)을 건립하여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100여가구 500여명이 살고 있었으나 1961년 영주지역 대홍수로 많이 유실되었고

지금은 해우당고택과  만죽재고택을 비롯하여 크고 격식을 갖춘 'ㅁ'자형가옥과

까치구명집, 겹집, 남부지방민가 등 다양한 형태의 구조와 양식을 갖춘 집들이  남아 있어서

주거민속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이 되고 있다고 한다.

 

선성김씨 입향조의 셌째집 손자 영주가 1830년 지었고 고종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김낙중이

1879년 중수를 하고 흥선대원군이 여기서 일주일 머물었으며 현판을 쎴다는 해우당고택과

마을입향조인 박수선생이 처음지어 '섬계초당'이라 불리다가 8대손인 승훈이 중수하여

만죽재라 하였다는 만죽재고택과 만죽재고택 앞에 있는 섬계고택,

배우지 못하여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고 관직을 못하였으니 충성을 하지 못하였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어 효도를 못하였고 재산을 모으지 못하여 곳간에 양식이 없었다는사무당과

무송헌종택 등 마을을 한바퀴 돌아 무섬자료전시관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끝이 났다.

 

무섬마을의 명물인 외나무다리는 다음기회에 건너보기로 하고 오늘의 답사를 마쳤다.

무섬마을은 집성촌으로 대문이 없고 풍수지리에 따라 우물이 없고 농토가 없는 3무 마을이었고

마을에는 시장을 보러가는 길과 학교를 가는 길, 농사를 지으러 다니는 길 등이 있었으며

농사를 지으러 다니던 외나무다리는 원래 직선으로 놓여 있었으나 새로이 설치하면서

'S'자모양으로 설치를 하였고 지금은 관광의 자원으로서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며

옛날 부녀자들은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와서 꽃상여를 타고 서야 이 곳을 떠날수 있었다는

애환이 전하기도 한다는 해설사님의 설명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영주지역의 서원과 고택등을 답사하면서 

자연속에서 敬을 수행하면서 덕행을 실천 하셨던 선현들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하루를 보낼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여 주신 거경대학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함께 하여주신 모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