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열전(漢高祖 列傳) (134)
기인(奇人) 괴철
곡양에 진을 치고 한제와 대치하고 있던 진희는
한신의 심복 부하인 호상이 가져온 밀서를 받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한신의 조언대로 도성인 장안(舊:함양)으로 직접 쳐들어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은 밖으로부터 쳐들어가고, 한신이 내부에서 준동해 준다면,
한나라를 거꾸러 뜨리기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진희는 커다란 야망을 품고 군사를 막 발동시키려고 하는데, 참모 하나가 급히 달려오더니,
"큰일났습니다.
한신 장군이 여 황후의 손에 주살되어, 그의 수급이 지금 적의 원문(轅門)에 높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하고
알리는 것이 아닌가 ?
"뭐야 ?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
진희는 기절 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우리 측 군사들이 지금 정찰을 나갔다가 한신의 수급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와 말하는 것입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육가라는 자가 한신의 수급을 함양에서 가져와
우리들에게 보여 주려고 원문에 높이 매달았다고 합니다."
진희는 그 말을 듣고 대성 통곡하며 탄식한다.
"한신 장군과 나는 굳게 언약한 바가 있었거늘,
장군께서 돌아가셨다면 이제는 만사가 허사로구나 ! "
바로 그때 비마가 달려와 급히 말한다.
"한군이 총동원하여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삼십리 밖까지 접근해 왔으니, 속히 대비책을 갖춰야 합니다."
이에 진희는 눈물을 거두고 방비 태세를 갖추기에 정신이 없엇다.
모든 대장들이 진희에게 진언한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일시에 돌격전을 퍼붓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진희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한다.
"한 덩어리가 되어 돌격하기보다는, 전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좌우에서 협공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다."
진희는 부대를 좌우로 배치해 놓고 한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유방은 한신이 주살되었음을 알고 나자, 전군에 전원 동원령을 내리며 말한다.
"한신이 죽었으니 진희가 의기 소침해져서, 이제부터는 공격보다도 수비에 주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격 일변도로 진희를 철저하게 때려부수기로 하자."
유방이 군사들을 곡양까지 몰고 와서 대장들에게 새로운 군령을 내린다.
"이제부터 적에게 총공격을 퍼붓기로 하겠다.
그에 앞서 번쾌와 왕릉은 군사 1만 명씩 거느리고 곡양 북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진희가 그쪽으로 도망해 오거든 벼락같이 들고일어나 진희를 생포해 버려라.
그리고 주발과 주창은 1만 명씩 거느리고 그보다 후방에 매복해 있다가, 적이 쫒겨오거든 가차없이 때려부숴라.
관영은 번쾌와 왕릉, 주발과 주창의 군사들이 모두 포진을 하는대로 적진으로 정면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라."
다음날, 관영이 적진으로 정면 공격해 쳐들어가니, 진희가 말을 달려 나오며 큰소리로 외친다.
"한군은 지난날 나에게 크게 패한 바 있거늘,
아직도 물러갈 생각을 아니하고 또 덤벼오는가 ?"
그 말을 듣고 관영은 다짜고짜 덤벼들며 말한다.
"이 역적놈아 !
잔소리 말고 나와서 칼을 받아라 ! "
그러나 호락호락 굴복할 진희가 아니어서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두 맹장이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기를 무려 30여 합. 마침내 진희는 북쪽으로 거짓 쫒기기 시작하였다.
그쪽에는 유무와 초초가 진을 치고 있었기에, 관영을 그쪽으로 유인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양곡 북쪽으로 달려와 보니 우군(友軍)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한군에게 매수되어 버린데다가,
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싸울 생각을 접어버리고 도망을 처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진희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우군을 찾느라고 우왕좌왕 하고 있노라니까,
돌연 숲속에서 번쾌와 왕릉의 군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총공격을 퍼부어 오는 것이 아닌가 ?
진희는 혼비 백산하여 번쾌를 우회하여 북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못가서 이번에는 길가에 매복해 있던 주발과 주창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
그야말로 나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는 진퇴 양난이었다.
그리하여 갈팡질팡 살아날 길을 찾고 있노라니까 뒤를 추격해 온 번쾌가 벼락같이 달려들며,
"이놈아 ! 마지막 칼을 받아라 ! "하고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진희의 목을 한칼에 날려 버리는 것이었다.
진희의 목이 날아가자,
그를 따르던 군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저마다 무기를 내던지면서
두 손을 번쩍 들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이로써 진희의 반란은 완전히 평정한 셈이 되었다.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진희의 수급을 성문위에 높이 매달아 놓고 백성들을 따듯하게 위무해 주었다.
민심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유방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유방은 개선군을 거느리고 장안(舊: 함양)으로 돌아오니
여 황후가 만조 백관들과 함께 멀리까지 영접을 나왔다.
유방은 개선의 축하를 받으며 여 황후에게 물었다.
"한신이 죽을 때에 어떤 애기를 합디까 ?"
여 황후가 대답한다.
"형리(刑吏)들의 말에 따르면, 한신은 처형되기 직전에
<나는 괴철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날 이런 꼴로 죽게 되었구나 !> 하고
개탄해 마지않았다고 하옵니다."
"괴철 ... ? "
괴철이란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기에 유방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다.
"괴철이라는 자가 도대체 누구냐 ?"
그러나 괴철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방은 대궐로 돌아오자 괴철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만조 백관들을 모조리 불렀다.
"한신이 처형되기 직전에 <괴철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죽게 되었다>고 개탄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괴철이라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누가 아시는 분이 계시오 ?"
그러자 육가가 나서며 아뢴다.
"괴철은 본시 제(齊)나라 태생으로, 기변(機變)이 능란한 기인(奇人)이옵니다.
한신은 지난날 연(燕)나라를 정벌했을 때, 괴철과 친교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때 괴철은 한신에게 독립(獨立)할 것을 여러차례 권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괴철이 한신에게 모반을 권고한 이론은 <삼국 분립론>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상을 위하여 천하를 통일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주상과 항우, 그리고 한신 세 사람이 천하를 삼등분 하여 나눠 갖도록 하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신은 괴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주상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에,
괴철은 그때부터 미친 사람으로 행세하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사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렇다면 괴철이라는 사람은 지략이 출중한 현인이 아니오 ?
육 대부는 그 사람을 찾아 나를 만나게 해줄 수는 없겠소 ?"
육가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구름처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그를 찾아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오나,
폐하께서 그를 기어이 만나 보고 싶으시다면 사람을 놓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육가는 그날로 종자 10여 명을 데리고 제나라로 괴철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도착한 국경 지방의 군수인 이현(李顯)을 만나 괴철의 소재를 물어보았다.
"괴철은 미친사람 입니다.
그는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그를 찾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언젠가는 집을 제공해 주면서 정착(定着)시켜 보려고 했지만, 그는 그것조차 거절하고,
지금도 구름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괴철이야 말로 어찌할 수 없는 미치광이입니다."
육가가 군수에게 다시 말한다.
"나는 황명에 의해 괴철을 찾아 나선 것이오.
그러니까 군수는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셔야 하겠소."
이현은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놀란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미친 사람을 무엇에 쓰시려고 육 대부를 일부러 보내셨다는 말씀입니까 ?
제가 보기에는 괴철은 아무데도 쓸모없는 미친 사람일 뿐이옵니다."
이현은 괴철을 어디까지나 미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육가는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말한다.
"군수는 괴철을 정말 미친 사람으로 알고 계시는 모양이구려.
그러나 괴철은 계획적으로 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있을 뿐이지,
진짜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하오."
그러자 이현은 깜짝 놀라며 묻는다.
"엣 ? 괴철이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
미치지 않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돌아다닌다는 말씀입니까 ?"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 점은 차차 알게 될 것이오.
아무려나 나는 황명에 의해 그 사람을 꼭 찾아야만 하겠으니, 군수가 협력을 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면 관리들과 사람을 놓아 괴철을 찾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괴철은 술에 취하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떠돌아 다니는 버릇이 있으므로,
어디선가 반드시 찾아낼 수 있기는 할것 입니다."
이현은 그날부터 관리와 사람들을 사방으로 보내어 괴철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10여 일 후, 옷이 남루하고 머리가 봉두 난발(逢頭亂髮)인 40객 미치광이 하나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시골 거리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한 관리에 의해 발견되었다.
물어 보나마나 그가 바로 괴철임이 틀림없엇다.
그는 슬픈 가락으로 노래를 씨부려대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육국을 병합하여 진나라가 삼켰도다
六國兼倂兮 爲泰所呑 (육국겸병혜 위태소탄)
나라에 호걸이 없어 뒤를 이어가지 못했도다
內無豪傑兮 罔遺後昆 (내무호걸혜 망유후곤)
진시황이 자실함에 초나라에 멸망했도다
秦始自失兮 滅絶於楚 (진시자실혜 멸절어초)
초가 잘 다스리지 못해 한나라 임금 손에 넘어 갔노라
楚罔脩政兮 屬之漢君 (초망수정혜 속지한군)
항우를 오강에서 몰아쳤음은 그 누구의 힘이었던가
烏江逼項兮 伊誰之力 (오강핍항혜 이수지력)
세상에 좋은 수가 있었으니 천하를 어찌 독점할 수 있으리오
下天奇謀兮 豈客獨存 (하천기모혜 기객독존)
한신이 그 점을 깨닫지 못함이여 작은 감투에만 눈이 어두웠도다.
乃不自悟兮 尙恩國爵 (내불자오혜 상은국작)
하루 아침에 죽임을 당함이여 화와 복이 모두 끝났도다.
一朝遭烹兮 禍福無門 (일조조팽혜 화복무문)
술에 취해 거짓 미치광이질을 하자니 세상이 어둡고도 어둡구나.
伴狂沈醉兮 且自昏昏 (반광침취혜 차자혼혼)
...
괴철은 혼자 웃고 울며 노래를 불러대고 있었다.
그를 찾아 다니던 관리들은 얼른 괴철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며
그 역시 미친 사람인 것처럼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미쳤거니와 그대도 미쳤는가 ?
우리 미친 사람들끼리 주막에 들어앉아 술이나 한잔씩 나누세."
괴철이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미친 사람들끼리 술을 나누자니, 내 어찌 사양하리오.
그대 돈을 가졌거는 마음껏 취해 보세."
관리들은 괴철을 술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그가 괴철이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정색을 하며 이런 수작을 걸었다.
"우리들은 부귀와 영화에 뜻이 없어,
며칠 후에는 머나먼 나라로 나그네의 길을 떠날 생각입니다."
괴철은 그 말을 듣고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정색을 하며 이렇게 반문하였다.
"나는 깊은 사연이 있어 미치광이 짓을 하며 떠돌아다니거니와,
당신들은 무슨 이유로 부귀와 영화를 마다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려고 하시오 ?"
관리들이 대답한다.
"우리가 미치광이 노릇을 하며 방랑의 길에 오르려고 하는 것도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오.
그러나 누가 알면 큰일이이까, 그 사연만은 말하지 않겠소이다."
괴철은 그런 말을 들으수록 두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옷깃을 바로잡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두 분은 어떤 분인지, 이름이나 알고 헤어집시다."
이에 관리들이 대답한다.
"우리 두 사람은 본시 조(趙)나라 태생으로 회음후 한신(淮陰侯 韓信)을 진심으로 사모해 오던 사람들이라오.
회음후가 초왕으로 계실 때에는 심복 부하로서 많은 총애를 받아 왔었지요.
그런데 회음후가 무고(誣告)로 여 황후의 손에 주살되고 삼족(三族)까지 절멸(絶滅)되었으니,
세상에 그런 비참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
회음후께서는 처형을 당하는 최후의 순간에
<아아, 나는 괴철의 간언을 듣지 않은 죄로 오늘날 이 꼴이 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시더라는 말도 들었소.
이렇게 회음후가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따라 죽지를 못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오.
그래서 이제나마 모든 명리를 다 버리고, 무작정 방랑의 길을 떠나려는 것이오."
괴철은 그 말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말이 없었다.
두 관리가 다시 말을 한다.
"실상인즉,
우리는 길을 가다가 선생의 노래를 듣고, 혹시 선생이 괴철 선생이 아니신가 싶어
이렇게 술집으로 모시고 오게 된 것이오.
생각컨데, 한신 장군은 영원 불멸의 공적을 수없이 세우신 천하의 영웅이셨소.
그런 어른이 일개 여자의 손에 어이없게도 돌아가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구려."
그리고 두 관리는 짐짓 눈물을 뿌리며 주먹으로 가슴을 두두려 보였다.
그러자 괴철도 슬픔을 참고 견딜 수가 없었던지,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오열(嗚咽)하듯 말했다.
"한후(韓侯)께서 그런 일을 왜 진작에 깨닫지 못하시고 어이없게도 여자의 손에 돌아가셨는지, 철천지한이오.
나 역시 주인을 잃었으니 누구를 믿고 살아가리오."
괴철은 무심중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방문이 탕 ! 하고 열리면서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진작부터 괴철을 끈질기게 추적해 오던 육가였다.
육가는 방안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괴철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으며 호통을 친다.
"그대를 다시 만나게 되었소 !
예전에 한신 장군에게 삼권분립을 주장하던 괴철 당신이 맞구려 !"
아무려니 괴철도 이때만은 무척 당황해 하며,
"아니 당신은 그때 그... ! "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러자 육가는,
"그렇소,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그대를 체포하러 온 대부 육가요 ! "
육가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수가
형리를 몰고 들어와 괴철에게 다짜고짜로 결박을 짓는 것이 아닌가 ?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괴철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괴철이 순순히 바깥으로 끌려 나오자 육가가 형리들에게 명한다.
"이 분의 포승(捕繩)을 당장 풀어 드려라 ! "
그리고 이번에는 괴철에게 정중한 어조로 말한다.
"선생은 미친 사람 행세는 그만 하고, 이제부터 장안으로 황제 폐하를 만나 뵈러 가야 하겠소."
그러자 괴철은 아무런 반항도 아니 하고 육가가 하라는 대로 하였다.
이윽고 수레를 타고 장안으로 떠나게 되자,
육가는 수레 위에서 괴철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옛날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시세(時勢)를 알고, 어진 사람은 주인을 잘 택한다고 하였소.
한제는 천명을 타고나신 천하의 주인이시오.
그러기에 한(韓)나라에서 재상까지 지내신 장량 선생조차도 지금은 한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계시다오.
이렇듯 천하의 대세가 이미 한제에게 기울어졌거늘 선생만이 고집을 부려 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 이름을 후세에 남기도록 하시오."
괴철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미치광이 행세를 하다가 마침내 대부의 손에 붙잡히게 되었으니, 이것도 천운인지 모르겠소이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한제를 기쁜 마음으로 만나 뵙도록 하겠소."
이윽고 유방은 괴철을 만나자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대가 한신에게 모반할 것을 부추겼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
이런 식으로 물어 붙이면 괴철은 응당 공포에 떨게 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괴철의 태도는 그게 아니었다.
괴철은 두려워하는 기색은 추호도 없이 당당한 어조로 대답한다.
"저는 한신 장군에게 <천하의 주인이 되라>고 충고한 일은 있어도, 누구를 모반하라고 권한 일은 없었습니다.
폐하는 무엇인가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유방은 괴철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모반을 권고한 것이 아니라 <천하의 주인>이 되라고 충고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아라 ! "
괴철이 다시 말한다.
"지난날 진(秦)이란는 <한 마리의 사슴>을 놓고 천하의 영웅들이
저마다 탐욕을 내며 싸운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
그때에 저는 한신 장군이야말로 천하의 주인이 될 수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몇 차례나 천하를 취하도록 충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한신 장군이 위대한 인물인 줄만 알았지, 폐하같이 훌륭하신 어른이 계신 줄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무지(無智)의 소치이지 어찌 배반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
만약 그때 한신 장군이 저의 충고를 받아 들였다면, 오늘날 저는 이처럼 초라한 신세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신 장군은 이미 돌아가시고 이제는 저만 남았으니,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고 속히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괴철의 태도는 초연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유방은 괴철이 모반을 기도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겠다.
한신더러 천하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나를 알기 이전의 일이었다면,
이제 나를 만나 보고 난 지금의 생각은 어떠하냐 ?"
괴철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장량 선생처럼 지혜로운 어른께서도 폐하께 충성을 다하고 계시다니,
한신 장군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는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모든 사물에는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니라.
이러나저러나 그대가 한신의 충신인 것만은 틀림이 없구나."
괴철은 머리를 깊이 수그리며 말한다.
"충신이라면 매우 부끄러운 충신이옵니다."
유방은 괴철의 충성심이 무척 갸륵하게 여겨져서,
"짐은 그대의 죄를 일체 묻지 않고 관작을 내려 주고 싶은데,
그대는 이제부터나마 짐을 도와줄 수 있느냐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괴철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단호하게 대답한다.
"저는 관작에 뜻이 없는 몸이옵니다
.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한신 장군의 공로를 생각하시와, 그의 유해를 저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면 저는 한신 장군을 그의 고향에 장사지내 드리고, 여생을 무덤지기로 보내고 싶사옵니다."
유방은 괴철의 충성심에 깊이 감명받아,
한신의 수급을 그에게 내려줌과 동시에 국고를 지출하여 무덤도 성대하게 축조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한신에게 박탈하였던 초왕(楚王)의 칭호도 추증(追贈)하여 백성들이 다시 그를 받들게 하였다.
천하의 명장이었던 한신은 무덤조차 없을 뻔했다가 다행히 괴철의 덕택으로
그의 고향에 무덤을 남겨 놓을 수가 있게 되었으니,
사람의 인연의 중요성이란 이렇게 큰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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