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 열전(漢高祖 列傳) (133)
명장의 최후
한신은 진희가 오랑캐를 토벌하고 대주에 주저 앉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형세를 보아 자기는 내부에서 들고 일어나 유방을 일거에 거꾸러뜨리고,
천하를 대번에 장악할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진희의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유방은 진희의 반란을 토벌한다며
40만 대군을 몰고 친히 원정길에 나서는 것이 아닌가 ?
한신은 비밀리에 사람을 놓아 양군(兩軍)의 대치상황을 알아 보았다.
그런데 심부를을 다녀온 사람이 알려온 바에 따르면, 진희는 곡양에 진을 치고,
유방은 한단에 진을 치고, 첨예하게 대치(對峙)중이라는 것이 아닌가 ?
한신은 그 소식을 듣고 혼자 한탄한다.
(진희가 장강을 앞에 두고 한단에 진을 쳤다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나,
그와는 반대로 한제가 한단에 진을 치고,진희는 곡양에 진을 치고 있다니,
진희가 불리할 것은 확실하다.)
지리(地理)와 병법에 능통한 한신은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장소만 보고도 승부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에 초초함을 느끼던 한신은 진희에게 밀서를 보냈다.
<한제가 지금 귀공을 정벌하려고 대군을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 갔지만
귀공은 한제와 싸울 생각을 말고 도성으로 직접 쳐들어 오시오.
그러면 내가 내부에서 들고 일어나, 우리는 한나라를 일거에 뒤집어 엎을 수가 있을 것이오.>
한신은 밀서를 심복 부하인 호상(胡祥)에게 주면서 진희에게 급히 전하라고 하였다.
호상은 밀서를 품고 집을 나오다가 또 다른 한신의 부하인 사공저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은 단짝 술친구여서, 사공저는 호상을 만나기가 무섭게 대뜸 술집으로 잡아 끌었다.
"이 사람아 !
지금 한신 장군님의 급한 심부름을 가는 길이어서 안 되네..."
그러나 사공저는 호상의 손을 한사코 끌어당기며 말한다.
"예끼 이 사람 !
아무리 급한 심부를이기로 술 한 잔 마실 시간이야 없겠나 ?
꼭 한 잔만 하고 보내 줄 테니 어서 들어가세."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행길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가 술고래에다가 고주망태인지라,
술을 일단 입에 댄 이상 한잔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두 사람간에 주고 받는 술이 두 잔 석 잔이 열 잔이 되어,
마침내 곤드레만드레가 될 때까지 술을 계속해 마시고 말았다.
한편, 한신은 호상을 진희에게 보내 놓고 나서 또 다른 심부름을 시키려고 사공저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 보아도 사공저는 행방이 묘연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하인이 말하기를,
"사공저가 오늘 낮에 행길가 주막에서 호상이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습니다."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공저가 혹시 나의 비밀을 알고,
호상이에게 밀서를 빼앗아 내려고 계획적으로 술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
한신은 비밀이 탄로날까 싶어서 사공저가 돌아오기를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공저는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한신은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하였다.
(만약 내가 진희와 내통하는 사실이 탄로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
한신은 마침내 마당으로 나와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가슴을 죄고 있으려니까,
사공저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그런데 사공저는 술이 억망으로 취해있는 것이 아닌가 ?
한신은 화가 치밀어 올라 자기도 모르게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
아침에 나간 놈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다가 술이 떡이 되어 이제야 나타났느냐 ! "
사공저가 만약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한신에게 감히 말대꾸를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망으로 취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신에게 대들 듯이 큰소리로 이렇게 외쳐댔다."
"술을 마시다가 좀 늦었기로 왜 야단이시오.
내가 무슨 역적모의라도 하다가 돌아왔단 말이오 ?"
말할 것도 없이 사공저로서는 취중에 되는 대로 씨부려댄 말이었다.
그러나 한신은 <역적 모의>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사공저의 입에서 <역적 모의>라는 말이 취중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지만,
한신으로서는 자신의 비밀을 사공저가 모두 알고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취중의 그를 붙들어 맞대 놓고 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기에,
한신은 하인을 불러 이렇게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술이 취해 미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자기 집으로 끌어다가 잠을 재우게 하여라."
한신은 그렇게 둘러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저놈을 살려 두었다가는 큰일나겠구나.
오늘 밤 안으로 저놈을 감쪽같이 죽여 버려야 하겠다.)하고 결심을 하였다.
사공저를 집으로 쫒아 버리고 내실로 들어오니,
마누라 소씨 부인(蘇氏夫人)이 마주나오며 걱정스럽게 묻는다.
"사공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한밤중에 그렇게 야단을 치셨습니까 ?"
한신은 지금까지의 경위를 마누라에게 상세하게 말해 주고 나서,
"저놈을 살려 두었다가는 큰일이 나겠으니,
오늘 밤 안으로 아에 죽여 버려야 하겠소."하고 말했다.
그러자 소씨 부인은 머리를 흔들며 말한다.
"죽여도 오늘 밤에는 죽이지 마시옵소서.
아무리 감쪽같이 죽여도 오늘 밤에 죽이면,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죽였다고 생각할 것이옵니다."
한신은 마누라의 충고를 옳게 여겨, 사공저를 며칠 후에 죽이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런데 그 일이 한신의 운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을 것인가 ?
한편, 사공저는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나니,
마누라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남편을 나무란다.
"어젯밤 당신이 한신 장군한테 술주정을 무섭게 했기 때문에 장군이 당신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술이 취했기로서니 그렇게나 위,아래를 몰라 보고 막 해댄대요 ?"
사공저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면서 말한다.
"내가 한신 장군께 술주정을 하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
나는 하나도 기억이 없구먼..."
"아무리 취중이기로 한 장군에게 <역적 모의>를 했는니 어쩌니 하고 마구 대들었으니,
한 장군이 당신을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지 않아요 ?"
"뭐야 ?
내가 한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붙였다구 ?
내가 아무리 취중이라도 그런 주정을 했을 리가 없을텐데..."
"뭐가 아니예요 ?
다른 사람들 모두가 당신이 그렇게 말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합디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지금 벼슬이 떨어져서 지내는 분에게 <역적> 운운이 뭐예요,
세상에 참 !..
"하여튼 이제는 당신이 크게 경을 치게 생겼으니 지금이라도 급히 손을 써 두세요.
그렇잖으면 당신은 한 장군 손에 죽게 될지도 몰라요."
이에 사공저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렇다면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아닌가 ?
도망이라도 가야지...)
사공저는 부랴부랴 보따리를 싸들고 도망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도망을 치면 어디로 갈 것이며,
또 도망을 치게 되면 처자식은 영영 못 만나게 될 게 아닌가 ?
사공저는 보따리를 싸들고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옳타 ! 무턱대고 도망을 갈 것이 아니라,
소하 승상께 부탁을 하여 한신 장군에게 용서를 빌도록 하자.
승상께서 중간에 나서 주시면, 한신 장군인들 설마 나를 죽이려 들진 않겠지... ?)
사공저는 죽지 않으려고 그런 방도를 써 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승상댁에는 전에도 심부름을 수 없이 다니던 일이 있었기에, 부랴부랴 소하 승상을 찾아갔다.
승상 소하는 사공저의 말을 듣고 내심 크게 놀랐다.
그러잖아도 한제는 원정을 떠나며 승상에게,
"내가 없는 사이에 한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의 동태를 엄격히 감시하오."하는
특별 부탁까지 하지 않았던가 ?
소하가 사공저에게 묻는다.
"아무리 취중이기로 네 입에서 <역적 모의> 운운 한 것은 이만저만한 실언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네가 알기에, 평소부터 한신 장군한테 그럴만한 어떤 사실이라도 있었던 것이 아니냐 ?"
사공저는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한동안 생각해 보다가 자기 변호를 위해 이렇게 대답하였다.
"특별히 의혹을 살 만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의혹을 살 만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의혹을 살 만한 일이 전혀 없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
소하는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였다.
사공저는 내친김에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한신 장군은 <호상>이란 심복 부하를 진희 장군에게 밀사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원정 길에 오르신 이 판국에,
다른 사람도 아닌 진희에게 밀사를 보낸다는 것은 중대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사공저는 취중에 호상에게 무심코 들었던 말을 그대로 고해 버렸다.
그 말을 들은 소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한신이 진희에게 밀사를 보낼 정도라면,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통을 해온 것이 확실하지 않은가...?)
소하는 사공저를 달래어 집에 가서 기다리라 하며 보내 버리고,
대궐로 급히 달려들어가 여 황후(呂皇后)에게 사실대로 품고하니,
여 황후가 크게 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주상께서 원정 길에 오르시며,
승상과 나를 은밀히 불러 <한신의 동태를 각별히 감시하라>고 엄명을 내리신 일이 있지 않소 ?
그런데 한신이 진희에게 밀사를 보낼 정도로 모의(謨意)가 분명하다면 승상은 한신을 속히 처치해 주시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소하는 그로부터 며칠 후 아무도 모르게 옥중에 갇혀있는
진희와 얼굴이 비슷한 사형수 한 명을 끌어내게 하여 목을 잘랐다
. 그리고 그의 머리를 나무 상자에 넣어 가지고 일반에게 공개하면서,
"황제께서는 반란의 주모자인 진희를 완전히 정벌하시고, 그의 수급을 도성으로 보내 오셨다.
이로써 전쟁은 완전히 끝났기에, 내일 아침에는 승상부에서 경축식을 거행할 것이니,
만조 백관들은 빠짐없이 모두 참석하도록 하시오."하는 통고문을 군신들에게 모조리 돌려 놓았다.
한신에게도 통고문을 보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신은 그 통고문을 받아 보고 크게 실망하였다.
진희가 그렇게도 어이없게 패망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축식에는 갈 생각이 없이 집에 눌러 있으려니까,
소하가 별도의 특사를 시켜 편지를 보내 오는 것이 아닌가 ?
<오늘 같은 경축 행사에 국가의 원로인 장군이 참석을 아니하시면 되겠습니까 ?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장군께는 특별 포상을 내리시겠다는 기별이 왔으니,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오늘의 경축 행사에는 꼭 참석을 해주소서.>
소하
한신은 소하의 편지를 받아보고 우선 마음이 놓였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비밀이 탄로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승상 소하는 평소에도 자기를 무척 아껴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 ?
소하가 이처럼 호의를 보이는데 끝까지 참석을 아니 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아,
한신은 내실로 들어와 부인에게 말한다.
"입궐을 해야 하겠으니 새옷을 내주시오."
소씨 부인은 그 소리를 듣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란다.
"일전에 황제가 원정을 떠나실 때에도 병을 빙자하여 전송조차 안 가셨던 양반이,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입궐하시겠다는 것이옵니까 ?"
소씨 부인은 예감이 좋지 않았던지,
남편의 입궐을 적극 반대하면서 이렇게도 말하는 것이었다.
"여 황후가 섭정(攝政)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도 당신은 병을 빙자로 찾아 뵙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갑자기 입궐을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이옵니까 ?"
한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다.
"승상이 <오늘 경축 행사에는 꼭 참석해 달라>고 간곡한 친서를 보내 왔으니,
승상의 체면을 보아서도 아니 갈 수가 없는 일이 아니오 ?
더구나 황제는 돌아오는 대로 나에게 특별 포상을 내리겠다는 전지(傳旨)까지 보내 왔다고 하니,
암만해도 오늘은 입궐해야만 좋을 것 같구려."
지혜롭기 그지 없는 한신도 <특별 포상>이라는 미끼에 판단력이 크게 흐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소씨 부인은 예감이 너무도 불길하여 또다시 반대하고 나온다.
"저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오늘은 입궐을 아니 하셨으면 싶사옵니다
. 당신이 입궐하셔도 여 황후가 별로 반가워하지도 않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입궐하시겠다고 하시옵니까 ?"
한신은 웃으면서 마누라를 달랜다.
"여 황후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수요.
여 황후는 일개 아녀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오.
그가 나를 감히 어쩔 수가 있겠소.
황제가 돌아오시면 나는 다시 득세(得勢)를 하게 될 판인데, 이 기회를 놓쳐 버릴 수가 있겠소 ?"
한신은 어떡하던지 세상을 또다시 휘둘러 보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마누라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경축 행사에 참석하고 말았다.
이윽고 축하식이 끝나자,
여 황후는 내전으로 들어가며 승상에게 명한다.
"내가 두 분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승상은 회음후(淮陰侯:한신)와 함께 곧 편전으로 들어와 주시오."
한신은 그때까지도 별다른 낌새를 채지 못하고 소하와 함께 편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장락전(長樂殿) 내문(內門)으로 막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
대문 뒤에 숨어 있던 4,50명의 장사들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한신에게 결박을 지어 버리는것이 아닌가 ?
한신은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네놈들이 나를 포박하느냐 ! "
그러나 아무리 소리치고 몸부림을 쳐도 때는 이미 늦었다.
소하는 한신을 굽어보며 추상같이 꾸짖었다.
"장군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계실 것이오 ...
여봐라 !
황후 마마께서 특별 분부가 계실 것이니,
죄인을 장락전 단하에 꿇어앉혀 놓아라 ! "
승상 소하는 이미 한신이 믿고 있던 소하가 아니었다.
한신은 소하에게 감쪽같이 속은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눈앞이 캄캄해 왔다.
이윽고 한신은 결박을 당한 채 장락전 단하에 꿇어앉히게 되는 몸이 되었다.
한때는 천군 만마를 질타하며 유방조차도 우습게 여겨 왔던 천하의 명장 한신이었다.
유방은 10만 군사를 거느릴 능력밖에 없지만 자신은 군사를 얼마든지 거느릴 능력이 있다는
<다다 익선>이라는 말까지 써 가면서 호언 장담(豪彦壯談)을 했던 불세출의 명장 한신이었다.
그처럼 자신이 만만했던 한신이기에, 장락전 단하에 결박을 당한 채 꿇어앉혀 있는 지금, 그
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회한(悔恨)이 먹구름처럼 뭉개고 있었다.
(마누라가 그처럼 만류했건만 내가 왜 고집을 부려가며 입궐했던가....!)
(괴철이 삼국 분립(三國分立)을 그토록 권고했건만,
나는 왜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의 그늘로 다시 돌아와 버렸던가...!)
그러나 아무리 뉘우쳐도 후회는 막급이었다.
곧이어 여 황후가 대청 마루에 나타나더니,
한신을 굽어 보며 추상같은 호령을 내린다.
"죄인 한신은 듣거라.
주상께서는 그대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무명 장수에 지나지 않았던 그대를 원수로 발탁하시어 군권을 일임하였으며,
그대의 전공(戰功)에 따라 제왕(齊王)에 봉했다가 초왕(楚王)으로 전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모반(謨反)을 기도했으므로
황제는 운몽(雲夢)까지 몸소 가셔서 그대를 생포해 오신 일도 있었다.
그때에 그대를 마당히 죽여 버렸어야 옳을 것이로되,
관인 후덕하신 황제는 그대를 죽이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회음후(淮陰侯)라는 관작까지 내려 주셨다.
주상은 그대를 그처럼 사랑하셨건만,
그대는 성은을 배반하고 진희와 결탁하여 또다시 모반을 기도했으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
여 황후의 질타는 준열하기가 그지없었다.
한신으로서는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떤 죄인을 막론하고 자신의 죄를 처음부터 인정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한신은 머리를 들며 말한다.
"신은 진희와 결탁하여 모반을 기도한 일이 전혀 없사옵니다.
증거가 있다면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여 황후는 한신을 노려보며 다시 꾸짖는다.
"그대가 아무리 죄상을 부인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대는 <호상>이라는 심복 부하를 시켜, 진희에게 밀서를 보낸 사실이 있지 않느냐 ?"
한신은 끝까지 부인할 생각에서 말한다.
"누구한테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모르오나, 신은 진희에게 밀서를 보낸 일이 전혀 없사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사람의 이름을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렇다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분명히 밝혀 주리라.
나에게 그 사실을 밀고한 사람은 그대의 심복 부하인 <사공저>였다.
이래도 부인하겠느냐 ?"
한신은 사공저의 밀고로 비밀이 탄로난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그러나 죄상을 부인할 여지는 아직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사공저는 밀서의 내용까지는 알고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여 황후에게 이렇게 항의하였다.
"사공저가 신의 부하임에는 틀림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그자는 고주망태일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밥먹듯 하기로 유명한 놈이옵니다.
마마께서는 저의 하속배(下屬輩)가 무책임하게 지껄인 말을 믿으시고,
국가의 동량인 신을 어쩌면 이렇게도 가혹하게 다루시옵니까 ?"
그러자 여 황후는 크게 노하며 별안간 불호령을 지른다.
"이 역적놈아 ! 아가리 닥쳐라.
황제께서 진희를 주살하신 뒤에 네가 진희에게 보낸 밀서도 이미 압수하고 계시다.
그 밀서의 내용에 의하면,
진희가 도성으로 쳐들어 오기만 하면 너는 내부에서 들고일어나 한나라를 일거에 뒤집어엎겠다고 했다는데,
네놈은 그래도 죄상을 부인할 생각이냐 ?"
이것은 한신에게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소하가 꾸며 낸 거짓 심문이었다.
그러나 한신은 여후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의 밀서가 한제의 손에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여후는 한신의 모반을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측근에게 추상같은 명령을 내린다.
"여봐라 ! 저놈을 당장 끌어내어 목을 베어라.
그리고 저놈의 삼족(三族)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주살하여라."
한신은 형장으로 끌려가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아아,
나는 <삼국 분립>을 하라는 괴철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가 결국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신세가 되었구나.
아아, 괴철의 충언을 ...
괴철의 충언을 ... ! "
천하의 영웅이었던 한신은 회한의 눈물을 뿌리며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때는 대한(大漢) 11년 9월 11일이었다.
한신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순간,
일월은 광채를 잃은듯 천지가 갑자기 어두워 지고, 산과 들에는 검은 안개가 짙게 드리워지었다.
한신이 주살되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백성들과 병졸들이 저마다 눈물을 흘리며,
"한신 장군은 천하를 통일하는 데 영원 불멸의 공을 세웠건만,
소하 승상은 그 점을 생각해서라도 여 황후에게 왜 특사를 내리도록 간언하지 않았던가 ?"하고
승상 소하를 나무라기까지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전야를 누비며 천군 만마를 마음대로 주무르던 천하의 명장 한신이
다른 사람도 아닌 일개의 여자에 불과한 여 황후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웃지 못할 희비극이었다.
그리고 한신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한제 유방은 안도와 함께
비통으로 얼룩진 눈물을 뿌리며 혼자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아, 아까운 명장이 죽었구나 ...!
한신 같은 명장은 전고에도 없었거니와 차후에도 다시는 나오지 못하리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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