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옥몽(속 금병매) <64>
정옥경은 단번에 이사사로 부터 양 아들이 되어 이은병가는 의남매가 되는데...
겨우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가 청색 비단옷을 입고,
머리는 소주(苏州)쪽머리를 하고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들고 들어 왔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 나셔서 머리를 만지고 계십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서 차나 한 잔 드시고 계시소서."
하고는 말을 붙여 볼 틈도 주지 않고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옥경은 뭔가 물어 볼려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실소를 짖는다.
백옥같이 하얀 찻잔에든 차를 한모금 마셔보니
은근한 향내가 목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은행씨를 다려 꿀을 넣은 차였다.
차를 마시고 또 한참동안 아무 기척도 없어 옥경은 속으로 사사란 여인의 의도를 알 수없었다.
돌아 가란 것도 아니고 기다리란 것도 아니니 어쩌야 하나 하고 번민에 젖어 있는데,
황금색 줄무늬의 녹색 저고리를 입고, 은색 바탕의 비단 조끼를 걸친 또 다른 계집아이가
객청 안쪽의 주렴을 살짝 걷으며 얼굴만 빼꼼히 내어민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어머님이 서재에서 뵙자하니 저를 따라 오세요." 하고는
앞장서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간다.
정옥경은 이제 만나게 되나 보다 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옷 소매를 위엄 있게 툭하고 털고는 웃음띤 얼굴로
아장아장 걸어가는 계집아이 뒤를 따라간다.
객방을 나가서 후원 정원을 가로질러 구불구불한 낭하를 걸어 가는데,
사방이 이름 모를 정원수로 정돈 되어 있는데 기암괴석과 사철수 꽃나무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아담한 호수를 지나 화려한 누각 안에 있는 서재에 안내되어 온지도 한시진이 지나 갔다.
가져다 놓은 찻잔의 차는 다 식었 건만 이사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옥경은 일어나 이리저리 장식되어 있는 서화와 글씨 그림속의 화제를 읽어 본다.
남향에 펼쳐진 대리석 병풍 속 산수화 그림 한점,
솟구친 산, 쏟아지는 폭포수 산 허리 휘감은 안개구름.
일필휘지 화제(画题)의 날아가는 듯한 필치 옆엔,
붉은 인주 선명한 옥쇄(玉玺)!
왼쪽 벽 족자 글씨, 승천하는 용의 꿈트림인가?
자세히 다가서서 눈을 크게 떠서 읽어보니,
그 이름도 유명한 문여가(文与可) 화가에게 보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 소동파(蘇东坡)의 글씨구나!
오른쪽에 걸린 그림, 석양의 노을든 풍경이라,
자세히 닥아서 눈을 밝혀 화제보니,
역대 최고의 북종(北宗) 화가 미전(米颠)화상이
옛날 조대년(赵大年)의 <원산창로(远山苍老>를 복제한 것이구나.
상아 박힌 침대에는 정밀히
조각된 용머리와 봉황 날개, 붉은 비단 보료에는
세밀히 수놓아진 십 장생의 동물들 자단나무 서가에는 빼곡히 꽂혀진 도가(道家)의 비급들,
홍목나무 책상에는 골고루 갖쳐진 최고급 문방사우(文房四友).
창문 밑 탁자에는 수없는 소나무, 향란(香兰) 분재.
창문 밖의 새장에는 유혹하는 앵무새의 노래소리...
정옥경이 정신 없이 열심히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주렴이 걷히면서 아리따운 네 명의 여인들이,
비빈들이 사용하는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화사한 중년 여인을 에워싸고 들어섰다.
이사사가 틀림 없었다.
키는 보통 수준에 키였지만,
옷은 궁중에서나 입는 복장으로 겉에는 엷은 꽃무늬 망사가 수놓아진 비취색 적삼을 걸쳤고,
속에는 소상강의 풍경이 수놓아진 하얀 비단 솜옷을 입고 있었다.
정옥경은 화사한 이사사의 자태를 대하자,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끓고 큰 절을 올렸다.
말쑥하고 귀티나는 젊은이가 느닷없이 큰 절을 하자
이사사는 당항 하면서도 한편으론 흐뭇한 표정으로
" 이러시지 말고 어서 일어 나셔요." 하며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아 일으키는데 감미로운 향기가 정옥경을 혼란 스럽게 했다.
정옥경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사사를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절세의 미인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아, 하무십일홍(花无十日红)이라더니 설흔이 넘은 세월은 숨길 수가 없었다.
아! 아깝다, 정옥경은 속으로 탄식을 한다.
그러나 중년 여인의 매력적인 모습의 도톰한 입술과,
짙은 눈섶은 농염한 여인의 색정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개미같은 허리와 봉긋하게 위로 솟은 두 봉우리는
젊은 여인에 견주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어보였다.
자리에 앉은 정옥경은 먼저 생일 선물이 적힌 예첩을 정중하게 두손으로 바쳐 올렸다.
실제는 적원외가 이은병에 빠져 바치는 선물인데 정옥경은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이런걸 두고 화류계 전문 꾼들 사이에는 엽저투도(叶底偷桃)수법이라 부른다,
입사귀를 살짝 가리고 복숭아를 훔쳐 먹는다는 뜻이다.
<후생(后生) 정옥경이 돈수백배(顿首百拜)하며,
이모태부인(李母太夫人)의 천추(千秋)를 축하드리옵니다.
아울러 작은 성의를 바칩니다.>
예첩을 펼쳐본 이사사는 눈이 휘둥그레 진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물을 바깥 계단 밑에 펼쳐놓으니, <비단 한필에는 반짝이는 만수(万寿)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양털 옷감 한필은 섬서지방의 최고급 품인데 주홍색 함속에 담겨 있었다.
붉은 종이로 싼 것을 풀어보니,
양고기 육포, 구운 거위 두 마리, 삶은 돼지 뒷다리 둘, 우족발 네짝 이 나왔다.
과일 상자를 열어보니, 북쪽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남쪽지방의 열대 과일,
잣, 봉률(棒栗), 용안(龙眼)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밖에도 말린 문어 열마리, 표고버섯 닷근, 샥스핀 두근, 제비집 다섯개와
강남 명주 금귤주(金橘酒)가 두 항아리 외 이름도 모르는 여러 물건이 나왔다.
이사사는 선물을 보고 나니 옥경이가 더 준수하고
나이에 비해 안목이 높아 보여 다시 한번 그를 자세히 본다.
또한 처음 보는 준수하게 생긴 젊은이가 언제 봤다고,
어머님 어머님 하며 비위를 맞추어 주니, 온
몸이 간지럽고 쑥스러운 느낌이 들면서도 한층 더 귀엽고 호감을 가지게 했다.
"호호, 정말 귀여워,
옛 양귀비가 안록산(安祿山)에게 했던 것 처럼,
나는 이 녀석을 양자(养子)로 삼아 내 옆에 놓고 즐기며 살아 볼까?
얼굴도 준수하고 나이도 젊고 기본 덕목도 갖춘 것 같으니 말이다.
호호호. "
호감을 가진 이사사는 생각에도 없던 주안상을 준비하라 분부를 한다.
정옥경은 벌떡 일어나며 속으로는 그래 내 생각되로 되어가는 구만 하고
쾌재를 부르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는 말한다.
"아니 아닙니다!
어머님 오늘은 생신이라 특히 바쁘실 텐데 소자가 번거로움을 끼쳐야 되겠습니까?
이만 소자 물러 가겠습니다. "
"호호호! 날더러 어머님이라면서?
그럼 여기가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 인데 무슨 번거로움,
어미는 쾐찮아 호호호, 이리와서 앉아."
이사사는 농담까지 하면서 하대를 하며 옥경을 편하게 대해준다.
정옥경은 마지 못해 앉는 척 하면서 가라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 했던 속을 쓰러 내린다.
주안상이 차려지는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차를 권한다.
계수나무 이슬로 다렸다는 송차(松茶)였다.
젊은 여자 아이들이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는 팔선왜칠탁(八仙倭漆卓)에는 이름 모르느 온갖 희귀한 안주가 차려져 있고,
감람(橄榄), 포도, 약편(药片), 평파(萍婆)등의 과일과 조림, 산나물, 해산물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정옥경은 타고난 재주꾼 답게 눈치껏 옆에 올라온 은 주전자를 들어
사사에게 어머님 생신 축하 드립니다, 만수무강 하세요!
하며 정중히 술한잔을 올린다.
사사는 젊고 준수하게 생긴 옥옥경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사사는 이제까지 남자들에게 술을 따라 주기는 했지만
진지하게 남자가 따라 주는 술잔을 받아 보기는 생전 처음이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사는 옥경에게 잔을 돌려 주며 넘칠 정도로 가득 부어준다.
그리고는 무운이를 불러 그의 귀에 대고는 무언가 이야기를 하자
무운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총총 걸음으로 주렴을 밀치고 안으로 사라졌다.
술잔이 서너순배 돌았을 때였다.
기녀 무운과 또 한명의 여인이 주렴을 들치고 들어오는데
그뒤를 자태가 고운 한 소녀가 뒤따라들어 오는데
옥경은 그 소녀를 보자 온몸이 굳어지듯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되었다.
한마디로 천상의 선녀라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듯 하였다.
나름대로 한량들 중에서 베짱과 담이 세다고 하는 정가 였으나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 그저 안절부절 못한다.
홍도화같이 익은 두 뺨, 꿈 나라에서 하강 한 듯.
연녹색의 눈썹 화장, 님의 품 속에서 바로 온 듯,
수줍은 여인의 부끄러움 안고.
버들 허리는 파릇파릇 봄기운,
매끈한 몸매 무한한 풍류의 정.
주르룩 봄비에 잃지 않은 향기,
매화 가지 선명한 자색 한 방울.
정옥경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두소매를 가지런히 하고는 젊잖게 읍(揖) 을 한다.
옆에 앉아 있던 사사가 소녀를 소개한다.
"내 딸 은병이야.
이제 서로 남매가 되었으니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말투로 보아 사사는 옥경이를 정말로 양아들로 인정 하는 모양이다.
은병은 잠시 어리둥절하여 놀란듯 하더니,
이내 분위기를 알아채고는 사사의 말에 대답을 하듯이 정옥경을 향하여
오라버니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자,
옥경이도 나도 아름다운 누이를 두어 너무 행복해 하며 답을 힌다.
이렇게 하여 두 청춘 남녀는 졸지에 의남매가 된 것이다.
세명이 자리에 앉자,
주위에 있는 기녀들이 생황과 고쟁을 연주하자
은은한 음률이 주연장을 휘감고 돌아 황홀하고 감미로운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다.
어린 동자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술과 안주를 날라 왔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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