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밤의 여왕

오토산 2022. 1. 21. 05:58

사랑방이야기 (318)

밤의 여왕


거지 여자아이가 대장간 화덕 옆에서

거적때기를 덮고 밤을 새우고 나와 국밥집 앞 쓰레기통을 뒤지는데
옆에서 웬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어디 보자.”

 

여인의 한마디에 거지 아이가 놀라서 일어서자

그 여인은 아이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거지 아이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더니 두말없이 따라갔다.
걸음걸이가 살랑살랑 경박스러웠지만

금박공단 장옷에서 삐져나온 치마도 비단옷이었다.
그녀가 들어간 집은 포구에서 멀지 않은 아담한 기와집이다.

 

여인은 안마당에 들어서더니

“삼월아,

얘 아침상을 차려줘라”고

한마디 하고서 계속 거지 아이를 훑어봤다.

 

바깥 날씨는 쌀쌀했지만

아이의 차림새가 워낙 지저분해 쪽마루에 개다리소반을 놓았다.
하얀 쌀밥, 고깃국에 조기 구이 한 마리!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싹싹 긁어 상을 비우자

삼월이도 그 여인도 빙긋이 웃었다.

 

“삼월아,

가마솥에 목간 물 좀 데워라.”

그 여인이 조용히 나무통의 물을 저으며

 

“옷을 벗고 들어오너라” 하자

거지 아이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따뜻한 나무통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여인이 거지 아이가 입던 옷을 아궁이로 처넣었다.
지난여름에 씻고 처음이라 때가 새까맣게 온몸을 도배했다.

 

“이름이 뭐냐?”

 

“오미화라 합니다.”

 

“촌스럽다.

몇 살이냐?”

 

“열한 살.”

 

“못 먹어서 여덟 살 골격이다.

쯧쯧쯧쯧 ….”

 

그 여인은 미화의 몸을 씻으며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더듬었다.
목욕을 마치고 안방으로 와 감싸고 온 치마를 치우자

미화가 옹크리고 주저앉았다.

 

“일어서거라.”

 

미화는 거역할 수 없었다.
여인은 미화의 엉덩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화는 덜컥 겁이 났지만 꾹 참았다.

 

“너는 오늘부터 이 집 식구다.

나를 이모라 불러라.”

 

삼월이가 장터에 후딱 다녀오더니

미화의 속옷부터 치마 세벌, 저고리 세벌을 사왔다.

 

“오늘부터 너의 이름은 세리다,

오세리. 알았지?”

 

“네. 이모님.”

꿈같은 일이 불과 반나절 사이에 일어났다.
‘이게 진정 꿈은 아니겠지?’
미화는, 아니 세리는 자기 볼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이모네 집은

제물포의 최고급 요릿집으로 점심 한상,

저녁 한상 하루에 딱 두 번 예약 손님만 받았다.

손님상에는 우아하게 차려입은 이모가 항상 함께하며 농담과 웃음을 나눴다.
손님들이 가고 나서 요리상을 들고 부엌에 들어오면

반도 안 먹은 산해진미를 찬모와 삼월이가 먹으며 세리도 불러들였다.

 

세리는 선천적인 붙임성으로

출퇴근하는 찬모와 살짝곰보인 삼월이를 깍듯하게 대했다.

 

세리는 이모와 안방에서 잤지만

가끔 넓지 않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건넛방에서 삼월이와 잘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삼월이가 솜으로 세리의 귀를 막았다.

사실 이모는 풍매라는 이름으로 제물포에서 알아주는 기생이었다.
천하의 명기도 세월한테는 이길 수가 없어 서른이 되자

눈 밑에 자글자글 주름이 지고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들던 벌떼· 나비떼도 더는 찾아들지 않았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기둥서방한테 전대를 맡겼던 기생들은

나이가 차면 하류 기생이 돼 장돌뱅이들한테 엽전 몇 닢을 받고

몸을 팔거나 들병이가 되기 십상인데 풍매는 영리했다.

 

벌과 나비가 찾아들 때 돈을 모았다가

새파란 기생들한테 밀리자 서슴없이 그 바닥에서 나와 요릿집을 차린 것이다.
자식도 없고 신랑도 없는 풍매는 늙고 병들었을 때를 대비해

딸을 하나 만들어야 했다.

 

요릿집과 기생집은 전혀 다른 장사다.
풍매의 원대한 계획은 딸을 앞세워 결국은 기생집을 차리는 것이다.

일 년이 지나자 세리가 꽃처럼 피어났다.
어느 날 풍매는 삼월이가 보는 앞에서 세리를 앉혀놓고

 

“오늘부터 나를 엄마라 불러라.

너는 내 딸이다”라고 했다.

 

감격한 세리가 일어서더니 큰절을 세 번 올렸다.
그 나이 때는 하루가 다르게 인물이 변하기에

풍매는 일 년 동안 세리를 유심히 지켜봤다.

 

삼월이한테 들었던 얘기인즉

풍매의 딸 후보가 둘이나 들어왔다가 다섯 달· 아홉 달 만에 쫓겨나고
세리가 딸로 최종 낙점을 받은 것이다.

세리는 일곱 살 때까지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 사자소학· 동몽선습을 떼

글 실력에 풍매가 깜짝 놀랐다.

 

풍매는 요릿집 치부책을 세리에게 맡겼다.
어느 날 손님들을 보내고 얼큰히 술이 오른 풍매가

 

“세리야,

네가 갈 길은 두 갈래다.
너의 생모가 걸었던 길을 갈래,

내가 걸어온 길을 갈래?”라고 물었다.

 

가난에 찌들어 약 한첩 제대로 못 써보고

죽은 어머니의 길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세리는

 

“살아계신 엄마의 길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세월이 흘러 세리는 아리따운 여인이 됐다.
세리는 독특한 미모를 뽐냈다.

색기(色氣)를 뿜으면서도 지적(知的)이었다.

 

요리상에 둘러앉은 손님 사이에 풍매 대신 가끔 세리가 앉기도 했다.
제물포 최고의 요릿집에 오는 손님들은 돈 많은 거상이거나 벼슬아치들이다.
세리의 미모와 재기 넘치는 화술에 혀를 내두르지 않는 손님이 없었다.

 

풍매는 요릿집으로 돈을 벌 생각이 없다.
요릿집은 장차 문을 열 기생집의 맛보기였다.

그때 제물포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기생집이 매물로 나왔다.
풍매도 잘 아는 기생 출신 주인 여자의 기둥서방이

소금 장사를 한다고 통 크게 놀더니 쫄딱 망해 기생집을 안고 넘어진 것이다.

 

풍매가 얼른 계약금을 찔렀다.

요릿집을 팔아 중도금까지 치렀는데 잔금 천이백 냥이 문제였다.
잔금 치러야 할 날짜는 보름도 남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쫓아다녀도 팔백 냥이 모자랐다.

 

풍매가 잔금을 못 구해

계약이 무효가 된다는 소문이 제물포에 파다하게 퍼져

돈놀이하는 큰손들이 일부러 돈줄을 막아버렸다.
기진맥진한 풍매가 드러누웠다.
그 와중에 세리는 가출을 했다.

 

‘난파선에서 뛰어내린 것인가.’
풍매가 이를 갈았다.

사흘 만에 세리가 돌아왔다.
안방으로 들어가 드러누운 엄마,
풍매 머리맡에 앉아 품속에서 뭔가 꺼내 그녀 손에 쥐여줬다.

 

팔백 냥 돈표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풍매가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

잔금을 치르고 집문서를 받아왔다.

 

조기잡이 어선 다섯 척에,

청나라를 오가는 무역선 두척에,

염전을 십만 평이나 가진 황 선주가 요릿집에 들락거리며
머리를 얹어주겠다고 진즉에 세리에게 마수를 뻗쳤지만,

미소로 거절하던 세리가 이번에 황 선주와 새로 협상했다.

 

머리를 얹어주면 살림을 차려야 하는지라

세리는 초야권(初夜權)을 팔백 냥에 팔았던 것이다.
세리는 초야를 치르고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제물포 한복판 천여평 대지에 연못을 가운데 두고

기화요초 사이사이 날아갈 듯한 별당이

일곱 채나 빙 둘러앉은 기생집이 풍매 품에 안겼다.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집이 떠나갈 듯하고 청사초롱 불 밝히고
고수 장단에 흥겨운 창 소리 흐르니 손님으로 넘쳐났다.

청나라 광저우로 가는 황 선주네 무역선에 세리가 동승했다.
제물포에서 세개의 돛을 올린 용왕호는 높새바람을 안고

남서쪽으로 유유히 미끄러졌다.

 

스무하루 만에 주하이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 용왕호는 광저우에 닿았다.
황 선주는 휘청거리며 용왕호에서 내려 사업을 하러 가고

세리는 거기서 멀지 않은 천하의 색향(色鄕) 둥관으로 갔다.

 

둥관은 화류계에 몸담은 여인이면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유흥의 성지다.
한 달여가 지났다.

 

용왕호가 제물포로 출항하는 때를 맞춰

세리가 짐꾼을 앞세우고 포구로 돌아와 승선했다.
팔도강산 한량들이 세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색향 둥관에서 한 달 동안 배운 기상천외한 유흥업소 운영 기법을 써먹었다.
세리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지 못한 사람은 한량 행세를 할 수 없었다.

세리 엄마 풍매가 드러누웠다.
백약이 무효, 병은 점점 깊어가 곡기를 끊다시피 했다.
가을바람이 스산한 시월상달에 풍매가 눈을 감았다.
사십구재를 지내고 탈상을 했다.

기생집을 다시 열자

사십구재 때 언뜻언뜻 봤던 이십대 중반의 백면서생 선비가

나타나 품속에서 집문서를 내보였다.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풍매는 세리를 이용만 해먹고

재산을 물려준 사람은 결국 친정 조카였다.
세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네 주인 나으리,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달에 한번 그믐날에 치부책 결재를 해주십시오.”

 

과거에 매달려 스물다섯이 되도록 장가도 못 가고

골방에 처박혀 책만 보느라 세상 물정도 모르는 백면서생이
복잡한 기생집을 떠맡았으니 세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믐날이 되자

시골에서 백면서생이 제물포로 올라와

치부책을 결재하겠다고 기생집을 찾아왔다.

 

쉰 여명의 기생들이 제 옷을 찾아 입고

화장을 하느라 부산하고 각종 해산물이 들어오며 세리의 점검을 받고
하나하나 치부책에 기록하고 육류와 채소….
드넓은 부엌에서는 땅땅 칼질 소리에 집이 떠나갈 듯했다.

백면서생은 쪽마루에 앉아 얼이 빠졌다.
해가 지자 풍악이 울리고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백면서생은 내실로 모셔졌다.

 

술상이 들어오고

세리가 들어오고 문이 잠겼다.
이튿날 아침,

 

“서방님 잘 주무셨습니까?”

 

백면서생은 최면에 걸린 듯 세리에게 집문서를 넘겼다.
세리의 지시로 백면서생은 시골에서 이사와

요릿집 하던 그 집으로 들어갔다.

한 달에 한번 그믐날에 세리가 치부책을 들고 가면

백면서생은 보지도 않고, 봐도 뭐가 뭔지 몰랐다.

 

제물포에 거지들이 자취를 감췄다.

황 선주의 염전으로 가고,

조기잡이 배를 탔다.

 

그리고 다리 밑 움막집 거지들은

세리가 마련해준 열두 채의 집으로 들어가 살며
세리가 단골손님 거상들에게 부탁해 만든 일자리를 얻었다.
기생 세리는 개같이 돈을 벌어 정승처럼 썼다.

 

<sn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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