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이야기(307)
가슴에 박힌 못
최 대인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모으며
남의 가슴에 박은수많은 못을 모두 뽑아놓으면 한 자루는 될 것이고,
장리쌀을 놓아 남의 집안을 풍비박산 낸 게 몇 집이던가.
그렇게 천석꾼 부자가 된 최 대인은 모든 걸 얻었지만 소중한 걸 잃었다.
딸 셋 뒤에 애타게 바라던 아들을 얻었건만 금이야 옥이야 하던
삼대독자를 홍역으로 잃었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된 것인지 씨를 뿌렸다 하면 딸이다.
첩을 들이고 기생머리를 얹어줘도 딸, 딸, 딸….
딸이 아홉이나 됐다.
대가 끊어지게 생겼다.
용하다는 의원을 수없이 찾아다니며 날린 헛돈이 얼마이던가.
허구한 날 방구들이 꺼져라 한숨만 쉬던 최 대인이
어느 날 삿갓을깊이 눌러쓰고 탁발 온 노스님을 사랑방으로 불러들였다.
곡주를 마시다 아들 없는 한을 하소연했더니
별일도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기별을 할 테니 소승의 절에 한번 들르시오.
나무아미타불” 한다.
최 대인의 주기가 싹 가셨다.
실없이 사기를 당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데 이골이 났지만,
이번은 달랐다.
보름쯤 지난 어느 날,
행자가 찾아와 최 대인은 그를 따라 삼십 리 산길을 걸어 지눌사로 갔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산신당으로 가 노스님과 백팔 배를 올리고 나니
짧은 가을 해가 떨어지고땅거미가 내려앉았다.
행자가 최 대인을 요사채 구석방으로 안내하며
“불을 밝히지 마십시오”라고
한마디 던지고선 돌아가 버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똑똑’ 문고리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인의 살 냄새가 최 대인의 코를 스쳤다.
옷 벗는 소리가 나더니 조용해졌다.
최 대인이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여인의 속옷고름을 풀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노스님이 들러
“내년 칠월이면 최 대인의 시름이 사라질 거요”라고
말했다.
최 대인은 터질 듯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노스님이 사라졌는데도 연신 합장을 했다.
느려터진 세월이 흘러 이듬해 칠월이 됐다.
행자의 기별을 받은 최 대인은 한걸음에 지눌사로 달려갔다.
지난해 가을 깜깜한 요사채 끝 방에서 씨를 뿌렸던 그 여인이
산모가 돼 핏덩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고추를 보고 입이 찢어진 최 대인에게 노스님이
“저 아이 사주팔자에 열두 살까지
이 절을 떠날 수 없으니 그리 아시오”라고 말했다.
최 대인은 씨받이 그 여인에게
거금 삼백 냥을 주며 고맙다고 치하를 하고 또 했다.
최 대인은 사흘이 멀다 하고 지눌사를 찾아와 아들을 안았다.
노스님이 아이 이름을 갑주라 지었다.
최갑주는 어미 품에서 장마철 호박순처럼 쑥쑥 자랐다.
최 대인은 들락날락거리며 갑주와 산모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사다 나르고
지눌사에 중창불사 자금을 댔다.
갑주가 젖을 뗐을 때 그 어미,
씨받이 여인은 절을 떠나지 않고 지눌사의 공양주 보살로 눌러앉았다.
최 대인이 아들 하나 더 보려고 노스님에게 다리를 놓아
공양주 보살을 떠봤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열두 살 전에 절을 떠나 사가로 가면 화를 입는다는 사주팔자에
어린 갑주는사미승이 돼 노스님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불경을 익혔다.
갑주는 영특하고 그 아비와 다르게 심성이 착했다.
갑주는 꽉 찬 열두 살이 돼 의젓해졌으나
노스님은 기력이 쇠해져거동을 못하고 누워 지냈다.
“갑주야.”
“네, 스님.”
“내 말을 잘 듣고 평정심을 잃지 마라.”
“말씀하십시오.”
노스님이 기력을 다해 벽에 기대어 앉았다.
긴 한숨 끝에 노스님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최 대인은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갑주는 머릿속이 새카매졌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렸다.
“네 할아버지가 오래 병석에 누워 있느라
네 아버지가최 대인으로부터 장리쌀을 썼다가 너희 논밭이,
나중에는 집까지 최 대인에게 넘어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었다.”
노스님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최 대인으로부터
고리채나 장리쌀을 썼다가 망한 집이 한둘이 아니다.
너는 앞으로 최 대인의 외아들로 천석꾼 부자가 될 것이야.
최 대인이 남의 가슴에 박은 못을 모두 빼줘야 한다.”
며칠 후 노스님이 입적해 다비식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걸 갑주는 물끄러미 쳐다봤다.
최 대인 집으로 떠나기 전,
어미 공양주 보살이 갑주를 꼭 껴안았다.
“너의 아버지는
너를 잉태시킨 후 보부상이 됐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재가 불자인 양 이 절에 와서 먼발치에서 너를 보고 갔다.”
갑주는 탄생 비밀을 깊이 감추고
최 대인 집으로 들어가 삼대독자가 됐다.
갑주가 열여덟 살이 됐을 때 최 대인은 중병으로 드러누웠다.
갑주는 최 대인이 수많은 사람 가슴에 박았던 못을 하나하나 빼내기 시작했다.
낫을 들고 최 대인의 목을 따려고 올 것 같던 사람들이 송이를 싸들고,
손수 찾은 산삼을 들고 최 대인을 찾아와 눈물을 뿌리자
최 대인이삼대독자 갑주의 손을 잡고
“잘했다, 잘했어.”
목이 메었다.
십구 년 전, 그해 가을.
지눌사 요사채 구석방 칠흑 어둠 속에서
최 대인과 살을 섞은그 여인은 누구인가.
주막 주위를 배회하며 몸을 파는 들병이를노스님이 돈을 주고 불러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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