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박 대인의 귀향

오토산 2022. 1. 23. 23:05

사랑방이야기(309) 

박 대인의 귀향

 

 

 

만복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서당에 다니던 그는 지필묵 공방에 직접 찾아가 능숙한 흥정으로

종이와 붓과 먹을 싸게 사서 쏠쏠한 이윤을 남기고

서당 친구들에게 팔고 훈장님에게도 이문을 붙여 팔았다.

 

불알친구인 소백은

만복과 붙어 다니는 아삼륙이지만 성격은 딴판이다.

한마디로 만복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고 소백은 새가슴이다.

둘 다 서당엔 다녔지만, 과거를 볼 만한 재목들은 아니고

까막눈이나 면하자는 생각이다.

 

가까운 이웃인 두 집안은 부자는 아니지만

보릿고개를 별 어려움 없이 넘기는 중농 집안이다.

둘 다 차남이라 만복이도 소백이도 장가가서 고만고만한 논밭을 받아

세간을 났는데 바로 앞뒷집이다.

 

만복은 아들 하나를 낳더니만

어느 날 주막에서 소백을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자기는 이 촌구석에서 농사짓고는 못 살겠다는 것이었다.

 

“만복아,

논밭 팔아 장사한 사람치고 망하지 않는 사람 하나도 없다더라.

제발….”

 

소백이 한사코 말렸지만 만복이의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논밭 열다섯 마지기 중 여덟 마지기를 헐값에

부랴부랴 팔고 야반도주하듯이 고향을 등졌다.

한양에서 기반을 잡으면 데리러 오겠다는 만복의 말만 믿고

만복이 마누라는 안 그래도 땡볕 아래 농사짓기 싫던 차에 얼굴에 희색이 넘쳤다.

 

일 년 안에 데리러 오겠다던 신랑 만복이는

이년이 지나도 삼년이 지나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동네 우물가 여편네들은 만복이 색시가 머슴하고 배꼽을 맞춘다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부창부수라,

만복이 색시도 남몰래 집과 논밭을 팔아치우고

아기는 큰집에 맡기고선 머슴과 야반도주를 했다.

 

십여 년이 흘러 뿔뿔이 흩어진 만복이네 가족들

얘기도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빨간 댕기와 파란 수술로

장식한 당나귀가 마을에 나타났다.

말잡이가 몰려든 아이들에게 길을 물어 소백이네 마당에 들어섰다.

 

이튿날 아침,

소백이 당나귀에 올라타고선 온 동네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까닥까닥 동네를 떠났다.

 

당나귀는 만복이 보낸 것이었다.

말잡이는 소백을 ‘나리’라 부르며 깍듯이 모셨다.

가다가 날이 저물면 말잡이가 주막에 들어가 제일 좋은 객방을 잡아놓고,

저녁상을 물리면 너비아니 안주에 청주 술상을 올렸다.

소백이 돈주머니라도 풀라치면 어림없다는 듯이 말잡이 총각이 계산했다.

수다스러운 말잡이가 상전인 만복이 얘기를 할 때는 침을 튀겼다.

 

“나리 동네 논밭이다 집이다 몽땅 때려 합쳐도

우리 박 대인 나리 재산 반의반도 안 될 거구먼요.”

이런 얘기도 했다.

 

“박 대인 나리는

부인이 하나 첩이 셋이에요.”

 

떠난 지 열여드레 만에 한양에 닿아 박 대인의 객주에 다다랐다.

대청 의자에 앉아 있던 만복이 버선발로 콰르르 마당으로 내려와

소백을 껴안았다.

 

“여봐라∼,

술상을 올리렷다.”

 

두 사람은 대낮부터 술잔을 연신 털어 넣으며 얘기를 끝없이 이어갔다.

소백이 조심스럽게 만복이 처와 아들 얘기를 했더니 만복은 껄껄 웃으면서

 

“제 팔자 제 운명대로 사는 거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마포나루터 가에 자리 잡은 만복의 객주는

성채처럼 드넓었고 늘어선 창고엔 온갖 물산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서른셋 객방에는 거상들이 진을 치고 있고 수많은 하인이

어깨를 부딪치며 바삐 움직였다.

 

박 대인으로 불리는 만복은 이곳의 왕이다.

소백은 한양에 보름 동안 잡혀 있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주지육림에 빠져 지냈다.

 

십여 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소백이 마을사람들과 툇마루에 앉아 추석을 향해

차오르는 달을 쳐다보며 금방 걸러낸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할아버지, 엄

마가 이거 드셔보시래요.”

 

손녀가 아직도 따끈따끈한 배추전을 한접시 들고 오자

소백이 엽전 한 닢을 고사리 손에 쥐여줬다.

 

“컬컬컬 허허허∼.”

 

그때,

열린 사립문으로 긴 달빛 그림자를 마당에 드리우며 누군가 들어왔다.

 

“누구시오?”

 

소백이 다가가자 달빛에 담뿍 젖은 이가

“나”라고 하더니 한참 뜸을 들인 후 “만복일세”라고 말했다.

 

“이게 누군가!”

소백이 힘껏 껴안았다.

 

십여 년 전 소백이 한양에 다녀와 입이 닳도록 자랑하던 박 대인,

그 만복이 아니었다.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지만,

그 좋던 풍채는 어디다 버렸는지 소갈병으로 바짝 마르고

몰골은 꾀죄죄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돌아보니 내 인생에서

발 뻗고 잤을 때는 고향 떠나기 전 농사지을 때뿐이었네.”

 

술 한 잔을 들이켜며 만복이 탄식했다.

기별을 받고 만복이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달려와

만복에게 큰절을 올렸다.

 

십년 전 소백이 한양에서 내려올 때

만복이 보낸 돈으로 논밭 스무 마지기를 사줘

스물세 살 만복이 아들은 탄탄한 중농이 돼 있었다.

'시링빙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과 심마니  (0) 2022.01.23
그때 그날 밤  (0) 2022.01.23
가슴에 박힌 못  (0) 2022.01.23
밤의 여왕  (0) 2022.01.21
"씹 겁 먹었다"의 유래  (0) 202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