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링빙야화

왕과 심마니

오토산 2022. 1. 23. 23:21

사랑방이야기(338)

왕과 심마니

 

왕이 손수 전쟁터에 나갔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적군과 교전도 없이 대치한 지 벌써 삼 개월째다.

소 세 마리, 돼지 열 마리에 술독이 바리바리 실려 왔다.

삼경이 넘어서야 술 취한 왕이 처소로 들어갔다.

 

계곡 건너 있는 적진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새벽닭이 울적에 불화살 하나가 창공을 가르자

‘와∼’ 적군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왕을 지켜라∼.”

 

병마절도사의 외침도 허공 속에 흩어졌다.

초병들도, 호위무사들도 지리멸렬 도망가기 바빴다.

 

“왕을 잡아라.”

 

혼자서 왕의 처소를 지키던 병마절도사도

적군 척후병의 칼날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속옷만 걸친 왕은 넘어지고 자빠지며 숲속을 기었다.

가시나무에 찔리고 바위에서 뒹굴고 나무에 부딪혀 온몸은 흙투성이,

피투성이가 되어 헉헉거리며 포수한테 쫓기는 짐승처럼 넝쿨 속을 헤쳤다.

세 칸 너와집에 다다라 처마 밑에서

 

“사람 살려” 하자

문을 열고 집주인이 나왔다.

 

“나는 왕이다.

나를 숨겨다오.”

집주인 홀아비 심마니가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왕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하고는

부엌으로 끌고 가 짚북데기 속에 처박아 넣고

마른 풀과 솔가지를 덮었다.

곧이어 횃불을 든 적군들이 들이닥쳤다.

 

“여기 웬 놈이 숨어들지 않았어?”

 

심마니는 시침을 뗐다.

적군들이 방 구석구석, 다락까지 뒤지더니 부엌에 들어가

창으로 짚북데기를 쿡쿡 찌르고는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부엌에서 어기적어기적 기어 나온 왕이 방으로 들어왔다.

망종이 지났건만 산골짝의 밤은 쌀쌀했다.

 

‘토끼꼬리’

여름밤은 금세 하얗게 날이 샜다.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더니

 

“상감마마∼

상감마마∼” 하며

한 떼거리가 들이닥쳤다.

 

간밤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끓이더니

궁녀들이 왕을 목간시키고 곤룡포를 입혔다.

 

심마니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목숨을 구걸하려고 가짜로 왕 행세를 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왕이네!

 

“상감마마,

소인을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아랫목에서 이불 덮고 자고

임금님을 윗목에 거적때기 덮고 자게 했으니….”

 

“껄껄껄 잘 잤네∼.”

 

궁녀들이 짊어지고 온 고리짝을 열더니

진수성찬을 꺼내 개다리소반 위에 수라상을 차렸다.

 

“여봐라 수저 한 벌을 더 놓아라.

이 집 주인과 겸상해야겠다.”

 

“아닙니다요.

안됩니다요.”

심마니가 손사래를 쳤지만

 

“짐의 명이로다.”

 

왕의 일갈에 마주 앉아 수저를 들었지만

도대체 수라상에 숟가락·젓가락질을 할 수가 없었다.

심마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다락문을 열고 항아리 하나를 꺼냈다.

 

“산삼에, 백하수오에,

백년 묵은 더덕에 칠점사(까치살모사)를 넣어

소주를 붓고 석청을 넣었습니다요.

이걸 드시면 하룻밤에 열 번도….”

 

오른 팔뚝을 사타구니에 대고 꺼떡꺼떡하자

숨죽이며 왕을 둘러싼 문무백관들이 아연실색이다.

왕은 껄껄 웃으며 말리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산삼 잡탕주 한잔을 쭉 들이켜고 심마니에게도 한잔 권했다.

 

“짐이야 이걸 마시고 열 번, 스무 번도 할 수 있다만

보아하니 홀아비인데 주인장은 어쩔 거야?”

 

심마니가 얼굴을 붉혔다.

왕이 입궐하려고 사인교 가마를 타고,

심마니는 까닥까닥 당나귀를 타고 뒤를 따랐다.

 

왕의 주위를 둘러싼 신하들과 궁녀들은

하나같이 왕의 말 한마디에 설설 기는데

투박한 심마니는 왕을 별로 겁내지 않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했다.

왕궁으로 돌아왔어도 심마니는 스스럼없었다.

 

왕은 어릴 적 고향친구를 만난 듯 끝없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심마니가 어쩌다 산삼을 캐면 저잣거리 약재상에 그걸 팔아

주막에 가서 진탕 술을 마시고

하루밤에 세 번씩 주모 치마를 벗긴 얘기를 하면 왕은 침을 삼키며 귀를 세워 들었다.

 

“자네 소원이 무엇인고?”

왕의 물음에 골똘히 생각하던 심마니 왈

 

“없습니다.”

왕이

 

“고운 색시 하나 짝지어 줄까?” 하자

심마니는 손사래를 치며

 

“여자를 데리고 살면 골치 아파요.

가끔씩 심을 보고 주모 치마 벗기는 게 좋아요” 하고

말했다.

 

“컬컬컬∼”

왕은 크게 웃었다.

 

“상감마마. 궁금한 게 있습니다.”

 

“또 그 질문인가?”

 

“네.”

 

왕은 그날도 씩 웃어치웠다.

이튿날 아침,

 

“여봐라∼”

왕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고함치자 도승지가 달려왔다.

 

“이 버릇없는 놈을

당장 끌어내 목을 치도록 하라.”

 

궁궐 뒷마당에 형틀을 갖다놓고

망나니가 입 안 가득 든 물을 칼에 뿜으며 칼춤을 추고

왕은 뒷짐 지고 분노에 찬 얼굴로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금부도사가 산발을 한 채 꽁꽁 묶인 심마니를 끌고 왔다.

입에는 재갈을 문 채 와들와들 떨며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봤다.

왕은 고개를 돌렸다.

 

심마니를 형틀에 묶고 망나니가 칼춤을 추다가 목을 치려는 바로 그 순간,

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금부도사가 심마니 몸을 묶은 포승줄을 모두 풀어줬는데도

그는 일어설 수 없어 엉금엉금 기었다.

왕이 다가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짐이 자네 집 부엌 짚북데기 속에 숨어 있을 때 심정이

바로 망나니가 칼춤을 출 때 자네 심정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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