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이야기(314)
그때 그날 밤
조선 숙종때 '이운봉'이란 사람이살았다.
열여덟 살 白面書生 '이운봉'은 단봇짐 하나 달랑 메고
문경(聞慶)새재를 넘고 탄금대(彈琴臺)를 지나
주막(酒幕)집에서 겨우 새우잠을 자며,
걸어걸어 '한양'에 다다라 '당주동' 구석진 여관에 문간방 하나를 잡았다.
과거가 한 달이나 남았지만 '한양' 공기도 쐬고 과거(科擧) 흐름도 잡을 겸 일찍 올라온 것이다.
허나,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 달 동안 먹고 잘 일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다.
자신이 '행랑(行廊)아범 노릇을 하겠다'며,
좁은 문간방 값을 깎고 또 깎아 다른 방의 반값에 눌어붙었다.
밤늦게 외출했던 손님이 돌아올 때면
얼른 나가 대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 마당도 쓸었다.
밥때가 되면 여관 밥은 비싸서 못 사 먹고 밖에 나가 선술집 국밥을 사 먹기도 하지만,
때 거르기를 밥 먹듯이 했다.
산적(山賊)처럼 생겨 먹은 '여관주인'은
'운봉'이를 제집 하인(下人) 다루듯 함부로 심부름을 시키고 툭하면 욕을 퍼부어 댔다.
하지만, 안주인은 달랐다.
바깥주인 몰래 누룽지도 갖다주고,
삶은 감자도 갖다주며 인정(人情)을 베풀어 어떤 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밤,
안주인은 닭죽에 호리병 가득 탁배기까지 챙긴 소반(小盤)을 들고 '운봉'이 방에 들어왔다.
바깥 주인한테 들킬세라 운봉이가 눈을 크게 뜨자 눈치 빠른 안주인은
“걱정하지 마!
그 화상은 노름판에 갔으니 내일 들어올지,
모레 들어올지 몰라.”
그러잖아도 배가 무척 고프던 참에
소반을 차고 앉은 '운봉'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닭죽을 비우고 나자,
안주인이 콸콸콸 탁배기 한 잔을 따라 주었다.
탁배기도 단숨에 들이켜고 나자 안주인이
“나도 한 잔 따라 주게.”
'운봉'이 술을 따라주자 술잔을 서슴없이 비우고 난 '안주인'은
한숨을 푹 쉬더니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여관에서 모은 푼돈이 좀 쌓였다 하면 이 화상은
노름판에 몽땅 처박아 버리고 화난다고 몇 날 며칠 술독에 빠져 살고~,
아이고~ 아이고~ 내 팔자야~.”
어느덧 호리병 탁배기가 바닥나자 '안주인'은 부엌에서 또 한 병을 들고 왔다.
마당을 가로지르며 장대비를 맞아 홑적삼이 몸에 짝 달라붙어
40代 초반의 흐드러진 육덕(肉德)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흐~~~,
'운봉'이의 양물이 홑바지를 뚫을 듯이 솟아오른 걸,
적삼을 벗으며 '안주인'이 뚫어지게 보더니 양물을 덥석 움켜쥐었다.
"나 좀 살려주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고 빨고 법석(法席)을 떨었다.
소나기 한줄기가 뿌리고 지나가자 옷매무새를 고치며 '안주인'이
"운봉이 자네는 이번에 알성급제(謁聖及第)하고
나중에 감사(監司)에 오를 걸세.”
'운봉'은 웃으며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스스쓱~ 글을 써 주었다.
'안주인'은 그걸 들고 호호호~ 하고 한바탕 웃었다.
세월(歲月)은 흐르고 흘러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평양 감영(監營)에 웬 노파(老婆)가 찾아와
'평양감사(平壤監司)의 이모'라며
감사(監司)를 만나겠다고 떼를 썼다.
평양감사(平壤監司)가
“나는 이모가 없는데…” 하며
노파(老婆)를 만났더니,
뜻밖에도 바로 그 옛날 당주동(唐珠洞) 여관(旅館)의 안주인이 아닌가!
"그날 밤에 써 주었던 종이를
기름 먹여 이렇게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감사(監司) 어른.”
그때 장난으로 써 준 종이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감사(監司)가 되면 천 냥으로 이 은혜를 갚으리다.
이운봉.’
감사(監司) 덕택에 평양 구경까지 잘하고,
보름 만에 한양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천 냥 보따리를 풀자
중풍(中風)에 걸려 누워 있던 남편이 눈이 휘둥그레져 사연을 물었다.
노파(老婆)는 이제 반신불수가 된 영감이 겁나지 않아,
그때 그날 밤일을 자세히 얘기해 줬다.
그러자 영감이 버럭 화를 내며 하는 말,
“야, 이 바보 천치 같은 여편네야!
기왕 주는 거 한 번 더 줬으면
이천 냥은 받았을 것 아닌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