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씨(孫氏)의 발원(發源) 종족의 생성이나 발생근원은 어느 나라에서도 신화(神話)나 전설(傳說)로 시작되며 연대 기록이 분명치가 않다. 현재의 첨단과학기술은 발굴한 유물(遺物)로 연대측정을 하지만 일개 씨족(氏族) 의 발생근원은 유구(悠久)한 인류사(人類史)에서 그 시점(始點)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씨가 현재 약 三百개로 이중 一百二十여개는 우리의 고유성씨이며 一百三十여개는 외부로부터 귀화(歸化)하거나 그 외의 조건이다. 옛 진한에서 시작한 손씨(孫氏)의 근원(根源)은 순수한 배달민족(倍達民族)으로 우리역사에 뚜렷하게 기록되어있다. 일제(日帝) 강점기에 식민지배(植民支配)를 강화하기위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歪曲)하고 더하여 동족 간에 싸움을 붙일 술책을 부렸는데 손씨 문중에도 손씨시조(孫氏始祖)의 유허비문(遺墟碑文)이 변조하였다. 특히 거공(秬公)의 후손부분이 삭제(削除)되었으며 이와 같은 잘못된 사실을 모르고 도처의 손 씨 문중의 발간족보에 변조된 비명(碑銘)의 사적을 문헌록(文獻錄)에 수록(修錄)하고 있으니 통탄(痛歎)할 일이다. 손효자 휘 순 유허비명(孫孝子諱順遺墟碑銘)의 목판원본(木版原本)을 이번 거공파보(秬公族派譜)에 수록하고 널리 알려 현제의 잘못된 비명(碑銘)을 공개하는 바이다. |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옛 진한지역(辰韓地域)에 육촌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 알평(謁平)이며 처음 정착한 곳이 표암봉(瓢巖峯)으로 이분이 급량부 이씨(及梁部李氏)의 시조이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며 처음 정착한 곳이 형산(兄山)으로 이분이 사량부 최씨(沙梁部 崔氏)의 시조이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 구례마(俱禮馬)이며 처음 정착한 곳이 이산(伊山)으로 이분이 모량부 손씨(牟梁部孫氏)의 시조이다. 넷째는 취산 진지촌(觜山珍支村)이며 촌장이 지백호(智伯虎)로 처음 정착한 곳이 화산(花山)이며 이분이 본피부 정씨(本彼部鄭氏)의 시조이다. 다섯째로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은 지타(秪陀)이며 처음 정착한 곳이 명활산(明活山)으로 이분이 한기부 배씨(漢歧部裵氏)의 시조이다. 여섯째로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촌장은 백호진(白虎珍)으로 처음 정착한 곳이 금강산(金剛山)으로 이분이 습비부 설씨(習比部薛氏)의 시조이다. ▼ 동국사략(東國史略)에는 조선의 일민(逸民)이 동해의 해변에 살면서 육촌으로 나뉘어 져서 이것이 진한육부 (辰韓六部)가 되었다. 육부의 촌장들이 알천(閼川)의 언덕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에게 임금이 없으니 백성들이 모두 방종해지므로 덕(德)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셔야 될 것 같다고 하니 고허촌 소벌공(高墟村蘇伐公)을 위시한 여러 촌장들이 혁거세(赫居世)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도읍(都邑)을 정하고 진한 (辰韓)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 동국통감(東國通鑑)의 기록에는 신라 유리왕(儒理王) 九년(紀元前三十二年) 六村을 六部로 고치고 성씨(姓氏)를 하사(下賜)하셨는데 양산(楊山)은 부(部)로 올려 급량(及梁)으로 하고 성(姓)은 이(李)로 고허(高墟는 부(部)로 올려 사량(沙梁)으로 하고 성을 최(崔)로 대수(大樹)는 부(部)로 올려 모량(牟梁)으로 하고 성을 손(孫)으로 우진(于珍)은 부(部)로 올려 본피(本彼)로 하고 성을 정(鄭)으로 가리(加利)는 부(部)로 올려 한저(漢袛)로 하고 성을 배(裵)로 명활(明活)은 부(部)로 올려 습비(習比)로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 孫氏初降事蹟 ▼三國遺事曰辰韓之地古有六村一曰閼川楊山村長曰謁平初降于瓢巖峰是爲及梁部李氏之祖也突山高墟村長曰蘇伐 都利初降于兄山是爲沙梁部崔氏之祖也三曰茂山大樹村長曰俱禮馬初降于伊山爲牟梁部孫之祖也四曰觜山珍支村 長曰知伯虎初降于花山是爲本彼鄭氏之祖也 五曰金山加利村長曰秪陀初降于明活山是爲漢歧部裵氏祖也六曰明活山 高耶村曰虎珍初降于金剛山是爲習 比部薛氏祖也 ▼東國史略曰朝鮮逸民居東海濱分爲六村是爲辰韓六部會閼川(慶州府北川也)岸上議曰我輩無君主民皆放縱盍求有德者爲之主於是高墟村長蘇伐公等尊立赫居世位君都辰韓國 (漢宣帝五鳳元年甲子歲) ▼東國通鑑 曰新羅儒理王 (赫居世之太子南解王南解王之太子儒理王) 九年(漢光武健武八年壬辰也)改六部名仍賜 六姓以 楊山部爲及梁姓李 高墟部爲沙梁姓崔 大樹部爲牟梁姓孫 于珍部爲本彼姓鄭 加利部爲漢袛姓裵 明活部爲習比姓薛 (文獻)密城孫氏舊世譜) |
二. 시조 효자공 사적(始祖 孝子公 事蹟) 公의 휘는 순(順)이고 자(字)는 사구(士久)이며 신라 모량(牟梁) 사람으로 벼슬이 태자사인(太子舍人)이던 학산(鶴山)의 아들이다.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발(白永發)의 따님과 결혼하여 취향산(醉鄕山) 아래에 살았다. 부친이 일찍이 별세하여 집이 가난하였고 어려운 형편에서 아내 백씨(白氏)와 함께 품팔이로 노모(老母)를 봉양하는데 모친(母親)이 잡수시는 음식을 매번 어린자식이 가로채서 먹으니 公이 난처한 입장으로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렵게 나무를 해서 어머님을 간신(艱辛)히 봉양하는데 철없는 어린것이 매양 빼앗아 먹는 구료. 아이는 다시 낳을 수도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모시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버리고 효심을 다해 어머니를 봉양 하는 것이 어떻소.」라고 하니 아내 백씨가「당신의 뜻이 거와 같은데 그 효성스런 마음을 어떻게 거슬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아이를 업고 취향산(醉鄕山)의 북쪽 기슭으로 가서 땅을 무릎 깊이로 파고 아이를 묻으려하니 아내가 더 깊이 파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公이 한자 깊이 쯤 더 파는데 괭이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흙을 해치고 보니 겉이 매끈한 둥그런 물건이 하나가 있었다. 이것을 안아서 들어내고 보니 돌로 된 종(鍾)모양의 기이한 물건 이였다. 이상히 여겨 두드려보니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아내가 말하기를「아이를 묻으려하다가 이상한 물건이 나왔으니 이는 아이의 명복(命福)인듯하니 아이를 묻지 맙시다.」라고 해서 公도 그렇게 여기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리니 종소리가 왕궁까지 들리도록 울려 퍼졌다. 이 소리를 들은 임금님이 시종에게 이러기를 성(城) 밖 서쪽으로 가서 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하였다. 시종이 왕명 받고 찾아가서 확인하니 순(順)의 집이라, 종을 가지고 왕궁에 돌아와 임금에게 고하니 임금님이 사람을 시켜 종을 두드려 보고는 종을 취한 사연을 물었다. 종을 취한 자초지종의 사연을 들어보시고는 임금님께서 「기이(奇異)하도다 옛적에 곽거(郭巨)가 아이를 묻으려할 때 하늘이 금솥(金釜)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손순(孫順)이 아이를 묻으려고 하자 땅속에서 돌종(石鍾)이 나왔으니 이는 곽거(郭巨)와 경우가 같음이다」하시고 석종은 악부(樂府)에서 관리하도 록하며 公을 예우하여 한 구역의 좋은 집을 하사(下賜)하시고 해마다 쌀 오십 석의 세급미(歲給米)와 높은 벼슬을 내려주셨다. 이때가 신라 흥덕왕 10년 을묘년(乙卯年 西記 835年)이였다. 그 후 公은 월성군(月城君)으로 추봉(追封)되셨고, 묘소(墓所)는 모량촌(牟梁村)에 있으며 이 묘(墓)를 사람들이 효자능(孝子陵)이라고 하였다. <文獻>密城孫氏舊世譜 西紀二0一五年 乙未 七月 盛夏 밀성손씨구보(舊譜)에서 옮겨 씀 始祖孝子公事蹟 公諱順字士久新羅牟梁部人太子舍人諱鶴山子也娶牛芩太守白永發女焉居醉鄕山下父沒家貧與妻傭作以養老母有小兒每奪母食公難之謂妻白氏曰吾竭力樵採艱辛養母而無知兒子每奪之兒可復得母難再養莫若埋兒以終孝養妻曰夫志如此安能違其孝心耶乃負兒至醉鄕山北郊公掘地沒膝將欲埋之妻曰深掘可也公曰諾遂更掘尺餘忽於鎛端有鏗然之聲公異之左右排掘有一物磷滑而圓抱而出之卽石鐘也其形甚奇公試撞之其聲舂容可愛妻曰欲埋兒而得異物殆兒之福也 不可埋也公以爲然將兒與鐘而歸懸於樑而撞之聲聞于王宮謂左右曰西郊有鐘聲淸遠異常可尋得之左右尋至公家公以 鍾往焉王令人撞之而問曰何以得此公俱告所由王曰奇乎異哉昔郭巨埋子天賜金釜今孫順兒埋地出石鐘爾亦郭巨之類 也乃命藏之樂府賜公宅一區歲給米五十碩超陞爵秩卽新羅興德王十年乙卯歲也後封月城君墓在牟梁村前人稱孝子陵 <文獻> 密城孫氏舊世譜 |
三. 손효자 휘 순 유허비명 병서(孫孝子諱順遺墟碑銘 幷序)-(木板原本 해석) 손씨는 일찍이 신라에서 비롯했다. 신라에는 옛날 대수촌장이 있었는데 유리왕이 대수를 모량부 개칭하고 손씨를 사성(賜姓)하니 이이가 곧 손씨의 시조이다. 諱 順은 헌덕왕 때에 태어나 우잠태수 백영발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취향산 기슭에 살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이 가난하여 부부가 품팔이를 하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단 하나 있는 어린아이가 매양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지라 공은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겠으나 어머니는 다시 봉양할 수 없겠구나” 하고 서로 번 갈아가며 아이를 업고 북쪽 교외에 이르렀다. 아이를 묻으려고 땅을 파노라니 문득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오기에 들여다보니 다름 아닌 석종이라 부부가 하 놀랍고도 괴이하여 서로 이르기를 “이 영이한 물건은 아이의 복이라” 하고 드디어 아이를 업고 종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쳐보았더니 그 소리가 왕궁에까지 들렸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는데 사자가 그 유래를 상세히 아뢰었다. 왕이 이르기를 “옛날 곽거는 자식을 묻으려 함에 하늘이 황금 솥을 내리 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함에 땅이 종을 내어주니 효성에 감응하는 전후 두 일이 서로 꼭 들어맞는 도다” 하고 이에 명하여 종은 악부(樂府)에 간수하게 하고 공에게는 저택 한 구역을 하사하는 한편 해마다 쌀 50석을 관급(官給)하게하니 이 곧 흥덕왕 때의 일이었다. 이 사실은 신라사의 효행록, 조선조 삼강행실록 여지승람 등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공의 자손은 경주 밀양 평해의 세 관향으로 나뉘어 봉해졌으나 그의 원초인 즉 똑같이 경주에서 나왔었다. 경주의 후예에는 휘 사성이 있었으니 병조참의 증 참판으로 계성군에 봉해졌으며 그 아들 소는 계천군에 봉해졌는데 시호는 양민이며 그 아들 중돈은 김점필재 문인으로 호는 우재요 관(官)은 이판이며 시호는 경절로서 월성군에 봉해졌다. 그 아우 계돈은 현량과에 올랐으나 조정암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화를 입어 지평으로 증직됐다. 또 휘 시는 판관으로 임란에 창의하여 원종공신으로 녹공 되었으며 휘 종하는 주부로서 창의록에 등재되었으며 그 아우 종로는 현감으로서 병자년에 순절하여 승지로 증직되고 정려로 표정되었으니 그 사실은 존주록(尊周錄)에 실려 있다. 또 휘 덕승은 지평이요 휘 만웅은 부윤이다. 貫을 밀양으로 하는 갈래에서는 휘 긍훈이 있으니 려조를 도와 남쪽을 정벌한 공으로 광리군에 봉해졌고 휘 빈은 집현전 학사로서 밀성군에 봉해졌으며 휘 약수는 규정이요 휘 경검은 생원으로 호는 일재이며 휘 수는 관은 교리요 휘 영제는 호가 추천인데 퇴계문인이며 휘 기양은 정한강과 조지산의 문인으로 호는 오한이다. 휘 인갑은 임란에 순절하여 병판에 증직 되었으며 그 아들 약해는 부공을 따라 전사하여 판결사에 증직되었다. 휘 천우는 조남명 문인으로 호는 무송헌이며 휘 승선은 임란에 순절하여 승지에 증직 되었다 휘 서륜은 세종조 박사로서 순흥 정변 때 원사(寃死)되었으며 휘 비장은 부제학이요 휘 사(俟)는 예판으로 시호는 문헌이요 휘 홍적은 대교요 휘 전은 호가 검암이다. 貫을 평해로 하는 갈래에서는 휘 순효가 있으니 호는 물재요 시호는 문정이다. 팔도에 산거하는 모든 예손들이 번성하고 창성하여 고관대작의 청관현관이 또한 너무도 많아 다 기재할 수 없으므로 줄이어 개략만을 적을 뿐이다. 공의 옛 터전은 경주부의 북쪽 현곡면 우정리에 있으니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게 서리고, 수목이 울창하여 풍상도 침범할 수 없고, 초동목수(樵童牧豎)도 감히 범하지 못하는 가운데 갖가지 신령스러운 기적들이 있었다고들 하니 이 어찌 천신의 보살핌에서가 아니리요? 여러 후손들이 협모하여 장차 그 옛터에 돌을 세워 추모의 정성을 부치고자하여, 스승에게 명(銘)을 청하니 스승께서 감탄하시며 이르기를 “이 조상(祖上)있어 효(孝)로서 덕(德)을 쌓아 후손에게 넉넉히 물려주고, 이 후손이 있어 그 효(孝)를 이어받아 조선(祖先)의 아름다움을 빛내나니, 월성의 산천이 바뀌지 않는 한 손씨의 번창은 점쳐 보나마나 끝이 없으리로다.”하고 또한 명(銘)으로 이르기를 아득하여라, 그 맨 처음 대수(大樹)인 모량부(牟梁部)에 손씨 성을 임금이 내리시니 그 상서로운 길, 일찍부터 트였도다. 문물이 번성하던 흥덕왕 때에 공(公)이 비로소 우뚝 빼어났도다.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발의 따님에 장가들어 효성이 신명(神明)에 통달했나니 그 아름다움 곽거와 짝하였도다. 땅이 석종을 내어주니 하늘이 진정 복되게 함이로다. 임금도 가상(嘉賞)타 일컬으시고 저택 한 구역을 내려 주시고 늠인(廩人)에게 곡식을 잇게 하셨도다. 그런 뒤로 크게 번창하여 몇 갈래로 나누어지니 계성군(雞城君) 계천군(溪川君)은 혁혁(赫赫)하고도 열렬(烈烈)하며 광리군(廣理君) 밀성군(密城君)은 계계(繼繼)승승(繩繩)하였으며 승전계후(承前啓後) 물재공(勿齋公)은 평해(平海)의 세계(世系)로다. 조선조 이조판서 허전 성재문집(목판원본) 西紀二0一五年 乙未七月 盛夏 밀성손씨 四十一世世孫 희철(熙喆) 삼가 원문해석 孫孝子諱順遺墟碑銘 幷序 - (木版原本) 維孫氏肇發於新羅新羅舊有大樹村長瑠璃王改大樹爲牟梁部賜姓孫氏是爲孫氏之始祖也諱順生于憲 德王時娶牛岑太守白永發之女居醉鄕山下父歿家貧夫婦傭作以養老母只有一小兒每奪母食公謂妻曰兒可復得 母難再養相與負兒至北郊掘地將埋之忽鏗然有聲視之乃石鍾也夫婦驚怪相語曰此異物兒之福也遂負兒携鍾而 歸懸鍾於梁而撞之聲聞王宮王使人審之具奏其由王曰昔郭巨瘞子天錫金釜今孫順埋兒地出石鍾孝之所感前後 同符乃命藏鍾於樂府賜公宅一區歲給米五十石卽興德王時也事具載羅史之孝行錄國朝之三綱行實錄輿地勝覽 等書公之子孫分封爲三貫慶州密陽平海原其初則同出於慶州也慶州之後則有諱士晟官兵曹參議贈參判封雞城 君有子昭封雞川君諡襄敏子仲暾遊佔畢齋門號愚齋吏判諡景節封月城君有弟季暾登賢良科從學趙靜庵被己卯 禍贈持平有諱時判官以倡義功錄原從有諱宗賀主簿載倡義錄其弟宗老縣監丙子殉節贈承旨旌閭載尊周錄有諱 德升持平有諱萬雄府尹其貫密陽則有諱兢訓佐麗朝以南征勳封廣理君有諱贇集賢殿學士密城君有諱若水糾正 有諱敬儉生員號逸齋有諱洙官弘文校理有諱英濟號鄒川遊退陶之門有諱起陽遊寒岡芝山之門號聱漢有諱仁甲 壬亂殉節贈兵判子若海隨而戰亡贈判決事有諱天佑遊南冥門號撫松軒有諱承善壬亂殉節贈承旨有諱倫叙以世 宗朝博士死於順興之變有諱比長副提學有諱俟禮判諡文憲有諱弘績待敎有諱佺號儉巖其貫平海則 有諱舜孝號勿齋諡文貞諸裔之散居八域者蕃衍昌盛簪紳之淸顯者亦多繁不可盡載畧撮其槩焉公之舊址在府北 見谷面友亭里佳氣葱葱樹木蒼鬱風霜不能侵樵牧不敢犯種種有靈異之迹云豈天神護之而然耶諸后孫協謀將竪 石於遺墟庸寓追慕之誠乞銘於傅傅感而應之曰有是祖以孝蓄其德垂裕於後昆有是孫述其孝有休于先祖美矣哉 月城之山川不改則孫氏之昌熾不待龜筮而可期其無疆矣夫銘曰 遠矣厥初大樹牟梁王錫姓孫肇發其祥憲德盛際公始挺出娶于牛岑氏白永發孝通神明 匹美郭巨地出石鍾天實福汝王曰嘉乃其慶則篤賜宅一區廩人繼粟厥後克昌派分支別 雞林雞川赫赫烈烈廣理密城繩繩繼繼亦粤勿齋平海之世圭組蟬聯黼黻輝暎德業文章 往而並歲歷於千麗計不億友亭故里過者必式嗟嗟後裔是則是傚我銘于石勗玆來孝 朝鮮朝 吏曹判書 許傳 性齋文集(木版原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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