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방이야기(224~5)
무송
무과에 급제한 지 3년이 지났건만 도대체 발령장을 받을 수 없어 목을 빼고 기다리던 박무송은
단봇짐 하나 꾸려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병조판서 집 대문 밖에는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이 한숨을 토하며 줄을 서 있었다.
한나절을 기다려 어둠살이 내릴 때 무송이 만난 사람은
병조판서가 아닌 이 집 집사인 판서의 손위 처남이었다.
행랑방에서 무송과 마주 앉은 구렁이 같은 집사의 입에서 구역질 나는 개소리가 나왔다.
“야, 이 답답한 사람아.
팔짱만 낀 채 십 년, 백 년을 기다려봐라.
발령장이 나오나!”
빙빙 둘러댔으나 결론은 삼만 냥을 갖고 오라는 얘기다.
무송이 고개를 숙인 채 끓어오르는 분을 짓눌렀지만 허사였다.
“임금은 궁궐에 피를 뿌리고 주색잡기에 빠진 간신들은 매관매직에만 매달리고….”
나지막이 말하고 벌떡 일어난 무송이 옆차기로 집사의 얼굴을 찼다.
‘꽥!’
집사는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목이 꺾여 즉사했다.
무송은 침착하게 나와 문지기에게 말을 전하라 했다.
“집사 어른께서 오늘은 면담을 그만하겠답니다.”
문지기가 큰소리로 알리자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서너 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송은 부랴부랴 성 밖으로 빠져나가 고향 쪽이 아닌 동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령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살인자, 그것도 병조판서의 처남을 때려죽여 놨으니 무조건 도망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밤에는 산속에서 새우잠을 자고 낮에는 장이 서서
사람들이 법석거리는 고을만 찾아가 배를 채우고 떠났다.
두루마기는 벗어 던지고 소매와 바짓단이 짧은 일복을 사 입은
무송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뒤
망태를 하나 사서 산속으로 들어가 약초꾼 행세를 했다.
심산유곡에 숨어 있는 절로 들어가 중이 될 작정이었다.
터벅터벅 소백산 자락 도솔고개를 넘는데 갑자기 봉두난발에
긴 칼을 든 두 놈이 소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무송을 가로막았다.
무과에 급제한 무송의 눈에는 수수막대기를 든 아이들처럼 보였다.
무송이 외쳤다.
“뭐 하는 놈들이냐!”
“이놈 봐라, 겁이 없네.
목숨은 살려줄 테니 산삼이나 하수오를 캤으면 내놓고 가렸다, 이놈.”
후다닥 퍽퍽.
순식간에 산적 두 놈이 널부러졌다.
무송은 칡넝쿨을 잘라 산적 두 놈을 묶었다.
술 냄새가 솔솔 풍겼다.
개울에 담가 놓은 호리병을 들고 왔다.
목마르던 차에 벌컥벌컥 탁배기를 나발 불던 무송.
불현듯 중이 되려던 생각이 바뀌었다.
산적이라는 놈들이 어리바리했다.
두 놈을 앞세워 길도 없는 숲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바위 협곡 앞에 다다르자 바위 위에서 보초가 활을 겨눴다.
묶인 두 놈이 고함쳤다.
“두목을 만나게 해 달라네.”
산길을 돌아 산채에 다다랐다.
나이 지긋한 두목 앞에 무송이 서자
여기저기 움막에서 산적들이 모여들었다.
“나도 여기서 함께 살고 싶소.”
무송이 여차여차해서 병조판서 처남을 때려죽이고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얘기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두목이 말했다.
“내가 관상을 좀 보네.
믿음 준 사람을 배신할 상은 아니야.”
소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혼쭐이 난 두 놈이
두목에게 자신들이 당한 일을 얘기하자 두목이 빙긋이 웃었다.
“여봐라,
돼지 한 마리 잡으렷다.”
돼지를 잡고 독에서 술을 걸렀다.
산적들은 그날 밤 통째로 술독에 빠졌다.
무과에 급제한 인재가 나라를 지키는 무관이 돼야 할 터인데,
나라를 어지럽히는 산적이 됐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산적의 머릿수는 모두 열일곱이었다.
여자도 둘 있었다.
두목은 잡아 온 여자와 살고 있었고,
또 한 산적은 아이가 둘이나 딸린 조강지처와 살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나자 무송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력을 알게 됐다.
처음부터 남의 재물을 강탈해서 살겠다고 산적이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부잣집 머슴을 살다가 새경을 떼이고 낫을 휘두른 사람,
장리 쌀을 쓰다가 목줄이 달린 밭뙈기를 모두 날린 사람,
부인이 겁탈 당하고 목을 매 홀아비가 된 사람….
하나같이 한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달포쯤 지난 어느 날, 산채에서 사건이 터졌다.
산적 한 명이 두목의 여자와 간통하다 들통이 난 것이다.
두목은 늙었고 다리를 절룩거렸다.
칼을 빼 들고 자신의 여자와 간통한 부하놈을 죽이겠다고 따라갔지만 역부족.
그놈은 잽싸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침부터 술을 퍼마신 두목이 마당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폭탄선언을 했다.
“나는 늙고 지쳤네.
이제는 산채에 있어봤자 짐만 될 터, 하산하려 하네.
처자식도 보고 싶고. 우리 산채를 제대로 꾸려갈 사람은 단 하나, 무송이네!”
떠나려는 두목을 모두가 막아, 그날 밤 질펀하게 환송잔치가 열렸다.
간통한 부하 산적도 숲에서 나와 꿇어앉아 두목에게 술잔을 올렸다.
무송은 보름 전 도솔고개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뇌물을 털어
곳간에 보관해둔 것을 꺼내 두목의 단봇짐에 넣어줬다.
얼떨결에 산채 두목이 된 무송이
두목의 여자인 무실댁에게 두목을 따라갈 거냐고 물었다.
무실댁은 고개를 저었다.
무실댁은 조강지처가 아니었다.
십오 년 전,
양반 대가에 시집갔으나 아이를 못 낳는 석녀라
십이 년을 죄인처럼 고개를 못 들고 살았다.
그러다 신랑이 아이를 업은 시앗을 데리고 본가에 들어오자 집을 나왔다.
시아버지가 거금을 싸주고 가마를 내어줬는데,
친정으로 가다가 도솔고개에서
산적들에게 잡혀 산채로 끌려와 산적 두목의 마누라가 됐던 것이다.
아이 못 낳는 석녀라고 남정네와의 잠자리를 피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이다.
열두 해 전,
무실댁이 산채에 잡혀 와 두목의 여자가 됐을 때는 두목 밑에 부하가 셋뿐이었다.
부하들은 “형수님, 형수님” 하며 무실댁을 깍듯이 대했고, 두목도 매일 밤 무실댁을 안았다.
항상 고개를 떨구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던 무실댁이 산채에 잡혀 와서는
고개를 들고 만면에 웃음을 달고 다녔다.
호사다마라던가.
이듬해, 관군에 쫓기던 두목이 왼 다리에 독화살을 맞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로 절룩거리며 영 힘을 못 쓰게 됐다.
매일 밤 두목 품에 안겨 잃어버린 세월을 찾는가 싶던
무실댁이 또다시 한숨을 토하기 시작했다.
한편 산적 두목 무송의 눈에는 산채의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무송은 아이들, 조강지처와 살림을 차린 오만복에게
식솔과 함께 먹고 살 만큼 전대를 채워준 뒤 그를 하산시켰다.
산채는 기동성이 생명인데, 관군이 쳐들어오면
오만복네는 산채 전체의 짐이 되기 때문이었다.
무송은 돼지와 닭을 키워 산적들 보신을 시키고, 체계적으로 훈련하고,
규율을 잡아 강군을 만든 뒤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현감을 치리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막걸리도 빚었다.
무송은 똘똘 뭉친 의적이 될 거라고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산적들은 툭하면 주먹다짐을 하고 때로는 칼을 들고 싸웠다.
큰 다툼, 작은 다툼 할 것 없이 거기엔 무실댁이 끼어 있었다.
치마 두른 한 여자를 두고 수컷 열다섯 명이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무송은 산적들 배만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를 잡아 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솔고개를 넘어가는 가마를 덮쳐 새 신부를 잡아 올 수도 있고,
세도가 자제들이 기생을 데리고 천렵할 때 그녀들을 빼앗아 올 수도 있었다.
다만 기동성이 떨어질까 봐 있던 여자도 내려보냈는데, 새 여자를 데려올 수는 없는 일.
그럼에도 혈기방장한 남정네 사이에 고기와 술 말고도 또 빠질 수 없는 게 여자다.
무송이 무실댁을 불러 술 한잔을 따랐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무송이 본론을 털어놓았다. 무실댁이 펄쩍 뛰었다.
“무실댁, 나도 무과에 급제한 놈인데 산적 두목이 됐소.
여기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한 맺힌 사연 있는 거 무실댁도 알잖소.
다 좋은 사람들이오.”
무송의 말에 무실댁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산채에서 가장 큰 움막인 두목 집으로 무실댁이 이사 갔고,
무송은 무실댁의 움막으로 갔다.
무실댁이 옮겨간 두목 집에
주막 홍등을 켰고 무실댁은 주모가 됐다.
산적들 모두의 연인이 된 것이다.
무송도 예외는 아니었다.
잃어버린 세월을 찾는 무실댁에게도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산채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