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천하 제일의 서당, 약국,훈장

오토산 2022. 2. 7. 06:24

김삿갓 103 -
[천하 제일의 서당, 약국,훈장(공맹재, 백중국,필봉)]

​김삿갓이 정신없이 산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어허 !

어느새 또 하루 해가 저물어 오는구나!)

​점심을 먹지 못했기에, 뱃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연이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을 아무리 둘러 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첩첩 태산 뿐,
어느 곳에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김삿갓은 허기증을 견디기가 어려워,

길가에 있는 솔잎을 한움큼 따서 입에 넣고 씹으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솔잎을 씹으며 얼마를 걸어 가다가 늙은 나무꾼을 만났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혹시 이 부근에 서당이나 절간 같은 곳이 없을까요?"
​나무꾼이

 

"절간은 없어도 서당은 있지요.

그건 왜 물어 보시오."

​"저는 길을 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쉬어 갈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저 쪽 길로 오리쯤 더 들어가면 孔孟齊라는 서당이 있소.
그 서당에는 百中局이라는 약국 간판도 함께 걸려 있을 것이니,

그리로 찾아가 보시오."

​"알겠습니다.

공맹재라는 서당에서 백중국이라는 약국을 겸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이를테면 그런 셈이오

.그 서당의 훈장인 "筆峰선생"이 의원까지 겸하고 있다오."

​김삿갓은 노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노인이 가르킨 쪽 길로 걸어 가면서도,

고개를 몇 번이고 좌우로 기웃거렸다.
서당 훈장이 약국을 겸업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들어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당의 당호를 공맹재로 하고,

약국의 상호를 백중국이라고 한 것은

너무나 대담 무쌍한 명칭을 빌어다 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공맹재라는 이름은 孔孟學을 도맡아 가르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시골 훈장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백중국이라는 약국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백중국이라는 약국 이름은

"百發百中" 이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 분명 할진데,

전문 의원이 아닌 시골 훈장의 의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백중국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까 궁금했다.

​의심을 하자면 선생의 이름도

천하 제일의 文筆을 본따, 필봉 선생이라고 부른다니,

시골 훈장이 얼마나 잘났으면 이름을 감히 필봉 선생이라 지칭했을까 싶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와 같은 일들을 하나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고로 뜨거운 숭늉은 김이 안나고,

빈 수레일수록 소리가 요란한 법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간판을 요란스럽게 내걸고 있는

필봉 선생이라는 훈장이야 말로 천하의 협잡꾼인지도 모른다.)​

​김삿갓은 여러가지 궁금증을 안고

오솔길을 따라 개울물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니,

제법 널따란 盆地​가 나왔다.

 

그 분지안에는 어림잡아 100여 호의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는 제법 의젓한 기와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반기와 한 채가 있을 뿐, 그밖에는 모두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 뿐이었다.

​"얘, 말 좀 물어 보자.

이 마을에 공맹재라는 서당이 있다는데,

그 서당이 어느 집이냐?"

​지나는 아이를 잡고 물어 보니,
그 아이가 언덕 위에 있는 기와집을 가르키며 대답한다.

​"저 언덕위에 커다란 기와집이 보이죠?
그 아래 반기와집이 서당이에요."
김삿갓은 아이가 가리켜 준 서당을 찾아 길을 재촉했다.

 

​언덕길을 다 올라와 보니,

반기와집 기둥에 "孔​孟齋"라는 간판과 "百中局" 이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안에서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있었다.

마당에서 주인을 부르니 서당문이

"탕!" 열리며,

"거, 누구냐?" 하는 방정맞은 소리가 터진다.

​방안에서 내다보는 사람은 나이가 오십 쯤된 사내였는데,

儒冠을​ 제쳐 쓰고 있는데,
팔자 수염에 얼굴이 세모꼴로 뾰족하게 생겨서

첫눈에 보아도 몹시 경망스러운 인상이었다.

​"저는 지나가던 과객올시다.

하룻 밤 신세를 지고 갈까 싶어 찾아왔사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필봉 선생이란자는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뭐? 하룻밤 자고 가고 싶다구?

여기는 객주집이 아닐쎄,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하고

매정한 태도로 나온다.

​김삿갓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얼른 술책을 쓰기로 하였다.

 

"저는 필봉 선생께서 운영하신다는

공맹재라는 서당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혹시 필봉 선생님은 댁에 계신지요?"
그러자 필봉 선생은 별안간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며,

​"뭐 ?

자네는 필봉 선생을 찾아온 사람 이라구?

필봉 선생이란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을 두고 부르는 소리라네.

자네는 내 명성을 어디서 듣고 찾아왔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자네라고 부르는 것은 예의를 모르는 오만 불손한 짓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실속만 차리면 그만이므로, 굳이 그런 것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짐짓,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며 이렇게 치켜 주었다.

​"공맹학에도 밝으시고,

의술에 있어서도 華陀(화타).扁鵲(편작)보다도 훌륭하시다는 필봉 선생의 존함은

일찍 부터 들어 왔으나, 직접 찾아뵙기가 너무 늦어서 매우 죄송합니다."

​김삿갓은 며칠 동안 푹 쉬어 가고 싶은 생각에서 거짓말을 적당히 꾸며 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 탓에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의 효과는 너무나도 커서, 필봉 선생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버선발로 달려나와

김삿갓을 방안으로 맞아 들이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명성을 듣고 이 산중까지 일부러 찾아왔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네그려. 어서 들어가세."

​서당방에 들어와 보니,

글을 읽는 아이들은 모두 합해야 일곱명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한결같이 "천자문"만 읽는 조무라기들 뿐이 아닌가!

​머리가 큰 아이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을 사람들이 필봉 선생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필봉 선생이란 자는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노라"는

말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허어!

자네가 나의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단 말인가?"​

​김삿갓은 한번 거짓말을 해놓았으므로,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그렇다고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선생은 학덕이 워낙 높으시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러자 필봉은 의문의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혼잣말을 한다.

 

"그거 참, 이상하다.

나는 이름을 팔고 돌아다닌 사람도 아닌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필봉 선생이라는 자는 직접 대놓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김삿갓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이자는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김삿갓은 속으로 적지아니 당황하며 얼른 이렇게 둘러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