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103 -
[천하 제일의 서당, 약국,훈장(공맹재, 백중국,필봉)]
김삿갓이 정신없이 산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어허 !
어느새 또 하루 해가 저물어 오는구나!)
점심을 먹지 못했기에, 뱃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연이어 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을 아무리 둘러 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첩첩 태산 뿐,
어느 곳에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김삿갓은 허기증을 견디기가 어려워,
길가에 있는 솔잎을 한움큼 따서 입에 넣고 씹으며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솔잎을 씹으며 얼마를 걸어 가다가 늙은 나무꾼을 만났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혹시 이 부근에 서당이나 절간 같은 곳이 없을까요?"
나무꾼이
"절간은 없어도 서당은 있지요.
그건 왜 물어 보시오."
"저는 길을 가는 나그네 올시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쉬어 갈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저 쪽 길로 오리쯤 더 들어가면 孔孟齊라는 서당이 있소.
그 서당에는 百中局이라는 약국 간판도 함께 걸려 있을 것이니,
그리로 찾아가 보시오."
"알겠습니다.
공맹재라는 서당에서 백중국이라는 약국을 겸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이를테면 그런 셈이오
.그 서당의 훈장인 "筆峰선생"이 의원까지 겸하고 있다오."
김삿갓은 노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노인이 가르킨 쪽 길로 걸어 가면서도,
고개를 몇 번이고 좌우로 기웃거렸다.
서당 훈장이 약국을 겸업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들어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당의 당호를 공맹재로 하고,
약국의 상호를 백중국이라고 한 것은
너무나 대담 무쌍한 명칭을 빌어다 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공맹재라는 이름은 孔孟學을 도맡아 가르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시골 훈장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다.
백중국이라는 약국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백중국이라는 약국 이름은
"百發百中" 이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 분명 할진데,
전문 의원이 아닌 시골 훈장의 의술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백중국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까 궁금했다.
의심을 하자면 선생의 이름도
천하 제일의 文筆을 본따, 필봉 선생이라고 부른다니,
시골 훈장이 얼마나 잘났으면 이름을 감히 필봉 선생이라 지칭했을까 싶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와 같은 일들을 하나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고로 뜨거운 숭늉은 김이 안나고,
빈 수레일수록 소리가 요란한 법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간판을 요란스럽게 내걸고 있는
필봉 선생이라는 훈장이야 말로 천하의 협잡꾼인지도 모른다.)
김삿갓은 여러가지 궁금증을 안고
오솔길을 따라 개울물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니,
제법 널따란 盆地가 나왔다.
그 분지안에는 어림잡아 100여 호의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는 제법 의젓한 기와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반기와 한 채가 있을 뿐, 그밖에는 모두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 뿐이었다.
"얘, 말 좀 물어 보자.
이 마을에 공맹재라는 서당이 있다는데,
그 서당이 어느 집이냐?"
지나는 아이를 잡고 물어 보니,
그 아이가 언덕 위에 있는 기와집을 가르키며 대답한다.
"저 언덕위에 커다란 기와집이 보이죠?
그 아래 반기와집이 서당이에요."
김삿갓은 아이가 가리켜 준 서당을 찾아 길을 재촉했다.
언덕길을 다 올라와 보니,
반기와집 기둥에 "孔孟齋"라는 간판과 "百中局" 이라는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안에서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 나오고 있었다.
마당에서 주인을 부르니 서당문이
"탕!" 열리며,
"거, 누구냐?" 하는 방정맞은 소리가 터진다.
방안에서 내다보는 사람은 나이가 오십 쯤된 사내였는데,
儒冠을 제쳐 쓰고 있는데,
팔자 수염에 얼굴이 세모꼴로 뾰족하게 생겨서
첫눈에 보아도 몹시 경망스러운 인상이었다.
"저는 지나가던 과객올시다.
하룻 밤 신세를 지고 갈까 싶어 찾아왔사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필봉 선생이란자는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뭐? 하룻밤 자고 가고 싶다구?
여기는 객주집이 아닐쎄,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하고
매정한 태도로 나온다.
김삿갓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얼른 술책을 쓰기로 하였다.
"저는 필봉 선생께서 운영하신다는
공맹재라는 서당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혹시 필봉 선생님은 댁에 계신지요?"
그러자 필봉 선생은 별안간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며,
"뭐 ?
자네는 필봉 선생을 찾아온 사람 이라구?
필봉 선생이란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을 두고 부르는 소리라네.
자네는 내 명성을 어디서 듣고 찾아왔는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자네라고 부르는 것은 예의를 모르는 오만 불손한 짓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실속만 차리면 그만이므로, 굳이 그런 것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짐짓,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며 이렇게 치켜 주었다.
"공맹학에도 밝으시고,
의술에 있어서도 華陀(화타).扁鵲(편작)보다도 훌륭하시다는 필봉 선생의 존함은
일찍 부터 들어 왔으나, 직접 찾아뵙기가 너무 늦어서 매우 죄송합니다."
김삿갓은 며칠 동안 푹 쉬어 가고 싶은 생각에서 거짓말을 적당히 꾸며 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 탓에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의 효과는 너무나도 커서, 필봉 선생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버선발로 달려나와
김삿갓을 방안으로 맞아 들이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명성을 듣고 이 산중까지 일부러 찾아왔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네그려. 어서 들어가세."
서당방에 들어와 보니,
글을 읽는 아이들은 모두 합해야 일곱명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한결같이 "천자문"만 읽는 조무라기들 뿐이 아닌가!
머리가 큰 아이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을 사람들이 필봉 선생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필봉 선생이란 자는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노라"는
말에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허어!
자네가 나의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단 말인가?"
김삿갓은 한번 거짓말을 해놓았으므로,
이제는 싫든 좋든 간에 그렇다고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선생은 학덕이 워낙 높으시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러자 필봉은 의문의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혼잣말을 한다.
"그거 참, 이상하다.
나는 이름을 팔고 돌아다닌 사람도 아닌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필봉 선생이라는 자는 직접 대놓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김삿갓이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것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이자는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김삿갓은 속으로 적지아니 당황하며 얼른 이렇게 둘러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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