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장인 정신으로 만든 首陽梅月(상)

오토산 2022. 2. 7. 06:07

김삿갓 101 -
[장인 정신으로 만든 首陽梅月(상)]

​김삿갓은 해주 구경을 끝내고 이번에는 먹을 사려고 나섰다.

전국적으로 먹을 만드는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해주에서 만드는 首陽梅月을 최고로 쳐준다.
​그 먹은 수양산 기슭에 있는 매월리라는 마을에서 만들기 때문에,

자호를 수양매월이라고 붙인 것이다.

​아울러 값도 무척 비싸서 보통 먹의 몇 갑절이나 되는 돈을 주어야 살 수 있는 귀물이다.

​그러므로 글줄이나 쓰는 선비들은 해주에 들르기만 하면 수양매월을 꼭 사게 마련이었다.
김삿갓도 해주 먹을 써 보는 것이 오래 전부터의 소원이었기에

일부러 매월리로 먹을 사러 찾아갔던 것이다.

​먹을 만드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칠십 노인이었다.

첫눈에 보아도 풍모가 고상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노인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김삿갓의 차림새가 허술한 것을 보고,

먹을 사러 온 사람이 아닌 줄로 아는 모양이었다.

​"수양매월이라는 먹을 노인장께서 만드십니까?

저는 먹을 사러 온 사람입니다."

​"허어 ...

그래요?

수양매월이라는 자호는 어찌 아셨소?"

​"글줄이나 쓰는 선비라면 수양매월을 모르진 않지요."

​"그래요?

이제 보니 선생은 보통 선비가 아니신 모양이구려."

 

노인은 조금 전과는 딴판으로,

선비에 대한 대접이 매우 정중해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아직은 미심쩍은 점이 있는지,

 

"내가 만든 먹은 시중에서 파는 먹보다 값이 세 배나 더 비싼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넌즈시 따져 묻는다.

​"좋은 물건일수록 값이 귀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값은 고하간에, 노인장께서 직접 만드신 먹을 두 장만 주십시오."

​노인은 그 말을 듣더니, 부랴부랴 걸상을 내밀며

앉기를 권하며 감격스런 어조로 말을 한다.

​"내가 어젯밤 꿈자리가 좋더니,

오늘은 귀한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그려.
내가 만든 먹을 구하려고 이곳까지 찾아오신 모양이니

이렇게도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노인장께서는 무슨 말씀을...

선비들을 위해 좋은 먹을 만들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은 오히려 저희들이옵니다."
​주인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감격스러워 하면서,

 

"먹이란,

옛날부터 文房四友라고 해서 선비들이 애용하는 소중한 물건이지요.
​선비들은 글자 한 자 한 자에 심혈을 기울이는 분들이므로,

그런 분들이 쓰는 먹인들 어찌 소홀하게 만들겠습니까?
​나는 선비정신을 죽는 날까지 뒷받침해 드리고 싶어서

심혈을 기울여 먹을 만들고 있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주인 노인에게 머리가 절로 수그려졌다.

주인노인에게서 匠人精神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문에 종사하는 선비만을 지극히 존중해 왔다.

그러면서 집을 잘 짓는 기술자는 목수장이, 토목일을 하는 사람은 미장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환장이,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을 노름장이 등등의

이름으로 천대해 왔다.

​이러니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나라가 기술적 발전을 하기 어려웠고

김삿갓은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사람들은 타고 난 재주를 십 분 발휘하여

여러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서 백성이지고 나라가 강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따라서 묵당이라고 부르는 이 노인은

먹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여 오고 있다니,

그 얼마나 고귀한 장인 정신이란 말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먹을 만들어 왔으며,

먹은 어떻게 만드는 것이옵니까 ?"

​"먹은 본시 중국 후한(後漢) 시대에 생겨났다고 전하지요.

그 먹이 우리나라 에는 위만(衛滿) 낙랑(樂浪) 때 들어와,

신라 시대에는 이미 楊家니 武家니 하는 조제공들이 생겨났지요.

​그뒤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조에 들어와서는 "먹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오.
그때 일본은 우리에게서 먹을 사갔을 뿐만 아니라, 만드는 방법까지 배워 갔지요.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서는 먹의 명성이 점점 쇠퇴해 가고 있는 것은 실로 한탄할 일이지요."
​묵당 노인은 그 방면에 권위자인지라, 먹의 역사에 매우 정통하였다.

​"이왕이면 먹을 어떻게 만드시는지

제조 방법도 말씀해 주시죠."
김삿갓은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부탁을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선비들을 만나 보았지만,

선생처럼 먹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관심이 깊은 분은 처음 만나 보았소이다.

모처럼 물으시니 자세히 말씀 드리지요."

​그리고 묵당 노인은

먹의 재료와 제조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주었다.
먹을 만드는 재료는 松燃(송연)과 油燃(유연)이 있다.
소나무를 불에 태워 나오는 그을음으로 만든 것이 송연묵이고,

기름을 불태워 나온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유연묵이라 한다.

​소나무를 불에 태웠을때 높이 올라가는 그을음을 貢煙(공연)이라 하는데,

그을음이 높이 올라간 것 일수록 질이 좋아, 상층부의 공연을 超煙이라고도 부른다.

​그 그을음을 한데 모아 가는 채로 쳐서

풀로 개어 반죽을 만든 뒤에 절굿공이로 다져,

불에 적당히 끓여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는 틀(木型)에 넣고 잘 다져야 한다.

​이렇게 먹의 형태를 잡은 다음에는 그것을 재 속에 파묻어

수분을 점차 빼내면서 건조시키면 먹이 된다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먹을 만드는 공정은 여간 복잡해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대견스럽게 알아 주지 않는 그 어려운 공정을 한평생 반복해 왔다니,

김삿갓은 묵당 노인에게 새삼스러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어렵고도 복잡한 일에 비하면 물건의 값도 변변치 못한 일이 아닌가.

​"노인장께서는 먹을 한평생 만들어 오신 모양인데,

먹만 만들어 가지고도 생계를 유지해 올 수 있으십니까?"

김삿갓은 노인의 생계가 은근히 걱정되어 지나는 말로 물어 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한숨을 쉬며

 

"순전히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이 일을 진작에 집어치웠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내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굶으면서도 먹만은 계속 만들어 오고 있지요."

​들을수록 고귀한 장인의 말씀이었다.
김삿갓이 수양매월이라는 네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먹을 두장 사고 나자,
​묵당 노인은 이런 농담을 하는 것이다.

 

"내 집에서 먹을 사가시면

가정 풍파가 일어나기 쉽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은 그래도 괜찮으시겠소이까?"

​"네 .... ?

먹 때문에 가정 풍파가 일어난다구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삿갓은 묵당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 하니 묵당 노인은 웃으면서,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