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烹팽, 팽, 팽, 팽"

오토산 2022. 2. 7. 06:25

김삿갓 104 -
["烹팽, 팽, 팽, 팽"]

"선생은 비록 산속에 숨어 살고 계시다고는 하지만,
사향노루는 아무리 깊은 산속에 살아도

그 향기가 천 리 밖에까지 풍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선생이 비록 산속에 숨어 계시기로,
그 명성이야 어찌 숨길 수 있으오리까."

어거지로 둘러댄 변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필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사향노루의 비유는 천하의 명답이네그려.

그러고 보면 자네는 학식이 보통은 아닌 모양인걸

자네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

"많이는 읽지 못했으나,
몇 해 동안 글방에 열심히 다닌 일이 있사옵니다."

"음...

그렇다면 시도 지을 줄 알고 있겠네그려?"

 

"잘 짓지는 못하오나

이럭저럭 흉내는 낼 수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내가 韻字를 불러 줄 테니,

시를 한수 지어 보겠는가?

자네가 시를 잘 지으면 나는 자네를 선비로 알고
내 집에서 융숭하게 대접하도록 하겠네.
그러나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다면 저녁이나 먹여서 쫒아내기로 하겠네."

필봉 선생은 김삿갓의 학력을 단단히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김삿갓은 물론 시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같은 위대하신 어른께서 시를 지으라고 하시니,

어쩐지 몸이 떨리옵니다.
시가 다소 서툴더라도 관대하게 보아 주시옵소서."

"이 사람아! 학문에는

"관대"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법이네!"

"운자를 한꺼번에 부르지 아니하고,
한구절을 지을 때마다 한 자씩 따로 불러 줄 테니 그리 알게!"

그리고 나서 첫 번째 운자를 불렀는데
"烹(삶을팽)!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烹이란 글자는 싯구의 운자로는 좀처럼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팽자를 운자로 부른 건 김삿갓을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일단 운자를 불려 받았으니,
김삿갓으로서는 팽자를 넣어 시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은 시는

許多韻字何呼烹
(허다운자하호팽)
허구 많은 운자 중에 하필이면 팽자란 말이오.

첫구절은 그것으로써 시험에 통과된 셈이었다.
필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번째 운자도 또다시,
"팽!" 하고 똑같은 글자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운자는 같은 글자를 두 번 부르는 법이 아닌 것을
필봉선생도 알고 있을텐데,

연이어 같은 운자를 부른 것은 김삿갓을 골탕 먹이려는 계획이 분명해 보였다.

 

김삿갓은 싫든 좋든 간에
두번째 운자를 넣어서 시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彼烹有難況此烹
(피팽유난황차팽)
아까도 팽자가 어려웠는데 또 "팽"자란 말이오.

필봉 선생은 그 시구를 들여다 보더니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러면서 세 번째 운자를 부르는데 "팽" 하고 다시 외쳤다.

본시 세번째 구절에는 운자가 필요치 않은 법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운자가 필요치 않은 전구조차도
"팽"자를 넣어 지을 수밖에 없었다.

一夜宿寢懸於烹
(일야숙침현어팽)
하룻밤 자고 가는 일이 오직 "팽"자에 달려 있구나.

필봉 선생은 또 한번 놀라 보이며 결구의 운자도 역시,

"팽" 하고 부르는 것이다.

김삿갓은 은근히 화가 동했다.
그리하여 마지막 구절은 필봉을 욕하느라고 이렇게 읊었다.

山村訓長但知烹
(산골훈장단지팽)
산골 훈장이 아는 글자라곤 오직 "팽"자 하나 뿐이더냐!

김삿갓 같은 천재 시인이 아니고서는 지을 수 없는 시였다.
더구나 마지막 구절은 산골 훈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어쨋건간에,

김삿갓이 "烹"자를 넣어 기승전결의 네 구절을 막힘 없이 척척 읊어 내자,
필봉 선생은 별안간 김삿갓의 손을 덥썩 움켜잡으며

감격어린 어조로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이구, 선생!
이제부터는 선생을 나의 스승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조금전 까지도 또라지게 "자네"라고 불러 오던 사람이,

별안간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나서니,
김삿갓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