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105 -
[필봉 선생의 고백]
"필봉 선생, 별안간 왜 이러십니까?
농담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그러나 필봉은 성품이 음흥하면서도 솔직한 일면이 있었다.
그는 김삿갓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으며,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내 이제와서 선생께 무엇을 숨기겠소이까.
선생이 시에 그렇게도 能하신 것을 보니,
선생은 "사서삼경"에도 능통하신 분이 확실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천자문을 뗀 뒤에 고작해야 "명심보감" 밖에는 읽지 못한 놈이옵니다.
그러니 내 어찌 선생같은 어른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필봉의 말을 액면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공맹재 훈장 어른이
"명심보감" 밖에 읽지 않았다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선생만은 속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을 한 것 입니다.
선생이 조금전에 시를 지으실 때 마지막 구절에서
"산골 훈장놈이 알고 있는 글자는 오로지"팽"자 뿐이냐?" 하고 호통을 치셨을 때,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처럼 예리한 炯眼(형안)을 가지고 계신 선생을
감히 나같은 놈이 무슨 재주로 속일 수 있겠습니까?"
김삿갓은 일시적인 화풀이로 "팽자밖에 모르느냐"고 했을 뿐인데,
그 구절이 상대방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된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무심코 그렇게 읊었을 뿐이니,
그 말을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십시오."
"고깝게 생각하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내가 이 산중에 들어와 훈장 노릇을 하게 된 경위를
모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필봉은 김삿갓에게 자신의 과거를 아래와 같이 털어 놓았다.
필봉 선생의 본명은 金正銀으로, 평양 인근 순안에서 건달패로 살아 왔었다.
그러다가 스무 살 먹은 누이동생을 홍 부자에게 소실로 주게 되면서
집을 한 채 얻어 가지게 되자, 그 집을 이용, 일약 서당 훈장으로 둔갑을 했다는 것이다.
"명심보감 밖에 읽지 못했다는 분이
어떻게 훈장이 되실 생각을 하셨소?"
"팔자 좋게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훈장 이외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해전 부터 매부인 홍 부자의 도움을 받아 훈장이 된 것이지요."
협잡성은 있어도 머리만은 비상하게 돌아가는 사람임이 분명하였다.
필봉 선생으로 자처하던 김정은 훈장은 자신의 허위 생활을 툭 털어놓고 나더니
가슴이 후련해 오는지,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날마다 허풍만 떨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어요."
김삿갓은 웃으며 대답한다.
"누구나 거짓말을 적당하게 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하나에서 열까지 거짓말만 하면서 살아오자니 양심이 너무나도 괴로워요.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허울 뿐이고,
의원으로 행세하며 남의 병을 고쳐 준다는 것도 멀쩡한 연극이었고....."
"선생은 머리가 너무도 좋아,
여러 방면으로 욕심을 부려서 그렇게 되신 모양이군요."
"한마디로 말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이렇게 된 것이지요."
"아무리 그렇기로
서당방에 약국 간판 까지 내건 것은 어떻게 된 일이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눈병을 비롯하여 잔병 치례를 많이 겪었어요.
할아버지 께서는 그럴때 마다 어린 아기의 오줌을 받아 눈에 넣어주면
눈병이 깨끗하게 낫곤 하더군요.
또, 잔병치례를 겪으며 썼던 약의 종류도 매우 많았고요.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약국 간판을 내걸게 된 것이지요.
산속에 사는 의원들이란 대게 저 처럼 돌팔이 의원이 아니겠어요?"
김삿갓은
자기 입으로 "돌팔이 의원"이라고 인정하고 나오는데는 할 말이 없었다.
"약국을 찾아오는 환자의 병이 천차 만별 일텐데
처방을 어찌 하셨단 말입니까?"
"그런 경우라도 적당히 약을 지어 주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대개가 낫게 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약을 적당히 지어 주다뇨?
어떤 병에 무슨 약을 써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까지 모를라구요.
시골 사람들은 배앓이 환자가 찾아 오면 益母草丸藥 (익모초환약)을 주고,
감기 몸살로 왔을 때에 敗毒散(패독산)을 지어 주지요.
젊은 사람들은 대개 방사 과도로 찾아 오게 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加味雙和湯(가미쌍화탕)을 지어 주고,
산모가 찾아왔을 때에는 佛手散 (불수산)을 지어 주고,
늙은이가 몸이 허약해 찾아왔을 때에는 六味湯이나 八味湯을 지어주고,
봄과 가을에 보약을 지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十全大補湯 (십전대보탕)을 처방했지요."
필봉 선생은 의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약명을 말했다.
그러나 그런 약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몸을 보호한다 뿐이지,
정작 병을 치료하는 약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돌팔이 의원은
그런 약들이 치료를 하는 약으로 알고 있었으니,
김삿갓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실례의 말씀이지만,
선생은 "東醫寶鑑" 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소?"
"동의보감이라뇨?
그런 책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데,
그 책은 "論語"나 "孟子"와 같이 "사서삼경"에 들어 있는 책입니까?"
김삿갓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동의보감이라는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명의였던 許浚선생이 쓰신 만고의 名著인데,
약국을 경영하시는 분이 "동의보감"도 안 읽어 보셨다면,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러나 돌팔이 의원은 김삿갓의 말을 일소에 붙여 버린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의원이 병만 고쳤으면 그만이지,
그까짓 "동의보감" 인가 서의보감인가 하는 책을 읽어 보지 않았기로
어떻다는 말씀이오?"
"동의보감 같은 의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씀이오?"
그러나 무식하기 짝없는 돌팔이 의원에게 그런 말은 馬耳東風이요,
牛耳讀經이었다. 돌팔이 의원은 코웃음을 치면서 김삿갓을 넌즈시 나무란다.
"무슨 병이나 적당히 시간을 끌어 가노라면,
열에 아홉은 저절로 낫게 마련이라오.
따라서 그런 이치를 알고 잘 활용하게 되면 명의가 되는 것이지,
따로 명의가 있는 줄 아시오?" 언젠가 만났던 돌팔이 의원과 같은 소리를 한다.
(그렇다!
사람의 몸은, 병을 스스로 치료하는 면역체계가 되어 있다.
다만 사람이 병으로 부터 하루 속히 벗어 나려고 발버둥을 치기에,
돌팔이 의원 조차 돈 벌 일이 있지않겠나?)
이런 생각이 든 김삿갓,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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