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필봉 선생의 고백

오토산 2022. 2. 7. 06:26

김삿갓 105 -
[필봉 선생의 고백]

​"필봉 선생, 별안간 왜 이러십니까?

농담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그러나 필봉은 성품이 음흥하면서도 솔직한 일면이 있었다.
​그는 김삿갓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으며,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내 이제와서 선생께 무엇을 숨기겠소이까.
선생이 시에 그렇게도 能하신 것을 보니,
선생은 "사서삼경"에도 능통하신 분이 확실합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천자문을 뗀 뒤에 고작해야 "명심보감" 밖에는 읽지 못한 놈이옵니다.

그러니 내 어찌 선생같은 어른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필봉의 말을 액면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공맹재 훈장 어른이

"명심보감" 밖에 읽지 않았다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선생만은 속일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을 한 것 입니다.

​선생이 조금전에 시를 지으실 때 마지막 구절에서

"산골 훈장놈이 알고 있는 글자는 오로지"팽"자 뿐이냐?" 하고 호통을 치셨을 때,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처럼 예리한 炯眼(형안)을 가지고 계신 선생을

감히 나같은 놈이 무슨 재주로 속일 수 있겠습니까?"

​김삿갓은 일시적인 화풀이로 "팽자밖에 모르느냐"고 했을 뿐인데,

그 구절이 상대방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된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무심코 그렇게 읊었을 뿐이니,

그 말을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십시오."

​"고깝게 생각하다니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내가 이 산중에 들어와 훈장 노릇을 하게 된 경위를

모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필봉은 김삿갓에게 자신의 과거를 아래와 같이 털어 놓았다.
​필봉 선생의 본명은 金正銀으로, 평양 인근 순안에서 건달패로 살아 왔었다.
그러다가 스무 살 먹은 누이동생을 홍 부자에게 소실로 주게 되면서
집을 한 채 얻어 가지게 되자, 그 집을 이용, 일약 서당 훈장으로 둔갑을 했다는 것이다.

​"명심보감 밖에 읽지 못했다는 분이

어떻게 훈장이 되실 생각을 하셨소?"

​"팔자 좋게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 훈장 이외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해전 부터 매부인 홍 부자의 도움을 받아 훈장이 된 것이지요."

​협잡성은 있어도 머리만은 비상하게 돌아가는 사람임이 분명하였다.
필봉 선생으로 자처하던 김정은 훈장은 자신의 허위 생활을 툭 털어놓고 나더니

가슴이 후련해 오는지,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날마다 허풍만 떨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어요."
​김삿갓은 웃으며 대답한다.

 

"누구나 거짓말을 적당하게 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하나에서 열까지 거짓말만 하면서 살아오자니 양심이 너무나도 괴로워요.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허울 뿐이고,

의원으로 행세하며 남의 병을 고쳐 준다는 것도 멀쩡한 연극이었고....."

​"선생은 머리가 너무도 좋아,

여러 방면으로 욕심을 부려서 그렇게 되신 모양이군요."

​"한마디로 말하면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이렇게 된 것이지요."

​"아무리 그렇기로

서당방에 약국 간판 까지 내건 것은 어떻게 된 일이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눈병을 비롯하여 잔병 치례를 많이 겪었어요.

할아버지 께서는 그럴때 마다 어린 아기의 오줌을 받아 눈에 넣어주면

눈병이 깨끗하게 낫곤 하더군요.

​또, 잔병치례를 겪으며 썼던 약의 종류도 매우 많았고요.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약국 간판을 내걸게 된 것이지요.

산속에 사는 의원들이란 대게 저 처럼 돌팔이 의원이 아니겠어요?"

​김삿갓은

자기 입으로 "돌팔이 의원"이라고 인정하고 나오는데는 할 말이 없었다.

​"약국을 찾아오는 환자의 병이 천차 만별 일텐데

처방을 어찌 하셨단 말입니까?"

​"그런 경우라도 적당히 약을 지어 주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대개가 낫게 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약을 적당히 지어 주다뇨?

어떤 병에 무슨 약을 써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까지 모를라구요.

시골 사람들은 배앓이 환자가 찾아 오면 益母草丸藥 (익모초환약)을 주고,

감기 몸살로 왔을 때에 敗毒散(패독산)을 지어 주지요.

​젊은 사람들은 대개 방사 과도로 찾아 오게 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加味雙和湯(가미쌍화탕)을 지어 주고,
​산모가 찾아왔을 때에는 佛手散 (불수산)을 지어 주고,
늙은이가 몸이 허약해 찾아왔을 때에는 六味湯이나 八味湯을 지어주고,
​봄과 가을에 보약을 지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十全大補湯 (십전대보탕)을 처방했지요."

​필봉 선생은 의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약명을 말했다.

그러나 그런 약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몸을 보호한다 뿐이지,

정작 병을 치료하는 약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돌팔이 의원은

그런 약들이 치료를 하는 약으로 알고 있었으니,

김삿갓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실례의 말씀이지만,

선생은 "東醫寶鑑" 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소?"

​"동의보감이라뇨?

그런 책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데,

그 책은 "論語"나 "孟子"와 같이 "사서삼경"에 들어 있는 책입니까?"
​김삿갓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동의보감이라는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명의였던 許浚선생이 쓰신 만고의 名著인데,

약국을 경영하시는 분이 "동의보감"도 안 읽어 보셨다면,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러나 돌팔이 의원은 김삿갓의 말을 일소에 붙여 버린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의원이 병만 고쳤으면 그만이지,

그까짓 "동의보감" 인가 서의보감인가 하는 책을 읽어 보지 않았기로

어떻다는 말씀이오?"

​"동의보감 같은 의서를 읽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씀이오?"

​그러나 무식하기 짝없는 돌팔이 의원에게 그런 말은 馬耳東風이요,

牛耳讀經이었다. 돌팔이 의원은 코웃음을 치면서 김삿갓을 넌즈시 나무란다.

"무슨 병이나 적당히 시간을 끌어 가노라면,

열에 아홉은 저절로 낫게 마련이라오.

​따라서 그런 이치를 알고 잘 활용하게 되면 명의가 되는 것이지,
따로 명의가 있는 줄 아시오?" 언젠가 만났던 돌팔이 의원과 같은 소리를 한다.

​(그렇다! 

사람의 몸은, 병을 스스로 치료하는 면역체계가 되어 있다.

다만 사람이 병으로 부터 하루 속히 벗어 나려고 발버둥을 치기에,

돌팔이 의원 조차 돈 벌 일이 있지않겠나?)

이런 생각이 든 김삿갓,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