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김삿갓

장인 정신으로 만든 首陽梅月(하)

오토산 2022. 2. 7. 06:24

김삿갓 102 -
[장인 정신으로 만든 首陽梅月(하)]

​"이것은 우수갯 소리이기는 합니다만,
지금으로 부터 14, 5년 전에 한양 어느 대가 댁에서는

'수양매월'이라는 먹 때문에 노부부간에 대단한 부부 싸움이 있었답니다.

선생께서도 먹을 사가셨다가

내외간에 그런 불상사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서

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호기심이 솟았다.

 

"먹 때문에 부부 싸움이 일어나다뇨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째서 먹 때문에 부부 싸움을 하게 됐는지,

좀더 자세하게 말씀 해 주시죠."

"선생도 부부 싸움을 피하시려면

그 얘기를 한 번쯤 들어 두시는 것이 좋으실 것입니다."하면서

묵당 노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지금으로 부터 14, 5년 전의 일이다.
張某라는 양반이 황해 감사를 지내다가 한양으로 돌아갈 때,

수양매월이라는 먹을 자그마치 30장이나 사가지고 돌아갔다.

 

​그는 그 먹을 얼마나 아꼈는지

조카가 한 장만 달라고 애걸 하여도 끝내 나눠 주지 않았다.
​이에 조카는 아저씨를 매우 괘씸하게 여겨 골탕을 먹여 줄 생각에서

숙모에게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고자질해 바쳤다.

​"숙모님 !

아저씨께서 황해 감사로 내려가 계실 때,

수양매월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지금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시옵니다.

​한양으로 올라 오실 때에도 그 기생을 잊을 수 없어,

수양매월이라는 그 기생의 이름을

30장이나 되는 먹 속에 새겨 가지고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그 먹을 문갑 속에 소중히 간수해 오고 계시다고 하오니,

숙모님께서는 사랑방 문갑을 한 번 뒤져 보도록 하십시오.

​만약 문갑 속에서 수양매월이라는 먹이 나온다면

아저씨는 아직도 그 기생을 오매불망으로 연연해 하고 계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인은 그 길로 사랑방에 달려 나가 문갑을 뒤져 보니,

과연 문갑 속에서는 수양매월이라고 네글자로 새긴 먹이

자그마치 30장이나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놈의 영감탱이가...!"

 

부인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즉석에서 마치 기생년을 두둘겨 패듯이

그 귀한 먹을 장도리로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 노부부간에는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편이 아무리 변명을 하여도 그 변명은 절대로 통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묵당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혹시 선생한테도 누가 무슨 무고를 할지 모르니

미리부터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계셔야 합니다.

하하하."하고
말하는 바람에 김삿갓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었다.

​묵당 노인은 비록 먹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해학을 아는 풍류객이었던 것이다.
김삿갓은 먹 값을 치루고 나서 작별 인사를 겸해 이런 말도 물어 보았다.

 

"황해도에서는 먹 뿐만 아니라

벼루도 좋은 것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묵

당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웬걸요.

벼루라면 뭐니뭐니 해도 중국에서 나오는 단계 벼루를 당할 것이 없지요.

​벼루를 만들려면 돌이 좋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硯石은 질이 좋지 않아 좋은 벼루를 만들 수가 없는걸요.

​황해도의 甕津石(옹진석)과 평안도의 渭原石(위원석)이

그런대로 쓸 만하기도 하지만,

端溪石(단계석)과는 비교가 안 되는걸요."

​묵당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는지

서랍 속에서 조그만 벼루를 하나 꺼내 보이며,

​"나는 벼루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것은 옹진돌로 내가 장난삼아 만들어 본 벼루 입니다.

​선생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으니 마음에 드시거든 가지고 가십시오."하며

내미는 게 아닌가.

​"네?

노인장께서 손수 만드신 이 벼루를 저에게 주시겠다고요?"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시거든 받아 주세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김삿갓이 벼루를 살펴보니,

가장자리로 매화꽃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 솜씨가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귀물을 저한테 주신다는 말씀 입니까?"

​"내가 장난삼아 만들어 본 것인데 귀하다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매화꽃을 새겼기에,

梅月墨(매월먹)과 짝을 만들고 싶어 이름을 梅花硯(매화연)이라고 지었지요."

​김삿갓은 벼루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요모조모로 감상해 보았다.

보면 볼수록 정답게 느껴져서

​"제가 이 벼루를 두고 시 한 수를 지어 보겠습니다."하고 
그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보였다.

배는 평평하고 이마는 움푹
腹坦受磨額凹池 (복탄수마액요지)

​뛰어난 돌의 품질 예삿돌이 아니로다
拔乎凡品不책奇 (발호범품불책기)

​글씨를 쓰는 날은 먹을 짙게 갈아 놓고
濃硏每値工精曰 (농연매정공정왈)

​항상 즐겁고 흥겨웁게 만나리라.
寵任常從興逸時 (총임상종흥일시)

​종이에 글씨 써서 그 모습 변해 갈 때면
楮老敷容知漸變 (저노부용지점변)

​뾰족한 붓끝을 자주자주 적시게 되리
毛公笑舌見頻滋 (모공소설견빈자)

​원래 문방사우는 서로 돕게 마련인 것
元來四友相須力 (원래사우상수력)

​필요할 때 모여 옴이 그림자와 같도다.
圓會文房似影隨 (원회문방사영수)
​묵당 노인이 시를 대뜸 알아보고 무릎을 치며 감격한다.

 

"物必有主(물필유주)(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 라더니,

이 벼루가 오늘에야 제 주인을 만난 셈이구려. 하하하."

​김삿갓은 본디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얼마 전에 양상문이라는 사람이 건네준 사례금도

엽전 한 닢만을 정표로 받았을 뿐이고,
​무하향 주막에서 전대를 백종원이란 자에게 도둑을 맞았을때도

표연히 돌아서, 잊은 바 있지 않던가!

​그러나 이날 묵당 노인이 주는 선물만은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손수 만든 벼루를 선물로 주는 것은 서로간에 마음이 통한 증거이기도 했지만,

그 보다더 큰 기쁨은 장인 정신의 묵당이라는 참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묵당 노인과 작별한 김삿갓은 이날도 산 속을 한없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