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경대학에서 강진 다산초당을 다녀와서
백련사에서 동백나무숲길을 걸어서 고개를 넘어서
한참을 내려가니 천일각과 동암을 지나서니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산 (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인, 서화가, 실학자이며기호남인(성호학파)으로
진주목사 부친(丁載遠)과 모친(해남윤씨 윤두서의 손녀) 사이에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 마재(馬峴)에서 태어나
15세에 서울로 와서 성호 이익의 학문과 서양서적을 접하며
1783년 진사시 합격하고 1789년(정조 13 28세) 식년문과 급제하여
검열을 지내며 카톨릭교인이라 하여 탄핵, 유배되었다가 조금후 풀려
10년동안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형조참의 등을 지냈고
1789년 한강 배다리, 1792년 수원화성 축성 등에 기여를 하였으며
정조 사후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때 유배되고 황사영벽서사건으로
강진으로 이배되어 1818년까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백련사에서 산책로를 넘어와서 첫 번째로 만난 천일각(天一閣)은
하늘 끝 한모퉁이라는 뜻의 처내일각(天涯一閣)을 줄인 말로서
유배시절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 유배중인 형(정약전)이
그리울때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에
1975년 새로 세웠고
천일각 아래에 있는 동암(東菴)은 송풍루(松風樓)라 부르기도 하였고
다산이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으로
茶山東菴이란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寶丁山房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을 친필을 집자한 것으로
1976년 지어졌다고 한다.
동암옆에 자리한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다산 (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선생이 1801~1818년까지
1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며 다산학단의 18명의 제자를 길러 내고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음흠신서(欽欽新書) 등
500여권의 저서를 저술하는데 정성을 기우렸던 곳으로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단장하면서
스스로 다산초부(茶山樵夫)라 칭하였다고 전한다.
다른벼슬은 내가 구할수 있으나 목민관은 아무나 구하여서는
아니된다(他官可求 牧民之官 不可求也)는 목민심서 구절이
초당안에 적혀 있었으며 초당옆에는 연못과 석가산이 있었고
우측 뒷편에는 다산이 직접새겼다는 정석(丁石)이 있었는데
군더더기 없는 성품 그대로 아무런 수식없이
자신의 성(丁)자만 새겨졌다고 한다.
초당옆에는 서암이 있었는데 차(茶)와 벗하여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다성각(茶星閣) 현판이 붙여 있었으며
한 참을 내려오니 다산의 18명의 제자중 한사람인
순암(淳菴) 윤종진(尹鐘軫 1803~1879)의 묘소가 있었는데
순암은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자
제자들과 함께 다산계(茶山契)를 조직하여 평생동안
금릉다산향(金陵茶山香)이라는 차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귤동마을로 내려오니 기념품점(다산처럼)이 있었는데
다산 정약용과 해설 목민심서를 두권을 구입하시면
강진청자를 선물한다는 광고도 보였고
귤송당(橘訟堂)과 다산회당(茶山會堂)도 보면서 마을을 지나
멀리 다산기념관이 보이는 주차장에 도착하였더니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수고를 했다고 인사를 하였다.
백년사를 거쳐 숲길로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다산선생과 혜장선사의 아름다운 교우를 그려보았으며
다산기념관은 다음기회에 답사하기로 하고
16:20 해남공재고택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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