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사람들이 영양 남자현역사공원을 다녀와서

2005년 GS가 LG계열에서 분리되었다고 전하는 3월 31일
반가운사람들이 영덕으로 동해안나들이를 하였다가
돌아오는길에 신촌에서 석보를 거쳐 지경리에 조성중에 있는
남자현역사공원을 돌아보았다.
남자현(南慈賢 1872~1933)지사(志士)는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1872년 석보면 지경리 통정대부 정한공(珽漢公)의 셋째 딸로 태어나
부모님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성장하여
1891년 답곡리 거주 의성김씨 金永周와 결혼, 부군이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1896년 진보지역전투에서 전사하자 민족계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복자인 김성삼을 대리고 만주로 들어가서
여성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계몽운동에 앞장 서 왔다.
1927년 길림 안창호연설장에서 47명 독립지사가 체포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전원석방토록 하여 중국사회에 명성이 알려졌고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국제연맹조사단이 만주에 오자 왼손 무명지를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血書)를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1933년 3월 1일 중국동북지역을 강점하고 만주국을 세운 1주년기념행사날에
일제의 武藤信義 만주국 전권대사를 암살하려다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아 사경이 되어 출옥하였으나
8월 22일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순국(61세) 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영양군에서는 1999년 지사의 출생지인 이 곳에 생가를 복원하였고
지금은 생가 주변을 역사공원으로 조성하여
동상, 전시실, 추모각, 비석 등을 시설하고 있으며
동상 전면에는 지사의 일대기록이 적혀 있었다.
전시실 로비에는
"내 뜻을 알게하라,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어록과
의병을 조직하여 국내와 만주를 돌며 백골불굴의 정신으로
적과 맞서 수십년을 일관되게 투쟁한 여걸이 출현하였다.
이 여걸을 중국의 문단에서는 "혁명의 어머니"라고 칭하였고
적의 신문에 게제된 평론에서는 "전율할 노파"라고 하였다.
바로 그가 "근대 한국의 여걸"로 손꼽히는 남자현이다.
<1934년 1월 한국독립당 기관지 창간호에서>
조수양 「여걸 남자현선생전」글이 게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남자현역사공원을 돌아보며
역사공원의 조성으로 남 지사님의 독립정신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역사공원 현장을 나왔다.
안동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진보지역과 가랫재 터널을 지나 임동 갈전리까지
산불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가 있었다.
산불로 인하여 집과 가재도구를 잃어버린 이재민들은
갈 곳이 없고 농사철이 되었으나 농기계가 다 타버려
농사일을 할 수도 없으며
산불이 거쳐간 과수원은 싹트던 꽃잎마저 말라
열매를 보기 어렵게 되었고
급하게 피신하느라 상비약과 갈아입을 옷도 못 가져왔다고
하소연 하며 울부짓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취재를 하던 기자님들은 마늘과 자두, 사과, 복숭아, 송이 등
특산물의 생산에도 큰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고 걱정을 한다.
괴물산불로 인해 산불현장과 이재민 대피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여오시는 많은 봉사자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봉사자님들의 따뜻한 정성에 힘입어 이재민들도
마음에 안정을 찾아 하루 빨리 안정된 일상으로 돌아가시고
잃어버린 시설들도 빠른 시일내에 복구되기를 바라며
잎새달 4월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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