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출가 시를 남기고 그만 출가한 청나라 3대 세조 이야기
-무비스님-
불교역사에서는 왕이나 태자로 살다가 그 지위를 모두 다 버리고 출가한 사례들도 많지만 특히 우리 불자들에게 감동을 줄 사례로 순치황제 출가 시를 소개 드립니다.
순치황제는 중국 청나라 때 삼대 황제로서 세조라고 불리는데 이 분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중국천하를 통일하지요. 그리고 이 한편의 출가 시를 남기고 출가하여 우리불자 들에게 큰 감명을 준 그런 사례가 되겠습니다.
법화경에도 왕이 왕위를 버리고 신하와 궁전과 후비들을 다 버리고 출가한 내용이 나오지만, 직접 역사적인 사실로 청나라 3대 순치황제의 출가 詩는 일찍이 스님들에게 애독 되어오고 많은 불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내용입니다.
순치황제 출가 시(順治皇帝 出家 詩)
1)
天下叢林飯似山이니 鉢盂到處任君餐이로다 곳곳이 총림이요 쌓인 것이 밥이거니
천하총림반사산 발우도처임군찬 대장부 어디 간들 밥 세 그릇 걱정하랴
黃金白璧非爲貴라 惟有袈裟被最難이로다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을 알지 마소
황금백벽비위귀 유유가사피최난 가사 옷 얻어 입기 어려워라.
<곳곳이 총림이요, 천하가 전부 총림 이다> 그 당시 청나라 때 중국에 불교가 들어와서 불교가 아주 성했습니다. 지금 또 다시 불교가 일어나고 있는데 중국에 불교의 역사는 어느 나라 보다도 화려하지요.
天下叢林飯似山 (천하총림반사산) 이라 그랬어요.
천하가 다 가는 곳마다 곳곳이 총림이고 쌓인 것이 다 밥이다. 대장부 어디 간들 밥 세 그릇 걱정하겠는가? 그래서 출가시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2)
朕乃大地山河主 憂國憂民事轉煩 이내 몸 중원천하 임금 노릇 하건만
짐내대지산하주 우국우민사전번 나라와 백성 걱정 마음 더욱 시끄러워
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閒 인간의 백년 살이 삼만 육천 날이란 것
백년삼만육천일 불급승가반일한 풍진 떠난 명산대찰 한나절에 미칠 손가.
참 유명한 말이지요. 나라걱정하고 백성걱정하고 여기 저기 일어나는 반란걱정하고 별별 걱정 다했는데
그것이 어디 사람이 사는 거냐?
온 나라를 그 당시는 군주 시대니까 왕이 자기 나라인양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고 또 그만치 책임지고 나라를 다스렸지요. 그러고 보니까 왕이라고 하더라도 그 백년 왕 노릇한 것
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閒이라
백년삼만육천일 불급승가반일한
출가시중에서도 유명한 구절이지요. “왕 노릇을 하면서 백년 36000일을 산다 하더라도 승가에서 반나절 한가하게 아무 걱정 없이 그렇게 한나절 지낸 것만 못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3)
悔恨當初一念差 黃袍換却紫袈裟 당초에 부질없는 한 생각의 잘못으로
회한당초일념차 황포환각자가사 가사 장삼 벗어 치우고 곤룡포(袞龍袍)를 감게 됐네
我本西方一衲子 緣何流落帝王家 이 몸을 알고 보면 서천축(西天竺) 스님인데
아본서방일납자 연하류락제왕가 무엇을 인연하여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나
悔恨當初一念差 黃袍換却紫袈裟 처음에는 사실은 아주 수행하는 스님이었는데
회한당초일념차 황포환각자가사 한 생각 잘못해서 왕이 입는 황포를 바꿔 입게 되었다.
我本西方一衲子 나는 본래 저 서쪽 인도에 한 납자였다.
아본서방일납자
수행하는 사람이었는데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제왕의 집에 떨어져서 제왕으로 이렇게 왕 노릇을 하게 되었는가? 이것은 연유가 있습니다.
본래 인도의 수행자였는데 걸망을 짊어지고 저 산 어귀를 돌아서 언덕에 올라 앉아서, 넓은 땅에 펼쳐진 모습을 바라보고 한참 쉬고 있는데, 저 밑에 큰 길로 임금의 행차가 지나가는데 줄을 연이어서 풍악을 울리고 깃발이 나부끼고 왕이 지나갈 수 있도록 곳곳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여러 가지 장엄과 그런 거창한 행차를 가만히 내려 보니까 정말 근사하거든요.
비록 수행자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 왕의 행차가 너무 으리으리하고 근사하게 보여서 ‘야! 그 왕도 한번 해볼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그 인연으로 그만 죽어서 제왕의 집에서 태어나 왕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 왕이 되기 위해서 아둥바둥 숱한 애를 써도 그것이 되기가 쉬운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한 생각 떠올린 것으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런 욕심도 없고 아무런 망상도 없는 그런 수행자의 마음의 백지에 ‘아 저 왕도 한번 해 볼만 하구나, 왕의 행차도 참으로 근사하구나.’ 하는 한순간 그런 부러운 마음이 백지에 먹물 한 방울 떨어지듯이 그렇게 그분의 아뢰야식에 선명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의 생각이지마는 수행을 잘 했기 때문에, 왕 노릇을 할 만한 복은 충분히 있고 그래서 제왕가에서 태어나서 18년간이나 왕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4)
未生之前誰是我 我生之後我是誰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미생지전수시아 아생지후아시수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뉘이런가
長大成人是我 合眼朦朧又是誰 자라나 사람 노릇 잠깐 동안 내라더니
장대성인재아 합안몽롱우시수 눈 한 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뉘이런가.
아주 지극히 불교의 인과적인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또 나니 너니 하는 그런 진정한 사람의 존재의 실상을 여기서 꿰뚫어보는 그런 말씀입니다.
이 몸이 태어나기 전에 누가 나였는가? 누가 나로 태어났는가? 이거죠. 내가 태어난 후에는 그럼 나는 또 누구냐? 과거 생으로 우리가 거슬러서 생각한다면 나는 이게 누구냐 이거예요.
전생에 누가 오늘의 내가 되었다면 나는 내가 아닙니다. 전생의 그 사람이지요. 전생에 갑이라는 사람이 오늘의 을로 태어났다면 을이라는 사람은 어디 가버리고 전생의 갑이다 라는 거죠. 너니 나니 하는 그런 호칭이 사실은 알고 보면은 무의미 합니다.
티베트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머리 두 배나 되는 커다란 돌을 네모난 돌을 만들려고 썩썩 갈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그 둥근 돌을 네모나게 갈아서 뭐 하려고 하느냐 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버리려고 간다고 그랬습니다. 참 말은 간단하지만 정말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버리기 위해서 갈고있다 이거에요.
순치황제도 어쩌면은 그 18년 동안 왕 노릇을 하면서 천하를 통일한다고 했지만은 결국은 무엇입니까? 버리기 위해서 통일을 한 거죠. 둥근 돌을 갈아서 네모나게 만들어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니까 버리기 위해서 간다 이거예요. 버리기 위해서 갈것 같으면 뭐 한다고 그렇게 고생스럽게 가느냐 이거죠. 누구 없이 우리가 하는 일이 어쩌면 다 버리기 위해서 갈고 있는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순치황제도 사실은 버리기 위해서 18년 동안 왕이 돼서 그렇게 “우후구민”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한답시고 그렇게 열심히 둥근 돌을 모나게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아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버렸지요. 버리기 위해서 가는 일이 사람들이 사는 삶입니다. 참 아주 기가 막히는 이야기지요. 우리 모두가 정말 쓸데 없는 끝내 버리기 위한 일을 그렇게 아둥바둥 하고 나 있지 않는지요. 그런 줄 알고 우리가 한다면은 그렇게 집착하고 갈지는 않을 것입니다.
버리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모나게 되든지 둥글게 되든지 어차피 버릴 것이니까, 그렇게 크게 집착하지 않고 또 잘 안되더라도 그렇게 마음 상하지 않고 다치지 않는 그러한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순치황제의 이런 출가시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5)
百年世事三更夢 萬里江山一局碁 백년의 세상일은 하룻밤의 꿈속이요
백년세사삼경몽 만리강산일국기 만리의 이 강산은 한판 노름 바둑이라
禹疏九州湯伐桀 秦呑六國漢登基 대우씨(大禹氏) 구주긋고(劃定) 탕임금은 걸(桀)을 치며
우소구주탕벌걸 진탄육국한등기 진시황(秦始皇) 육국 먹자 한태조(漢太祖) 새 터를 닦았네
순치황제 출가 시 중에서도 좋은 구절이지요.
바둑 한판 두고 싹 쓸어버리지요. 흑백을 벌려놓고 내 집이니 너의 집이니 하고 반 집 싸움을 하는 그런 치열한 싸움을 하지만 그것은 쓱 한번 쓸어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만리강산이 한판의 바둑이더라.” 이렇게 읊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 어떻습니까?
대우씨(大禹氏)구주 긋고(劃定) 탕임금은 걸(桀)을 치며
禹임금이니 탕임금이니 하는 분들은 중국역사에서 아주 뛰어난 임금들로 기록된 분이지요. 그리고 그 업적이 중국 역사에 빛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대우씨가 구주를 긋고 탕 임금이 극악무도한 걸 임금을 주지육림에 빠져 가지고 온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그런 걸 임금을 쳤다 한들, 그리고 진시황이 한때 통일을 했지요.
그리고 또 한 태조가 새 터를 닦아서 한나라를 세웠지요. 그렇게 까지 설사했다 한들 그것 또한 “한판의 바둑이요.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더라.” 하는 그런 감회를 순치황제는 시로써 말하고 있습니다.
6)
兒孫自有兒孫福 不爲兒孫作馬牛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아손자유아손복 불위아손작마우 자손을 위한다고 마소 노릇 그만 하소
古來多少英雄漢 南北東西臥土泥 수 천년 역사 위에 많고 적은 영웅들이
고래다소영웅한 남북동서와토니 동서남북 사방에 한줌 흙으로 누워 있네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서 당신의 인생을 몇%쯤 쓴다고 보십니까?
내가 보기에는 한 6~70% 는 당신의 인생을 전부 자식들에게 다 쏟아 붇는 것같이 보이는데 어떠냐 라고 물어보면 여자들은 거의 95%내지 어떤 경우는 99%~ 100% 자식을 위해 살아왔다 라고 그렇게 느껴질 정도라고 합니다. 대개 부모들은 그렇게 산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녀들을 위한 마음이 위한 마음이 지극합니다.
兒孫自有兒孫福 不爲兒孫作馬牛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났으니
아손자유아손복 불위아손작마우 자손을 위한다고 마소 노릇 그만 하소.
그러니까 자기 자손들을 위해서 말 노릇이나 소 노릇 하는 것 그만 하라 이거예요. 먹든 굶든 자기는 다 각자 자기 복 가지고 태어났는데 뭘 그렇게 자식을 위해서 말 노릇 소 노릇 하느냐 이거예요.
古來多少英雄漢 南北東西臥土泥 수 천년 역사 위에 많고 적은 영웅들이
고래다소영웅한 남북동서와토니 동서남북 사방에 한줌 흙으로 누워 있네.
자식을 위해 말 노릇 소 노릇 했든 고래로 영웅호걸(이름 떨치던 그런 사람들) 지금 어디에 무엇을 하느냐 이거예요. 남북동서에 그야말로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다.
삼국지 서시에도 그런 것이 있지요.
古今多少事 都府笑談中 고금의 허다한 일들을
고금다소사 도부소담중 가벼운 우스개 소리에 부치네
고금의 얽히고 설킨 영웅들의 그런 기가 막힌 일들이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큰 일이고 훌륭한 일이고 위대한 일로 여겨 왔지 만은 “도부소담중이라.”그저 웃으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넘기고 말 그런 일에 불과하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도 우리가 알면서 또 현실에 충실하고 현실에 충실하되 또 이러한 궁극적으로 이렇게 인생이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가 늘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너무 어떤 무상감에 사로 잡혀서 인생을 포기 하듯이 그렇게 비관에 떨어져 있는 비관주의도 바람직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너무 현실에 집착한 현실주의자도 추해보이고 그러니까 어떤 현실과 궁극에 가서는 허망 하지만, 그 허망한 사실 이러한 것들을 양면을 잘 이해해서 조화롭게 사는 것이 이것이 불교적 삶이고 중도적 삶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런 양면을 조화롭게 맞추어서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지요.
7)
來時歡喜去時悲 空在人間走一回 올적에는 기뻐하고 갈 적에는 슬퍼하네.
내시환희거시비 공재인간주일회 속없이 인간세에 와서 한 바퀴를 돌단말가
不如不來亦不去 也無歡喜也無悲 애당초 오지 않았으면 갈일 없을 텐데
불여불래역불거 야무환희야무비 기쁨이 없을 텐데 슬픔인들 있을 손가.
올 때는 태어나면 얼마나 기뻐합니까? 갈 때는 다 슬퍼하지요. 아무리 아픈 사람도 가는 사람에게는 다 슬픔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속없이 인간에 와서 한바퀴 돌다가 가는 거죠. 물론 내 스스로 내 의지로 오는 것은 아니지 만은 인연에 의해서 오긴 왔었어도 그래도 쓸데없이 와 가지고 한 바퀴 돌다가 가는 거죠. 그래서
不如不來亦不去라 오지도 않고 차라리 가지도 않는 것
불여불래역불거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갈 일도 없지요. 그러니까 오지 않아서 갈 일도 없는 그런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러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왔다고 기뻐할 일도 없고 갔다고 슬퍼할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그런 삶이 아닐까? 그래서 여기서는 본래로 와도 온 것이 없고 가도 간 것이 없는 그런 이치를 여기서 은근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 벌어진 인생을 지금 이 자리에서 부정한다고 부정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달리 다른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본래 와도 온 것이 아니고 가도 간 것이 아닌, 본래로 공(空)인 자리고 연기(緣起)의 자리인 그런 존재의 실상! 삶과 죽음의 실상을 우리가 꿰뚫어봐야 한다는 의미로 우리가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8)
每日淸閑自己知 紅塵世界苦相離 나날이 한가로운 내 스스로 알 것이라
매일청한자기지 흥진세계고상리 이 풍진 세상 속에 온갖 고통 여의고
口中吃的淸和味 身上願被白衲衣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미(禪悅味)요
구중흘적청화미 신상원피백납의 몸 위에 입는 것은 누더기 한 벌 원이로다.
그러니까 더 이상 호위호식을 내가 여기서 바랄 수 없는 것이고 또 바랄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러니까
每日淸閑自己知 (매일청한자기지)
한가로운 그런 삶 이것을 누리고 느끼며 사는 것
그래서 이 풍진세상 속에 온갖 고통을 다 떠났다는 거죠. 입에는 시원한 선열의 맛이고 몸에는 누더기 한 벌 척 입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9)
四海五湖爲上客社 逍遙佛殿任君棲 사해와 오호에서 자유로운 손님 되어
서해오호위상객사 소요불전임군서 부처님 도량 안에 마음대로 노닐세라
莫道出家容易得 昔年累代重根基 세속을 떠나는 일 쉽다 말을 하지마소
막도출가용이득 석년루대중근기 숙세(宿世)에 쌓아 놓은 선근(善根) 없이 아니 되네.
오호와 사해 동서남북 조선팔도 어디든 간에 손님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부처님 도량이지요. 곳곳이 절이니 마음대로 노니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쉽다고 말하지 마라.
莫道出家容易得하라 출가하는 것이 쉽다고 말하지 마라.
막도출가용이득
이것이 다 구대(九代)가 적선(積善)을 해야 된다.
“일자출가(一者出家)에 구족(九族)이 생천(生天)이다.”
“한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이 천상에 나는 그런 복을 얻게 된다.” 하는 그런 말도 있고 “ 구대가 적선을 해야 만이 비로소 한 자식이 출가를 한다.” 그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보면은 한 집안에 스님이 하나 딱 되어서 그 스님이 스님 생활을 제대로 하면은, 그 집안에는 왠지 기가 빠졌는지 정기가 다 어떻게 그 한 사람이 쓸고 가버렸는지 크게 번성하는 것을 보기가 어려워요. 그렇다고 그 집안의 자식이 출가해서 집안이 망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만은 그런데 어쨌든 한 집안에 자식이 하나 출가해서 수행을 제대로 하면은 왠지 그 집안이 크게 번성하지 않더라 하는 것은, 저희들은 스님이니까 그런 이야기도 곧 잘 듣고 흔히 보기도 하는 그런 사례입니다.
그런데 그만치 어렵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중 되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나 하지만은, 사실은 이것이 오랜 세월 선근(善根)을 쌓아야 만이 될 수 있는 일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도 여기에 적고 있습니다.
10)
十八年來不自由 山河大戰幾時休 18년 지나간 일 자유라곤 없었도다.
십팔년래부자유 산하대전기시휴 강산을 뺏으려고 몇 번이나 싸웠더냐.
我今撤手歸山去 那管千愁與萬愁 내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아금철수귀산거 나관천수여만수 천만 가지 근심 걱정 내 아랑곳할 것 없네.
내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마지막 구절이 그렇습니다.
十八年來不自由 (십팔년래부자유)
18년 동안 왕 노릇을 하면서 정말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거예요.
山河大戰幾時休 (산하대전기시휴)
넓은 중국 변두리에서 항상 반란이 일어나고 작은 나라들이 만들어져서 서로 싸우고 그저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하는 그런 일들이 중국 역사에 늘 있어왔습니다.
我今撤手歸山去 那管千愁與萬愁 내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아금살수귀산거 나관천수여만수 천만 가지 근심 걱정 내 아랑곳할 것 없다
누가 주인이 되든지 어느 땅을 누가 얼마만치 차지 하든지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익하고 그것을 뺏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또 그만치 고통이 있을 것이고, 크게 보면 누가 땅을 차지했던지 간에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지요.
어느쪽 입장에서 그것을 평가하는 거기에 무슨 이해득실이 있는 것이지 뺏은 사람은 좋고 빼앗긴 사람은 나쁘고 서로 어떤 입장이냐 하는 그 차이일 뿐이지, 사실은 별 것이 아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것은 내가 관심 갖지 않으면 그것으로서 종결이고 근심걱정 아랑 할 것 없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오늘은 청나라의 삼대 임금 순치황제! 세조로서 왕 노릇을 하다가 천하를 통일하고 출가하게 된 그 출가 시를 소개해드리는 그런 시간이 되었습니다. 법화경의 경문에 보면은 “여러 임금들이 부처님께 나아가서 최상의 도를 물을 때 궁전도 버리고 산하도 버리고 후비들도 다 버리고 수염을 깎고 법복을 입고 수행을 하더라.” 하는 그런 구절에 실제로 역사적으로 있었던 어떤 한 예를 들어서 오늘은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법회 여기까지입니다. 고맙습니다.
대보살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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