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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과 세종대왕 이야기(2)
-세종대왕은 에너지 넘친 임금님-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 기간 52년에 82세에 생을 마감한 21대 영조임금을 제외한 대부분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다.
몇 백 년 전의 짧은 평균수명도 무관하지 않지만, 과중한 업무와 기름진 음식 과다섭취와 운동부족, 의료수준 낙후, 또 여러 명의 부인에게 잦은 출입은 수명도 재촉하지 않았을까 한 생각이 든다.
고종황제가 행차를 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들고 이리저리 뛰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 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 황제의 탄식은 당시엔 운동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고 한 이야기임이 틀림이 없다. 요즘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열심히 운동을 먼저 하시지 않았을까?
조선 3대 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은 10명의 부인과의 사이에 12남 17녀를 두어 총 29명의 자녀를 두었고,
9대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12명의 부인 사이에 16남 13녀를 두어 역시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각각 55세, 37세에 생을 마감했으니 수명이 그리 긴 편은 아니다.
두 분은 역대 임금 중에서도 여러 명의 부인과 다수의 자녀생산을 하여 길지 않은 수명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세종대왕 역시 6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고 54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세종대왕의 경우, 새벽 4시에 상참을 하여 늘 이른 새벽에 조례를 시작했다면 3시쯤에는 기침(起寢)을 해야 하는데, 그 많은 업무와 짧은 수면 시간에 여러 침소의 잦은 출입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궁금하다. 과연 안팎으로 에너지 넘친 임금님이었다.
밤낮으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는 임금님 곁에 있다가는 제 命에 못 살 것이라며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며 스스로 도망가다시피 한 이 사실도 에피소드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이 신하들에게 그리 닥달하지 않았다면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음악 방면으로 그리 훌륭한 업적을 쌓는 일이 가능이나 했을까?
일하는 사람보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더 부지런해야함은 물론이다.
세종대왕이 영면한 영릉(英陵) 입구에 전시된 그의 업적을 보자!! 이것은 과학방면의 천문관측기기 전시의 일부분일 뿐이다.
놀랍지 않은가? 거기에 오늘날 우리 모두가 매일 쓰는 한글창제까지..
세종대왕상-
영릉(英陵:세종, 소헌왕후)-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적 제195호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 영릉(英陵)도 세계문화유산.
훈민정음 해설-
세종대왕 능역 정화비- 1975년 세종대왕의 높은 뜻과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전 박정희 대통령) 영릉을 정화하였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한 정화비.
혼상(渾象)- 혼상 : 세종 19년(1437년) 경북궁내에 만든 혼상은 오늘날 천구의와 같이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 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위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 볼 수 있도록 한 천문기기다.
둥근 혼상을 회전시키는 축은 지구의 자전축인 북극(북극성 방향)과 남극 방향이 일치하도록 설치되어있다.
간의(簡儀)- 간의는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다.
소간의(小簡儀)- 소간의는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문관측 기기다. 세종 16년(1434)에 이천, 정초, 정인지가 제작하여 경복궁 천추전과 서운관에 설치하였 다.
천평일구(天平日구)- 천평일구는 세종 19년(1437)에 제작된 해시계 중의 하나이다. 용기둥으로 부터 남쪽 못까지 연결된 실은 하늘의 적도면과 일치하도록 설치되어 있는 시반면 중앙을 수직으로 통과하며, 태양빛에 의해 시반면 위에 맺힌 실 그림자로 그 때의 시간을 알 수 있다. 시반 앞면은 하절기에, 뒷면은 동절기에 사용했다.
현주일구(懸珠日구)- 현주일구는 세종 19년(1437)에 제작된 일종의 해시계다. 남북을 잇는 가는 줄을 지구의 자전축 방향과 일치하도록 추를 달아 팽팽하게 당기도록 설치하여 이 줄의 그림자를 둥근 시반에 나타나게 하여 그 가리키는 눈금을 보고 하루의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정남일구(定南日구)- 세종 19년(1437)에 제작한 해시계의 하나로 지남철이 없이도 남쪽 방향을 결정하여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기기다.
1 혼천의(渾天儀)- 혼의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천체위치 측정기로서 일월오행성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천체 관측 기기다.
1만 원권 뒷장에 그려져 있는 혼천의는 국보 제230호이다.
관천대(觀天臺)- 조선시대 천문관측대로 일명 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립 천문기상대인 서운관을 2곳에 두었는데 특히 세종대왕은 경복궁안 서운관에 대간의대, 북부 광화방 서운관에 소간의대를 설치하고 관원들로 하여금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도로 하였다.
규표(圭表)- 규표는 일 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 날인가(365일 4/1날)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였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 표가 정오에 만드는 해의 그림자 길이를 수평으로 눕힌 눈금이 있는 규로 재서 가장 긴 때를 동지, 가장 짧은 때를 하지로 정했다. 동지와 하지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날을 봄에는 춘분, 가을 에는 추분이라 하고 이 4절기를 뺀 나머지 20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한 것이다. 하루 중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은 때는 정오이며 규를 설치한 방향은 정확하게 그 지점의 남북방향이다.
앙부일구(仰釜日구)-
앙부일구(仰釜日구)-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처음 만들어져 조선말까지 사용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절리 사용되던 해시계의 일종이다.
일구대(日구臺)- 일구대는 앙부일구를 올려놓는 받침대로 화강암에 아름다운 조각을 해 놓은 것이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일성정시의는 세종 19년(1437)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고안하여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문관측기기다.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은 낮에는 해시계의 원리로, 밤에는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규칙적으로 회전하는 별시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자격루(自擊漏)- 자격루는 조선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등이 제작한 물시계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저절로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부착한 것이다. 자격루의 작동원리는 파수호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수수통에 고이면 시간의 눈금이 있는 살대가 떠오르면서, 지렛대 원리의 자동조절장치를 움직여 스스로 종과 북과 징을 쳐 시간을 알려주도록 되어 있다.
수표(水標)- 수표는 세종 23년(1441)에서 세종 24년(1442)에 걸쳐 제작, 서울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된 하천수위 측정계이다. 수표의 발명은 측우기와 함께 우기시기가 7~8월에 치우쳐 있는 우리나라의 자연 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홍수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측우기(測雨器)-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종23년(1441년)에 세계 최초로 발명한 우량계다.
풍기대(風旗臺)-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여 기상을 예측하기 위하여 바람 깃발 즉 풍기를 세운 풍향기의 대이다. 세종시대에는 농업기상학이 발달하여 기상관측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강우량의 측정과 함께 풍향과 풍속의 관측은 중요시되었는데, 풍기대는 우리 손으로 만든 독특한 기상관측기기의 하나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하늘의 형체를 본떠 황도 부근을 12지역으로 나눈 12차와 이에 대응하는 지상의지역인 분야에 맞추어 별자리의 위치와 크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천문도이다. 앞면은 태조 4년(1395년)에, 뒷면은 세종 15년(1433)에 제작되었으며, 검은색 돌 양면에 새겨져 있다.
' 일성정시의' 건너편으로 보이는 세종전-
세종전- 세종전은 한글창제의 의의 및 유래, 학문의 진흥과 제도의 정비, 과학의 발전, 음악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세종대왕의 업적을 간추려 소개한 곳이다. 과학 천문기기 야외 전시장과 인접한 영릉으로 들어가는 왼편에 세워져 있다.
세종전 내부에 전시돼 있는 세종대왕 영정-
세종전 입구에 세워진 세종대왕의 업적-
세종전에 내부의 세종대왕영정과 집현전 학사들의 모습-
건고(建鼓)- 세종 때 만들어진 이 북은 궁중 조회나 잔치 때 사용되었다. 지금도 종묘와 제례악 등에 사용된다.
편경(編磬)- 단단한 경석으로 만들어 돌의 두께에 따라 음정이 결정되는 12율 4청성의 아악기로 음색이 청아하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처음 들여온 것을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명하여 개량한 것이며, 지금도 종묘와 제례악 등에 사용된다.
고려사(高麗史)-
* 세종 당시에 제작된 천문기기들은 아쉽게도 대부분 소실돼 세종실록 문헌을 근거하여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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