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주불사의 주당(酒黨)이 아니라도 누구든 안다.
하루중 저물 무렵에 기울이는 술맛이 가장 좋다는 것을….
취하고자 마시는 술이 아니라,
풍류로 드는 술잔이라면 한 해 중 가장 술맛이 좋을 때는
마찬가지로 한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가을쯤이 아닐까.
한 해 농사로 거둬들인 찹쌀이며 잘 띄운 누룩으로 빚어내는
전통주가 딱 익어가는 때다.
때맞춰
한국관광공사가 가볼 만한 곳으로 술 익는 마을 다섯곳을 골랐다.
여행지 인근에서 맛볼 수 있는 각 지역의 이름난 전통주를 소개한다.
# 솔 향과 국화 향이 어우러진다…경주 양동마을 송국주
송국주(松菊酒).
말 그대로 소나무(松)와 국화(菊)로 빚는 술이다.
소나무는 선비의 절개를 말하고,
국화는 장수를 의미하니 술 빚는 재료만으로도 풍류가 느껴진다.
송국주는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의 가문을 따라 내려오는 술인데
경주 양동마을의 한옥 민박 겸 전통식당인 ‘우향다옥’을 운영하는
이지휴씨가 9대째 빚고 있다.
보통 술은 지하수를 떠서 쓰는데,
특이하게도 송국주는 ‘술물’을 따로 만든다.
지하수에다 국화잎, 감초, 조청을 넣고 가마솥에서 2시간을 끓인 뒤
천천혀 식혀서 물로 쓴다.
말하자면 국화차를 달인 물로 술을 담그는 셈이다.
솔잎을 올려 쪄낸 밥을 누룩과 버무려 술물을 붓고 골고루 섞은 뒤
항아리에 옮겨 담고 마지막으로 잘 말린 구기자를 넣어 숙성시킨다.
1주일쯤 발효시켜 마시는데 알코올도수는 15도 내외.
옅은 갈색의 술은 부드럽게 넘어간다.
송국주를 빚는 양동마을은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
인근의 옥산서원이며,
이언적이 기거했던 독락당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양동마을 054-779-6105, 우향다옥 054-762-8096
# 3대째 가업으로 이어온 막걸리맛…지평막걸리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이렇다 할 명소 하나 없는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1925년 문을 열었다는 막걸리 양조장인 지평주조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지평주조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술도가다.
지평막걸리는 3대째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전통 방식 그대로 누룩곰팡이를 오동나무 상자에서 배양해 술을 빚는다.
지평막걸리는 숙취가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진·선·미라는 세 가지 브랜드를 붙인 전통주를 선보이고 있다.
진막걸리는 정통 생막걸리이고,
선동동주는 생효모를 쓴 생동동주,
미막걸리는 순 우리 쌀로 만든 생막걸리다.
막걸리 외에도 지평주조의 양조장 건물도 찬찬히 둘러볼 만하다.
6·25전쟁 당시에는 양조장이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지휘소로 사용됐는데
양조장 전시실에는
당시 프랑스 몽콜라르 장군부대의 기념식 장면이 담긴 사진이 걸려있다.
지평주조 부근의 서종면에 가면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테마로 한 문화마을인 ‘소나기마을’이 있다.
지평주조 031-773-7030, 소나기마을 031-773-2299
# 아무 때나 맛볼 수 없는 귀한 술…문경 호산춘
새재가 있는 문경은
예로부터 영남 일대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을 오가던 관문이었다.
새재를 오가던 선비들이 일대의 주막거리에 묵어가며
술잔을 기울였을 것임은 당연지사.
그러니 문경에 맛 좋은 술이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리라.
문경에는 장수 황씨 집안의 가양주인 호산춘이 있다.
호산춘은 무려 500여년을 이어온 술로
경주 교동의 법주 및
서천 한산의 소곡주와 더불어
한국의 3대 명주로 불리기도 한다.
호산춘이란 이름은
황씨 집안의 황의민이 자신의 시호인 호산(湖山)에다가
알코올 함유량이 높고 맛이 담백한 최고급 술을 의미하는 ‘
봄 춘(春)’자를 붙인 것이다.
멥쌀과 찹쌀을 1대2의 비율로 빚는데,
쌀 1되에 술 1되가 나오는 고급술이다.
알코올 함유량은 18%로 발효과정에서 솔잎이 첨가돼 담황색을 띤다.
생주라 상온에서의 유통기한은 20일 정도지만,
냉장하면 1년 정도 보관할 수 있다.
문경새재와 함께 진남교반의 토끼비리 등을 함께 둘러보는 코스를 짜면 좋다.
김룡사와 대승사 등의 이름난 절집들도 빼놓으면 아쉬울 곳이다.
특히 대승사가 거느린 암자들은 늦가을에 최고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호산춘 054-552-7036, 문경새재 도립공원 054-571-0709
# 선명한 붉은색이 아찔하다…진도 홍주
진도에 그림이며 글씨,
소리 문화의 전통이 남아있는 것은 그곳이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남도 땅 끝자락까지 귀양 온 선비들은 수준 높은 문화를 유배지에 전했다.
그 문화 중에서 술이 빠질 리 없다.
진도의 술 홍주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술이다
. 발효된 밑술을 증류해낸 홍주는 알코올 함유량 40%의 독주다.
어찌나 술이 독했던지 조선시대 허종이 홍주를 마시고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비를 폐출하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말에서 떨어져 집으로 돌아왔고,
이로써 훗날 연산군의 칼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홍주는 증류 과정에서
진도 특산의 약재인 지초의 붉은빛이 배어들어 붉은색을 띠는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이 붉은색에 반했던지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의 풍경’이란 시구를 남기기도 했다.
진도에는 몽골군에 항쟁하던 배중손 장군의 삼별초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용장산성이나 남도석성 등을 찾아가볼 만하다.
임회면 삼막리의 남진미술관에서는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이하응,
소치 허련을 비롯해 단계 하위지,
다산 정약용, 공재 윤두서 등의 작품을 비롯해
남농 허건, 운보 김기창 등 현대작가의 작품 등도 만날 수 있다.
진도홍주 신활력사업소 061-540-6366, 남진미술관 061)543-0777
▲ 양조장 견학코스부터 시음장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충북 진천의 덕산양조장.
이곳에서는 생막걸리와 수제 소시지도 맛볼 수 있다.